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1~3권)
-박지원 저/ 김혈조 역/ 돌배개/ 2009년 발행
책소개
조선 최고의 문학 작품인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 『열하일기』의 새로운 번역·완역판 세트이다. 이제껏 번역되어 출간된 판본들을 참고하여 오역과 오류의 악순환을 바로 잡아 『열하일기』를 바르게 읽고자 하여 만들어졌다. 이전의 번역을 그대로 베껴서 지속되는 오역의 고리에서 벗어나, 정확한 번역으로 열하일기를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을 다녀왔다. 공적인 소임이 없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연암은 북경 여행과 함께 전인미답의 열하 지방을 체험한 후 돌아온 즉시 열하일기 집필에 전념하여 이 작품을 완성한다. 이 책에는 시대착오적인 반청(反淸) 사상을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등 현실 비판적인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동안 그동안 잘 밝혀 지지 않은 어려운 전고나 고사성어를 모두 찾아 해설함으로써 오역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역자가 직접 연행의 전 코스를 답사하면서 관련된 곳들을 촬영,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그리고 상세한 주석을 통해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열하일기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했다.
작가소개:박지원
조선 후기의 문호이자 실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그밖에 공작관·무릉도인武陵道人·박유관주인薄遊館主人·성해星海·좌소산인左蘇山人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당시 중국의 정세를 살피고, 그 선진 문명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심도 있는 내부 비판을 시도하였다. 1786년 음직으로 처음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이후 여러 말단 벼슬을 거쳐 1792년 안의 현감에 임명되었고, 1797년 면천 군수가 되었다. 1800년 양양 부사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홍대용과 함께 조선의 주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 위에서 이용후생의 실학을 모색했으며, 창조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를 통해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갖고 있던 미망과 편견, 허위의식과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와 미의식의 지평을 몸소 열어 나갔다. 문집으로 『연암집』이 전한다.
박지원은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문체반정의 핵심에 자리하게 된 『열하일기』를 통해 불후의 문장가로 조선의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벗어나 이덕무, 홍대용, 이서구, 백동수 등과 어울려 수학하였다.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열하일기』라는 저서를 남겼다. 그는 69세에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역자 김혈조
1954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이래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하고 있다. 한국한문학의 산문 문학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으며, 특히 연암 박지원의 산문 문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연암의 산문 작품을 연구한 『박지원의 산문문학』이라는 저서와, 산문을 가려 뽑아 번역한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는 역서가 있다. 「연암체의 성립과 정조의 문체반정」이라는 논문 이외에 연암의 문학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1권
역자 서문― 왜 다시 『열하일기』인가?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渡江錄
심양의 이모저모―성경잡지盛京雜識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일신수필馹迅隨筆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관내정사關內程史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2권
태학관에 머물며―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에서 만난 중국 친구들―경개록傾蓋錄
라마교에 대한 문답―황교문답黃敎問答
반선의 내력―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을 만나다―찰십륜포札什倫布
사행과 관련된 문건들―행재잡록行在雜錄
천하의 대세를 살피다―심세편審勢編
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망양록忘羊錄
곡정과 나눈 필담―곡정필담鵠汀筆談
피서산장에서의 기행문들―산장잡기山莊雜記
3권
요술놀이 이야기―환희기幻戱記
피서산장에서 쓴 시화―피서록避暑錄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구외이문口外異聞
옥갑에서의 밤 이야기―옥갑야화玉匣夜話
북경의 이곳저곳―황도기략黃圖紀略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알성퇴술謁聖退述
적바림 모음―앙엽기
동란재에서 쓰다―동란섭필銅蘭涉筆
의약 처방 기록―금료소초金蓼小抄
출판사 리뷰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 중에서 열하일기만큼 많이 번역되어 출판된 책은 없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한글 필사본을 제외한다고 해도(公刊이 아니므로 우선 제외), 일본인 아오야기 고타로가 1915년에 번역본을 인쇄하여 출간한 이래로 오늘날까지 10여 종 이상의 번역본이 나왔고, 소설식으로 요약하거나 리라이팅한 것 또는 아동용 만화로 엮은 것 등을 합하면 그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베개가 〈새 번역 완역 결정판〉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열하일기를 새롭게 출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열하일기〉를 읽는다!
― 오역과 오류의 악순환을 완벽하게 바로잡은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조선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품을 고른다면 단연 손에 꼽을 정도로, 열하일기는 조선 최고의 문학 작품이다. 조선의 대문호라 불리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명성도 열하일기로 인해 더욱 높아졌다. 주지하다시피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이다. 그는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을 다녀왔다. 공적인 소임이 없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연암은 북경 여행과 함께 전인미답의 열하 지방을 체험하였다.
