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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어제/ 금동원

금동원(琴東媛) 2009. 11. 19. 10:54

 ■계간평-시

‘빈 항아리’ 혹은 채움의 순환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2008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의 담론이나 화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의 방향이 어떻게 설정되고 전개될 것이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문화예술전반에 걸쳐서 진보와 보수라는 양분된 체계에서 서로 반목하는 양상에서 발전은 커녕 퇴보라는 솔직한 담론이 주를 이루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코드 인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여 선비정신을 고수하는 보수측 예술인들을 홀대하면서 우리 문학계도 예외일 수 없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진실이다. 국민들을 화합시키고 정신적 조화를 도모해야 할 고위 정책자들이 오히려 분열을 조장했다는 책임을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해서 우리는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전제 아래 연두 화제로 등장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올해로 현대시 100년을 맞는다. 육당 최남선이 1908년에『少年』지에<해에게서 소년에게로>를 발표한 것을 깃점으로 해서 우리 시는 한 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더러는 ‘시의 날(11월 1일)’을 정해서 기념행사도 하고 있지만, 올해는 통합된 문인단체에서 거국적으로 ‘현대시 100년’을 기념하여 국민들의 정신선양에 기여해야 한다는 담론이 팽배해 있다.
이런 일도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배려하고 지원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두 담론과 화제가 새 정부와 연관이 있음에 우리는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동향이 곳곳에서 시작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우선 한국문인협회에서는 ‘경제 살리기’에 부응해서 ‘문학 살리기’에도 열정적인 비젼을 제시해한다는 성명서도 발표하였으며 ‘현대시 100년’에 관해서는 문협에서 새로 창간한『계절문학』에 성찬경, 성춘복, 김송배, 이강렬 등이 특집좌담에 참여하여 그 역사를 일별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리고 조선일보에서는 ‘현대시 100년’을 맞아 하루에 시 한 편을 해설과 함께 게재하고 있어서 그나마 이를 잊지 않으려는 시인들의 가슴을 위무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현역 시인 100명에게 설문으로 각 10편씩 추천을 의뢰한 결과 김수영의 <풀>, 한용운의 <님의 침묵>, 백 석의 <남신의주 박시봉방>, 김소월의 <진달래>, 김춘수의 <꽃>, 윤동주의 <서시>, 서정주의 <동천>, 신경림의 <농무>, 정지용의 <향수>, 박목월의 <나그네> 등이 추천횟수 베스트 10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한편 각 문학지에서도 신년특집이란 이름으로 시가 많이 발표되어 현대시 100년을 기리려는 정성들이 엿보이고 있다. 지난 호『지구문학』에서도 34명의 작품 70여편이 게재되어 시인들과 독자들이 동시에 즐거움을 나누는 쾌거가 있었다. 이처럼 많은 작품들 중에서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비움’과 ‘채움’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기로 한다.

내 눈물로는 채울 수 없는 텅 빈 항아리
놔 두소
돌팔매질 보고 빙그레 웃는 속마음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찾아가 묻힐 항아리

  陳乙洲 원로시인의 <텅 빈 항아리> 전문에서 느낄 수 있는 ‘눈물’과 ‘빈 항아리’와의 상관성은 절묘한 서정의 심연으로 몰입하게 한다. 이처럼 ‘비어 있음’에는 사물이거나 관념 모두에게서 우리는 ‘채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눈물로는 채울 수 없’다는 존재의 성찰을 가미한 이미지의 적출은 ‘비어 있음’에 대한 예비적인 진실의 창출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시적 화자는 그냥 ‘놔 두소’라는 단정적 어조로 시의 묘미를 증대시키는 효과를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찾아가 묻힐 항아리’라는 어조는 시간성에서 아직 채울 단계가 아니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 나의 영육(靈肉)이 동시에 스스로 찾아가서 채워질 것을 염원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발원은 시인의 숙성된 가치관의 발현이다. 존재의 근원이나 그 의미를 관조하는 고차원의 정서와 사유(思惟)가 이렇게 짧은 행간에서 공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시인들이나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이처럼 ‘비움’의 언어로 시적 의미를 수용하는 데는 다양한 인생관이 포괄되어야 한다. 결국 인간의 생명성과 결부하여 형상화하는 경향으로 표출되는데 대체로 시인들은 성찰의 의미를 시의 원류로 설정하는 특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기에 지구를
맘껏 달리고 뛰고 날으고 온통 헤집고 싶어도
조용히 나무 그늘에서
기도하는 수도자의 마음 비움으로 살아간다
--신인호의 <節制> 끝 부분

