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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금동원(琴東媛) 2016. 9. 25. 21:24

  경주 월정교(月精橋)는 남·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 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樓閣) 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월정교는 우리나라 최초로 석교위에 목조 회랑으로 연결한 누교이다. 최전성기인 경덕왕(760년)에 축조 되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를 토대로 원형 복원 중인 월정교는 완공까지 50%정도(내년 12월 준공 예정) 진행되었다고 한다. 막대한 공사비(235억 규모)를 들여 복원 중인 이 곳이 완공되면 경주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원효(元曉, 617~686

  원효(元曉, 617~686)대사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씨, 법명은 원효, 법호는화쟁(和諍),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신라 진평왕 39년 압랑군 불지촌(현재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설총의 아버지이다.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십년 후에 두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도중 하루 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이 나 토굴 속에서 고여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大悟)한 원효대사는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되돌아왔다.

  대오한 후 원효대사는 미친사람이나 거지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薛聰)을 낳았고 그 후 파계(破戒)하였다. 파계한 후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원래 본성인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자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모두가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나다는 화쟁사상(和諍思想),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金鋼三昧經)』을 강의하였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찬술하였다. 분황사(芬黃寺)에서 『화엄경(華嚴經)』,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蔬)>』를 지었다.

  원효대사는 신라 신문왕 6년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월정교(月精橋)

  원효대사가 어느 날 거리를 누비며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나에게 주지 않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수허몰가부아작지천주 (誰許沒柯釜我斫支天柱)라며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는데 태종 무열왕이 그 노래의 의미를 알고 말했다. '아마도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위대한 인물이 있으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그 당시 요석궁에는 요석 공주가 있었는데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대사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원효대사는 궁리를 보자 일부러 월정교에서 떨어져 옷을 적시었다. 궁리는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안내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 곳에서 원효대사가 머물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는 사랑을 하였고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분인 설총을 나았다. (월정교 앞 안내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