1780년(연암 44세) 10월 말, 연암 박지원은 중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즉시 열하일기 집필에 전념했다. 이 초고는 책으로 완성되기도 전에 그 일부가 주변의 지인들에 의해 전사(傳寫)되었고, 급기야 한양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연암체’(燕巖體)라는 새로운 글쓰기 문체가 생겨날 정도로, 열하일기는 당시 독서계와 문인 지식층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새로운 글쓰기 시도에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나라 연호를 썼다 하여 노호지고(虜號之稿)라고 비방하였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던 국왕 정조(正祖)까지 이 작품을 주목하고 문제시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에 속한다. 시대착오적인 반청(反淸) 사상을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등 현실 비판적인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담긴 이 책은 연암 당대는 물론이고 조선조 내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연암 당대는 물론이고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으로 있던 조선 말기에도, 그리고 서적의 출판과 보급이 비교적 활황을 보였던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도 공간(公刊)되지 못하고 오직 필사로만 유통되었다.
열하일기는 근대 이후에야 비로소 인쇄본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보급되었다. 기왕에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한글본 열하일기가 조선 후기에 나오긴 했지만(『열하긔』, 1791년 전후로 추정; 『연암열하일긔』, 1799년 혹은 1899년으로 추정) 필사본의 형태이고, 인쇄의 방식으로 공간된 것은 1915년에 일본인 아오야기 고타로(靑柳綱太郞)가 경성(京城)에서 조선연구회 고서진서간행(古書珍書刊行)의 제 20, 21집으로 간행한 『燕巖外集』 상, 하 두 책이 처음이다. 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의 번역본이 나왔다.
열하일기 번역본의 역사
열하일기는 무수한 번역본이 있으며, 선본이 되는 책은 10여 종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을 요하는 번역본 네 종을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성칠(金聖七) 선생이 번역하여 정음사에서 출간한 문고본 5책이다. 1948년 3월부터 1권이 간행되기 시작하여 1950년 2월에 5권이 나온 이 책은, 한국전쟁과 역자의 갑작스런 별세로 인해 완역되지 못했다. ‘도강록’에서 ‘태학유관록’까지 열하일기 전체 분량의 3분의 1를 번역했는데, 꼼꼼한 주석과 유려한 번역 문체로 가독성 높은 역작을 만들었다. 특히 『청사고』(靑史稿) 등과 같은 중국의 역사서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고증하여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약간의 오역과 분명치 않은 전고 사용, 인명에 대한 오류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서는 열하일기에 대한 최초의 전문 번역으로 손꼽을 만하다. 또한 이 책의 출간 이후 수많은 열하일기의 번역서가 이 책을 표절했는데, 이 점에서 국역 열하일기의 원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둘째, 북한의 국립출판사에서 출판된 리상호 선생 번역 『열하일기』 3책을 들 수 있다. 1955년 상권, 1956년 중권, 그리고 1957년 하권이 발간된 이 책은 최초의 열하일기 완역본이다. 열하일기가 완성된 지 175년, 연암이 서거한 뒤 150년이 지나서 열하일기가 우리말로 최초로 완역된 것이다. 이 책은 50년대 중반 북한의 학문적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번역의 걸작이다. 한문투의 번역이 아니라 가급적 우리 토박이말을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 책은 80년대 이후 북한에서 겨레고전문학선집에 뽑혀 재출간되면서 기왕의 오류를 ? 가지 정정했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두었고, 이를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2004년에 3책으로 그대로 간행하였다.
셋째, 연민 이가원 선생이 번역한 『국역 열하일기』를 꼽을 수 있다.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 2권으로 초판이 발행되었고, 1973년에 대양서적(大洋書籍)에서 세 권으로 출판되었으며, 이후 1977년과 1984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중판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되었다. 90년대를 전후하여 북한의 『열하일기』가 영인되어 학자들에게 배포되기 이전에는 이 연민 선생의 번역본이야말로 전문 학자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보급되었던 열하일기 번역본이었다. 북한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던 7, 80년대 우리 학계에서는 이 번역서가 최초의 번역서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연민 선생의 번역본은 풍부한 이본 비교를 거친 최초의 완역서이며, 열하일기의 목차를 새롭게 정리했으며, 교합본 원본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번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책이다. 특히 여러 필사본의 이본 대비를 토대로 번역은 번역대로 충실하게 하고, 동시에 여러 이본을 대비하여 원문을 수록했기 때문에 그 원문은 열하일기 교합본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연민교합본’이란 말은 이때 생겨난 말이다. 이런 호평과 번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민 선생의 번역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넷째, 윤재영(尹在瑛) 선생이 번역하여 1982년에서 1984년까지 박영사의 박영문고본으로 간행된 5책의 열하일기 완역본을 꼽을 수 있다. 문고본이라는 성격 때문인지 그동안 학술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존에 간행된 열하일기의 번역본을 참고하지 않고 번역자 자신이 독자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판단되는 이 문고본은 지금까지 출판된 어떤 열하일기보다 정확하게 번역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이 책 역시 전혀 오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의 오역을 되풀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완역해냈다는 것은 학술사적으로 중요한 성과이다.