사선을 넘어 생성의 꿈 그리며
나풀거리는 설렘
불타는 열정으로 사랑을 가꾸고

아름다운 꽃빛 열어
들을 산을 강둑을
누비던 젊음 갈무리하고 있는데

푸른 세계 비켜서서
따사로운 햇살 한 자락 깔고 누워
제살 그을리고 살찌우며

풍요의 메시지 띄우고
가슴 가득 은은한 향기 채워 줄
아름다운 가을의 여백이여
--심의표의 <가을 명상> 전문

  이 두 작품에서는 ‘비움’과 ‘채움’의 등식을 대비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신인호는 ‘지구를’ ‘온통 헤집고’픈 욕구 또는 기원이 그의 내면에 잠재해 있지만, ‘마음 비움으로 살아’가는 성찰 혹은 관조의 메시지가 현현되고 있다.
그러나 심의표의 ‘명상’은 ‘가을의 여백’에 ‘은은한 향기’로 채워야 할 기대를 갖게 함으로써 관조를 단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의미를 진하게 분사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전환은 통시적으로 일상성을 탈피하고 새로운 지향적 관념에서 작품으로 창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실재인 일상 공간에서의 탈자적(脫自的)인 요소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절대성을 여과한 성찰의 의미가 깊게 배어있어서 인생의 완숙을 예감케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린 맘에도 산다는 게 그런 거라고
한 뼘도 안 되는 어깨에 얹혀 있던
生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야
--금동원의 <어제> 끝 부분

저물녘 현관 앞에 비스듬히 기댄 지팡이 둘이
구부정하게 생의 순간을 잡고 있다
--이종숙의 <고목나무> 첫 연

아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를 기원하면서
강물 같은 은빛 소망
강줄기 모래알처럼 흘러가고 싶습니다.
--한경선의 <하도 물이 맑아 이름 모를 강가에 앉아서> 끝 연

여기에서도 삶의 성찰이라는 명제를 고심하고 있는 흔적이 명백하다. 금동원이 ‘生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나 이종숙이 ‘생의 순간을 잡고 있’는 시적 정황과 한경선의 ‘흘러가고 싶’은 기원의식은 시인의 삶에 관한 반추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창조해야할 시적 혹은 인간적 진실은 무엇인가를 심도 있게 유추하면서 재창조하려는 심성의 발현이라고 믿어진다.

 

우리 인간에게는 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시인의 사유에는 지적인 정서나 지적인 의식의 흐름이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설령 교시적(敎示的)인 의미에 머물지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일이 시인의 과제이며 여기에서 창출된 주제와 언어의 묘미는 곤 시의 위의(威儀)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움’의 미학을 성립시키고 다시 영혼의 음악을 채울 수 있기를 모든 시인들은 열망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의 실재와 정신의 자아는 대체로 분리하여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으나 시인들의 정서 그 중심축에는 언제나 영육(靈肉)이 동행하면서 작품으로 승화해야 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나 지론은 영혼과 육신의 조화로운 화해를 갈망하는 시인들의 중요한 소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시의 시법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물과 관념이미지를 폭넓게 그리고 적절한 투영이 보이지 않아서 외관적 묘사나 독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은 시인들의 고뇌와 갈등이 그만큼 처절하지 못한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 지난 무 같다든가
야무진 무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고등어조림에 쓰려고 잘랐더니
아뿔사,
매끄럽고 단단하여
다시 한 번 설이 지난다 해도
끄떡없을 것 같았는데
숭숭 뚫린 구멍

한쪽 귀퉁이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을

지금은 골다공증
--최혜원의 <무> 전문

최혜원은 일상의 흔한 사물에서 이미지와 상징의 투영을 시법으로 적용하는데 익숙한 것 같다. 단순한 ‘무’에서 ‘골다공증’이라는 자아를 연결하는 이미지의 추출은 단순한 듯하지만, 많은 사유가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요즘 시법의 하나로 등장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기법으로 이야기처럼 시적 상황과 어조를 구사한 점도 특이하다.
이러한 시법의 구사는 최전엽의 <낙엽>과 박은석의 <가을 수채화>, 리 형의 <헌 구두> 등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만에 풍성한 시를 읽었다. 나름대로의 주제가 승화되고 있으나 모두를 언급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우리도 이제 현대시 100년이면 각자의 개성이 독특하게 분출하는 작품의 창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촉진시켜야 한다. 흔히들 우리 시들이 한결같이 연약하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진 서정적 묘사를 쉽게 탈피하지 못하는 연유도 있다. 좋은 시는 항상 인간의 문제 즉 휴머니즘의 축에서 사유하는 영혼의 진정한 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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