이상의 번역서들은 한국 고전문학의 중요한 성과물이다. 첫째, 김성칠본은 오류가 적은 번역본이지만, 일기 전체의 3분의 1 정도의 분량만 번역이 되었다. 둘째, 리상호본은 열하일기 번역사의 기념비적 책이다. 많은 오역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완역을 했고, 한글 문체가 유려하다는 점이 장점이다. 이후 남한에서 번역된 열하일기는 대부분 이 책을 참고하거나 그대로 베꼈다. 셋째, 이가원본은 필사본 간의 교감을 거친 완역본이라는 명성이 있지만, 북한의 리상호본을 그대로 전재한 곳이 대단히 많다. 넷째, 윤재영본은 독자적 번역을 하면서도 기존의 오역을 비교적 많이 바로 잡았다. 학술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번역이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전고나 오역이 있다.
열하일기 번역본의 역사는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베끼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베끼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다지 난해한 문장이 아니어서 쉽게 번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번역을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있고,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기왕의 번역을 베끼는 경우가 있다. 두 경우 모두 표절의 혐의를 벗을 수는 없다.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을 베낀 경우는 단어 하나, 조사 하나를 공교롭게 바꾸는 경우가 많아 비교해도 명확하게 베꼈다라고 판단 내리기 어렵지만, 번역하기 까다로운 문장의 베끼기는 좀 사정이 다르다. 먼저 출판된 번역이 오역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번역도 그 오역과 꼭 같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경우이다. 정확한 번역은 우연히 서로 같을 수 있지만, 오역이 서로 같아진다는 것은 그대로 베끼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할 터이다. 이러한 경우는 기왕의 열하일기 번역본에 무수한 사례가 있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만 들어보겠다. 마지막에 고미숙본을 함께 비교하는 이유는 가장 근래에 나왔고, 또한 많은 주목을 받은 판본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황도기략’ 편의 「황금대기」의 일부이다.
원위(元魏: 남북조 시대의 북위) 때, 장군 이주조(爾朱兆)가 난을 일으키자 성양왕(城陽王) 원휘(元徽)가 금 백 근을 싸 가지고 낙양령(洛陽令)으로 있는 구조인(寇祖仁)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려고 했다. 구조인 집안에서 배출한 자사(刺史) 세 명 모두가 사실은 자신이 발탁해 주었으므로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인은 집안 식구들에게 ‘오늘 부귀가 절로 굴러들어 왔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원휘에게 “잡으러 온 장수가 곧 들이닥친다”고 겁을 주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라고 해 놓고는 길에서 장맞이하고 있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 머리를 이주조에게 보냈다. _ 돌베개본, 3권 294쪽 참조
위 인용문은 김혈조 선생이 번역한 것이다. 인용문 중 밑줄 친 부분에서 판본끼리의 차이가 있다. 그 부분을 고찰해 보면,
리상호본 - 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에 와춂 우리 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마는 저 ‘휘’ 때문에 걱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휘를 잡으러 오는 장수가 이를 때에 휘를 다른 장소로 도망하라고 꾀인 후 길에서 그를 맞아서 죽여 버린 후 그 머리를 조(兆)에게 보냈다.
이가원본 - 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 우리 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마는 저 휘 때문에 걱정이야.” 하고는, 휘를 잡으러 오는 장수가 장차 이를 것을 알고, 휘를 다른 장소로 도망하라고 꾀인 뒤, 길에서 그를 맞아서 죽여 버리고는 그 머리를 조(兆)에게로 보냈다.
고미숙본 - 구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우리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만 저 휘 때문에 정말 걱정이야” 하였다. 그래서 이주조가 잡으로 온다고 꾸며 휘를 도망치게 하고는, 길에서 그를 죽여 버렸다.
이 번역은 문맥이 서로 통하지 않는 명백한 오역이다. 제물을 들고 원휘가 제 발로 구조인의 집에 찾아 들어오자 집안 사람들에게 ‘돈이 저절로 집에 굴러들어 왔네’ 한 것이다. 해당 원문은 ‘今日富貴 至矣 乃怖徽云’이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다른 번역본에서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정기태 선생의 민족문화문고본에서는 “현재 우리집의 부귀가 지극하다. 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라고 번역했으며, 윤재영 선생은 “우리집의 부귀는 더할 수 없이 높아졌다. 이제 왕 휘는 필요치 않은 사람이다”라고 번역했다. 어떤 본을 그대로 베꼈다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역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서로 참고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관내정사’ 7월 27일 이야기다. 진자점(榛子店)의 기생집에서 유사사라는 이름의 기생에게 노래를 더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 기생이 눈을 흘기며 청한 사람에게 톡 쏘아 붙이는 대목이다. 여러 번역본에서 그 부분만을 인용해서 비교해 보겠다. _ 돌베개본, 1권 378쪽 참조
아오야기 고타로본 - 사사가 눈을 흘기며 말하기를, 나물 팝니까? 더 달라고 하게.
김성칠본 - 유사사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면서 ‘굳이 많이 해야 멋인가요.’
리상호본 - 유사사는 눈을 주면서 ‘술상을 들일까요’ 한다. 이것은 돈을 좀 벌겠다는 말이다.
이가원본 -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채소 사는지요, 투정하게(더 달라게).’
이마무라 요시오 본(今村與志雄; 1978년刊) -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말하기를 ‘요리를 주문할까요’
윤재영본 - 유사사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고 ‘변변치 못한 노래를 자꾸해서 뭘 합니까?’
고미숙본 -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술상을 청할까요?’ 매상을 올리려는 속셈이다.
원문 “絲絲流眼曰 賣菜乎 求益也”에 대한 번역인데, 이가원 선생의 번역이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위의 각 번역을 비교해 보면 리상호본과 고미숙본이 가장 비슷한 내용이다. 리상호와 고미숙 두 분의 번역은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역임에도 불구하고 우연하게도 전체적인 의미는 비슷하다. 결국 고미숙본은 리상호본에 윤색을 가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예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난해한 문장의 오역일수록 더욱 베낌의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인명과 전고 부분에 집중된다.
열하일기는 번역 원고만 해도 6천 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조선의 대문호인 연암 박지원의 글인데다 심오한 철학 이야기, 음악 이야기, 과학 이야기 등 어려운 내용의 글들이 상당수 있고 또한 당시 백화(白話)인 청나라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고전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에게도 결코 녹록치 않은 고전이다.
번역의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와 오역은 병가지상사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오역과 오류를 이후 작업을 통해 어떻게 바꾸고 발전시키느냐이다. 앞선 선본들은 학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후대 학자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귀중한 판본이다. 오늘날과 같이 각종 참고서 및 공구서, 혹은 컴퓨터를 활용하여 전고를 마음대로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번역물이 나온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들 선본의 오류는 후대의 번역자들이 마땅히 교감과 재번역의 과정을 통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번역본은 아쉽게도 그러한 발전 과정 없이 그대로 베끼기에만 힘을 기울였다.
오역과 오류의 유형별 사례
기존 번역서는 부지기수의 오역이 있으며, 그것이 오역인지도 모르면서 베껴온 경우가 많았다. 오역의 사례를 유형별로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원전의 문장이 어렵기 때문에 오역하거나 얼버무린 경우
‘산장잡기’ 「매화포기」의 앞부분에는 불꽃놀이의 불꽃 모양을 매화꽃에 비유하여 묘사한 대목이 있다. 이 부분은 송나라 사람 송백인(宋伯仁)이 편찬한 『매화희신보』의 글을 연암이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이를 옳게 번역한 본이 없다. 리상호본은 솔직하게 ‘두 줄은 뜻이 상세하지 않다’고 밝히고 이 부분을 아예 공?으로 두었으며, 그 외의 번역본은 대충 얼버무리고 있으나 무슨 말인지 전혀 의미 파악이 안 된다. _ 돌베개본, 2권 492쪽 참조
2) 연암의 문체적 특징을 모름으로써 저지른 오역, 혹은 상식에 어긋나는 오역
‘속재필담’의 한 부분에서 연암만의 문체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아들 여덟을 둔 중국인 비치에게 연암이 그 아들이 모두 한 어미가 낳은 것이냐고 묻자, 비치는 웃기만 하고 그의 동료인 배관이 옆에서 “작은 마누라 둘이 좌우를 모시지요. 나는 저 사람의 아들 팔형제가 부러운 것보다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그만이겠소”라고 말하여, 온 집안이 떠나갈 듯 웃었다(리상호본)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직접인용문의 해당 원문은 “吾不羨他八龍 慕渠一姦”이다. ‘慕渠一姦’(모거일간)은 직역하면 ‘한번 간통하는 것이 그립다’라는 말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리하여 역자들은 이를 순화하여 작은 마누라를 빌린다는 뜻으로 억지 해석을 했는데, 이 역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이야기 끝에 집이 떠나갈 듯 웃었다고 했는데, 마누라를 빌려달라고 한다면 주먹다짐을 할 일이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모든 번역은 ‘간통’ 아니면, ‘마누라 빌리기’로 번역했다. 리상호 선생이 이렇게 번역을 한 뒤로, 남한의 번역본은 대부분 이를 그대로 따랐다. 고미숙본은 “나는 저이의 여덟 아들은 부럽지 않고 그저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참 좋겠어요”라고 하여 리상호본에다 약간의 부사어를 첨가했으나 오역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번역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문을 파자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연암이 파자식의 희작으로 원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암체의 한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이 연암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전혀 번역을 할 수 없는 엉뚱한 문장으로 오해하게 된다. 여기 본문의 ‘姦’(간)은 한자의 본래 뜻 보다는 여자 셋이라는 파자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여덟 아들이 부러운 게 아니라, 한 남자가 세 여자를 거느렸다는 게 더 탐납니다”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 _ 돌베개본, 1권 176쪽 참조
3) 전고, 고사성어를 몰라 생긴 오역
‘망양록’에는 곤륜비슬(崑崙琵瑟)이라는 고사성어를 사용한 문장이 있다. 이는 단선본(段善本)이라는 선사(禪師)와 강곤륜(姜崑崙)이라는 악사 사이에 있던 고사로, 웬만한 고사성어 책에 나와 있는 것이다. 기존의 번역본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몰라 아주 엉뚱한 번역을 했는데, 이후의 번역본은 모두 이를 그대로 답습했다. “선사인 단선본이 강곤륜에게 십 년 동안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여”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단사(段師)가 강(康)을 곤륜(崑崙)으로 보내어 십 년을 두고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여”라는 식으로 오역하였다. _ 돌베개본, 2권 352쪽 참조
또 ‘피서록’에 보면 유득공의 한시를 인용한 구절에 남시(南施)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남시북송(南施北宋)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 당대의 대표적 시인을 뜻하는 말이다. 청나라 시절 남쪽에는 시윤장(施閏章), 북쪽에는 송완(宋琬)이라는 시인이 이름을 떨쳤으므로 남시북송이라는 말이 생겼고, 당대에 남북을 대표하는 유명 시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기존의 번역은 ‘남시’를 전혀 엉뚱한 의미로 번역했는데, 심지어는 ‘남쪽의 서시(西施)라는 여인’이라고 엉뚱하게 오역하기도 했다. _ 돌베개본, 3권 66쪽 참조
4) 지명, 인명 등 교유명사를 몰라서 생긴 오역
일반 단어나 표현을 인명, 지명의 고유명사로 번역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인명이나 지명의 고유명사를 일반 문장으로 번역하는 오역이 있다. 그리고 인명으로 짐작은 하면서도 구체적인 인적사항을 몰라서 얼버무린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오역이다. 이런 오류는 부지기수이다.
‘황교문답’에 서역(티베트) 지방에 다녀왔던 명나라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한 곳이 있다. 제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앞 시대인 명나라 때부터, 양삼보(楊三寶)와 승려 지광(智光), 우리 고향의 하객(霞客) 등 여러 사람이 서역의 여러 불교 국가를 여행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번역한 각 판본을 비교해 보면,
리상호본 - 명나라 시대의 양삼보와 중 지광 오향(吾鄕) 하객 등 여러 사람이 서역의 여러 불교 나라들을 두루 다녔습니다.
이가원본 - 명의 양삼보와 중 지광ㆍ오향ㆍ하객 등 여러 사람들은 서역의 여러 불교국을 두루 다닌 일이 있었는데
윤재영본 - 전조(前朝) 명나라 때 양삼보와 중 지광 오향 하객 등 여러 사람이 서역의 여러 불교 나라들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고미숙본 - 명나라 시절, 양삼보와 여러 고승들이 서역의 불교국을 두루 편력한 일이 있었지요.
여기 오향(吾鄕)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하객(霞客)은 이 문장의 화자(話者)인 학지정과 같은 고향 출신인 서홍조쟀 호인데, 『서하객유기』라는 유명한 기행문을 남긴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른 기존의 번역자는 오향을 사람 이름으로 오역하였으며, 이후 모든 번역본은 리상호본을 그대로 베끼거나 얼버무려서 오역을 답습하였으며, 양삼보 지광 하객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주석도 전혀 달지 않았다. _ 돌베개본, 2권 173쪽 참조
‘망양록’ 편에 “수나라 개황(開皇) 초에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졌을 때, 악공 만보상(萬寶常)은 그 음악이 음란하고 거칠며 슬퍼서 오래지 않아 천하가 끝장날 것이라고 논평했답니다”(隋開皇初 新樂旣成 萬寶常 以爲淫견而哀 天下 不久盡矣)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 만보상(萬寶常)은 수나라 시대의 음악가 이름이다. 이에 대해서 최초의 완역본이라 할 수 있는 아오야기 고타로는 ‘만보’라는 것을 새로운 곡의 이름으로 보았다. 리상호 선생은 “개황 초년에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란 음악이 나오자”라고 번역하여 만보라는 음악의 이름으로 파악했고, 이가원 선생 역시 “개황 초년에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라는 것이 나오자”라고 번역하여 역시 새로운 곡의 이름으로 이해했다. 윤재영 선생 역시 “개황 초에 만보(萬寶)라는 새 악곡이 이루어지자”라고 하여 악곡의 명칭으로 번역하였다. 임정기 선생 역시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라는 것이 나오자”라고 하여 음악의 이름으로 파악하였다. _ 돌베개본, 2권 300쪽 참조
5) 역사 사실을 몰라서 오역하거나, 아주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경우
역사의 구체적 사실을 몰라서 얼버무리거나 오역을 한 경우도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송나라 임금이 거란에 포로로 잡혀 북경에 온 상식 수준의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임금 내외가 유람하려고 북경에 온 것으로 번역한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리상호본 - 송나라 휘종이 북방으로 갈 때에 정 황후와 함께 연수사에서 묵었다.
고미숙본 - 송 휘종이 북으로 순행할 적에 정황후와 함께 연수사에서 묵었다.
위 문장은 ‘황도기략’ 「유리창」의 첫 단락이다. 제대로 번역하면, “유리창은 정양문 밖의 남쪽 성 아래에서 가로로 선무문 밖에까지 뻗어 있다. 이곳은 연수사(延壽寺)의 옛터이다. 송나라 휘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서 북쪽으로 수레를 타고 갈 때 정 황후(鄭皇后)와 함께 여기 연수사에서 묵었다고 한다”라고 되어야 한다. _ 돌베개본, 3권 312쪽 참조
이외에 송나라의 수도를 북경이라고 말한 것 등은 사소한 실수인 것 같지만, 사실은 중국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남의 번역을 베낀 데서 나온 결과이다.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이 책의 역자 김혈조 선생은 연암 산문문학 연구에 일생을 매진한 전문 학자이다. 자신의 연구과제가 늘 연암 박지원의 산문문학이었기에, 책을 내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늘 열하일기는 그에게 있어 연구의 대상이었고, 고심처이기도 했다. 2007년 이전에 이미 열하일기는 대략 번역해 두었으나, 완역을 위해 옛 원고를 다듬고 번역하지 못한 부분을 번역하는 등 2007년 8월부터 2008년 7월까지 약 1년간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매진했다. 이 기간 동안 역자는 연구년 교수로서 중국 산동대학에 체류했는데, 꼬박 1년을 열하일기 번역에만 매달렸다.
그동안 풀지 못하고 여러 학자들이 미상(未詳)으로 남겨둔 부분을 모두 풀어냈다고 자부할 만큼 이 책은 번역의 성과에 있어서 그간의 판본을 뛰어넘는다. 고전에 익숙지 않은 세대까지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관련 주석을 실었다. 또한 연암이 다녔던 장소를 직접 답사하며 글의 진위를 확인하고, 아울러 사진 촬영을 하여 이 책의 현장감을 높이는 주요 도판으로 넣음으로써, 이에 감히 ‘결정판’이라 불릴 만한 열하일기를 출간하게 되었다.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의 특징과 장점을 열거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오역 없는 번역, 정확한 번역을 기했다.
반복되어 온 오역과 오류를 모두 바로잡았다. 또한 기존 번역서에서 미상(未詳)으로 표시하고 번역문 없이 넘어갔던 부분들은, 연암 스스로 공란으로 비워둔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그 전고를 찾아 번역하였고, 청나라 때의 남겨진 자료를 찾아 대조하여 오역으로 남은 인명 지명 등을 바로잡았다.
둘째, 열하일기 원문 텍스트의 오류를 바로잡아서 번역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탈고한 당시에 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근대까지도 필사본으로 전해지다 보니 수많은 필사 이본들이 생겨났고, 오탈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올바른 번역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때문에 역자는 다음의 과정을 거쳐 열하일기 원문 텍스트를 바로잡았다.
1) 박영철본을 텍스트로 하되, 필사본 간의 대조 작업을 거쳐서 번역했다.
2) 연암이 인용한 중국 측 원전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3) 텍스트 자체의 오자 탈자를 바로잡아서 번역하고, 이를 표시했다.
4) 인명, 지명 등과 같은 고유명사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5) 역사 사실, 유물, 유적 등에 대한 원전의 오류는 고증하여 밝혔다.
셋째, 그동안 밝히지 못한 고사성어, 전고 등을 모두 찾아서 해설했다.
그동안의 오역 중 상당 부분은 어려운 전고나 고사성어를 알지 못해서 나온 것인데, 이번 열하일기에서는 모든 전고와 고사성어를 밝혀서 번역하였다.
넷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재적소에 관련 도판을 넣었다.
이 책의 출간을 위해 역자는 직접 연행의 전 코스를 답사하며 관련된 곳들을 촬영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도판만 해도 500컷이 넘고, 실제로 촬영해 온 분량은 그 이상이다. 또한 글의 이해를 돕거나 원전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가지 지도와 도표를 제시했는데, 특히 연암이 다닌 북경성 내부의 경우는 관련 지도를 나란히 놓아서 연암이 설명하는 장소는 물론 연암이 잘못 설명한 곳까지도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섯째, 한글세대와 전공자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 되도록 번역하였다.
일반 독자를 위해 어려운 용어나 전고를 쉬운 말로 풀이하여 번역했으며, 가능한 주석을 많이 달아서 이해를 도왔다. 또한 인명이나 지명, 책 이름 등 고유명사의 경우 상세한 주석을 달아서 이해를 도왔다.
전공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해하기 어려운 원전 문맥의 경우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주석을 달았으며, 관련된 연호는 연도를 병기했다. 또한 출전을 상세히 밝히고, 한자를 병기했다. (yes24참조) ...
-드림모노로그/ 2011-12-16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5765802
“매양 말고삐를 잡고 안장에 앉은 채 졸아가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풀어냈다. 무려 수십만 마디의 말이 가슴속에 문자로 쓰지 못하는 글자를 쓰고, 허공에는 소리가 없는 문장을 썻으니, 매일 여러 권이나 되었다. 라는 고백처럼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열의로서 집필된 책이다.
[열하일기]는 중국기행문으로서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연암 박지원도 가게 되었는데 이 때까지 연암은 이렇다할 벼슬을 하지 않은 상태이다. 삼종형 금성위 박명원에게 부탁하여 사절단에 오르게 된 연암은 말 등에 앉아 중국의 모든 것을 관찰하여 기록하였는데 열하일기를 가지고 조선에 오자 열하일기는 사대부들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비난의 이유는 여러 가지 였는데 열하일기가 비난의 대상이 되자 정조에게 까지 불려가게 되지만 정조의 뜻에 의해 서민들도 읽기 쉽게 한글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게 되는데 이유는 열하일기 안에 당시 사회 제도와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정약용 같은 일부 지식층에게도 비난을 받는다.)
읽는 동안 나 역시 실학파였던 연암 박지원에 대한 몇가지의 오해를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박제가가 북학의를 저술할 때 한 말 때문이다. 박제가는 청나라에 박지원보다 먼저 다녀왔는데 그 중에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언문을 쓰지 말고 모든 백성이 청나라 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실학파들이 지나치게 청에 치우쳐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나는 한가지로 많은 것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바로 그런 오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박제가의 지나친 격정의 말을 실학파 모두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열하일기 안에서 만나는 연암 박지원의 생각들은 무척 사리에 밝고 생각이 깊으며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져 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었다.
열하일기를 번역한 김혈조는 책의 앞머리에 열하일기를 읽는 방법을 알아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열하일기에는 연암 박지원의 진정성, 책을 집필한 진정한 의도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꼭 참고해야할 것 같다.
첫째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의 제공이다.
두 번째가 선진 문화 문물을 본받아야 한다는 북학의 내용이다.
세 번째가 천하대세를 어떻게 전망했는가? 하는 주제이다.
네 번째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묘사와 인물의 창조이다.
다섯 번째가 선비 곧 지식인의 역할과 처신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선비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 있다.”
역사는 현재의 미래라는 말처럼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해 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위의 다섯가지의 주제로 들여다본 열하일기의 가치는 열하일기를 세계유수의 고전 반열에 편입시켜야 하는 주장이 타당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1권 책의 시작은 압록강을 출발하여 요양에 이르는 <도강록>부터 시작하는데 중간중간 연암의 재치있는 언변에 웃음이 나기도 하며 넓디 넓은 요동 벌판을 마주하며 한바탕 통곡하기 좋겠다는 대목에서 연암의 깊은 생각을 알 수 있다. 심양의 이모저모를 살핀 <성경잡지>와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일신수필>에서는 청나라의 풍물과 체험을 , <막북행정록>에서는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동안의 체험담이 쓰여져 있다.
2권은 열하에 도착하여 배정된 숙소 태학관에 머물면서 청나라 고관과 과시 준비생 및 학자들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실은 <태학유관록>으로 시작되는데 천체,음률,라마교등의 이야기들은 조선인인 연암에게는 생소할 터인데도 전혀 밀리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의 학자들이 연암에게 감탄하는 대목에서는 독자인 나도 왠지 뿌듯해 지는 기분이었다. 태학유관록에 실린 이야기들은 뒤에 나오는 <곡정필담><망양록><황교문답><반선시말><찰십륜포>에서 본격적으로 내용이 세분화되어 다루어진다
2권의 주된 내용은 중국의 지식층들과의 필담을 통하여 천하의 정세를 살피는 한편 조선에서는 청이 중국을 지배한지 백년이 흐르고 있음에도 아직도 친명배청이라는 사상을 버리지 못한채 청을 미개하게 만 보는 조선의 지식층을 바라보며 한탄하는 내용이 지배적이다. 명나라의 지식층들이 자신들이 멸시하던 만주족의 지배를 받으며 고뇌하는 모습을 통하여 조선선비들이 조금이라도 무식과 무지함을 벗어나길 바라는 연암의 소망 또한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무지함에서 비롯됨을 개탄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마도 연암은 조선에서 실학파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들이 무척이나 사무친 듯 보였다. 슬프다 ! 하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거 보니 ........
3권은 북경에서 연암이 보고 들은 것과 경험한 것들을 모아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박물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환희기>에서는 요술을 부리는 것이 신기하여 요술놀이를 구경하지 못한 조선사람들이 글을 읽어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았는데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연암의 글은 관찰자시점에서 쓴 글들이 많은데 무척이나 세세하게 기록하려고 한 것을 보며 연암이 열하일기를 통하여 조선선비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취지를 엿볼 수 있다. <피서록>은 열하 피서산장 밖 태학관 회나무 아래의의자에 앉아 더위를 식히면서 쓴 시화인데 수록된 시화를 통해 연암의 비평의식을 볼 수 있다.
2권까지는 긴 여정을 그린 여행기이지만 3권은 주로 이야기들이 많다. 신기하고 진기한 물건들을 보면 자세하고도 세세하게 설명하려 애쓴 흔적이 보이고 지식인으로서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삶에 교훈이 될 내용들을 통하여 통찰하길 바라며 중국과의 교류가 중요한 이유와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지만 독설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해학적인 필체로 표현하고 있다. 열하일기의 기본 사상은 이용후생으로서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글을 통하여 백성들의 삶을 좀 더 편하고 부유하게 되길 바랐으나 사실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열하일기를 통해 정조는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젋고 유능한 실학파들을 등용하려고 하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열하일기를 읽으면 연암의 학문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데 실로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많은 공부를 하였던 연암이 일찍 학문에 눈을 뜨며 속물적인 사회를 혐오하게 되어 연암협에 의지하여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음에도 출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마도 열하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문장력, 사실적인 묘사는 아마도 그 시대의 문인들에게는 분명 충격이었을 것이라 어림짐작해본다. 사대부들이 자신의 자리에 위기를 느끼게 된 이유 또한 그와 같지 않을까 한다. 그처럼 열하일기는 민족과 세계의 고전에 값하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또한 과거 한 시대를 살아간 선인의 자취에서 현재의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되는 기쁨과 더불어 연암 박지원의 진정을 되새기며 이런 책을 저술한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열하일기는 이백년이 흘렀음에도 연암의 정신은 유장하게 깨어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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