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문화의 종자' 배고파도 지켜야 해요"
한겨레 입력 2016.10.18. 18:56 수정 2016.10.18. 22:16
[한겨레] [짬] ‘책표지화’ 전시 연 삼성출판박물관 김종규 관장
<책이 된 예술, 예술이 된 책-우리 책의 표지화와 삽화>. 서울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관장 김종규)이 새달 말까지 여는 특별전시회 제목이다. 김환기·이응노·천경자 등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표지화나 삽화로 실린 책, 잡지 117권을 볼 수 있다. 김환기는 궁핍했던 파리 체류시절, 서울의 어머니와 세 딸 생활비를 대고자 <현대문학>의 표지화를 그렸다. 그림 수요자가 희귀했던 시절, 그나마 책과 잡지가 있어 화가들의 생활고가 해결된 것이다.
지난 14일 박물관에서 김종규(77) 관장을 만났다.
‘우리 책의 표지화와 삽화’ 특별전
현대 한국대표 화가들 작품 117권
“첫인상처럼 장정 좋으면 책에 관심”
64년 친형의 삼성출판사 지사 맡아
보수동 헌책방 순례…“죽을 때까지”
“책 만들 때 먼훗날 평가 생각하길”
일제말 문예지 <문장>은 소설가 이태준, 시인 정지용, 화가 김용준·길진섭의 공동 창작공간이었다. 잡지의 장정에서부터 출판물 기획까지 함께 의견을 나눴다. 정지용 시집 <백록담>(1941·길진섭 장정), 이태준 소설집 <돌다리>(1943·김용준 장정) 등은 이런 우정의 산물이었다. 구보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1947) 장정은 작가의 동생인 문원이 맡았다. 아우는 속표지에서 멋스럽게 천변 군상들을 그렸다.
올해 26돌을 맞은 삼성출판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인쇄·출판 전문 박물관이다. 국보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등 국가지정문화재 10여점을 포함해 고문서 등 10만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모두 김 관장이 발품을 팔아 모았다.
“형님(김봉규)이 51년 목포에서 서점을 창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삼성출판사를 만들었어요. 부산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던 64년부터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돌아다녔죠. 고서값이 비싸지 않았어요. 피난 온 지식인들이 책을 많이 팔았거든요. ‘새책 팔아 헌책 산다’고 형님한테 야단도 많이 들었죠.”
그는 삼성출판사의 부산지사에서 출판일을 시작해 92년엔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우리는 금속활자 최초 발명국 아닙니까. 고서를 모으면서부터 박물관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의 헌책방 순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죽어야 끝날 겁니다.”
이번 전시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박서보 화가가 장정한 이어령 평론집 <저항의 문학>(1959)이다. “표지가 파격적이었죠. 표지의 빨간색이 피를 의미한다는 걸 뒤에 들었어요.” 화가 장욱진이 장인 이병도의 책 <두계잡필>을 위해 그린 표지화도 각별하다. 김 관장은 ‘걸레’ 중광 스님의 소개로 장 화백과 연을 맺었다. “장 화백의 부인이 걸레를 무척 싫어하셨죠. 미쳐 술먹고 돌아다닌다고요.”
그는 책 장정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장정은 사람으로치면 첫인상이죠. 장정이 좋으면 책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출판사 대표시절 장정을 직접 챙겼던 일화도 들려줬다. “90년대 백남준 책을 출판할 때 우리 편집부와 상의 않고 북디자인 전문회사인 정병규 디자인실에 직접 장정을 맡겼죠. 저자가 무척 마음에 들어하더군요.”
그에게 책은 문화유산이다. “책은 몇백년 내려갑니다. 출판사와 저자가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입니다. ‘먼훗날 당신들이 낸 책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게 바로 이번 전시회의 메시지입니다.”
그에겐 문화계의 풍류객 혹은 마당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많을 때는 하루 7차례나 전시회 축사를 했죠.” 문화계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그의 진가가 제대로 빛을 발한 곳이 있다. 국민과 기업 기부금으로 우리 문화재 보존에 힘쓰고 있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이다. 그는 6년째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09년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국민신탁) 회원이 200명인데 천명만 만들어달라며 이사장을 맡겼어요. 국가 예산을 지원받는 단체여서 회원수가 중요했지요.” 그의 취임 1년도 안돼 회원 1천명을 넘었고 올해는 1만명을 돌파했다. 목표는 10만명이다.
회원 수가 왜 중요할까? “회원이 돼야 관심을 갖고, 그러면 보입니다. 회원들이 그래요. 이젠 큰 당산나무나 비석 하나도 달리 보인다고요.” 그는 문화유산을 종자에 비유했다. “조상들은 굶어도 종자는 단지에 보관했지요. 배고파도 지켜야합니다.”
그는 2009·2010년 잇따라 저자 친필 서명본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배우 김혜자·시인 고은·백낙청 교수·도올 김용옥 등 저명 인사들이 정성껏 저서에 ‘김종규’란 이름을 썼다. 그의 인맥의 깊고 넓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좋은 사람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이익을 생각하면 섭섭한 게 많습니다. 주는 것에서 끝나야죠.” ‘사람 사귐에서 이익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라.’ 그의 처세 제1 원칙이다.
그는 매월 초하루 40여명의 ‘젊은이들’이 만나는 월단회의 종장이기도 하다. “4·19로 민주화된 뒤 태어난 사람들이 모이죠. 이어령·임권택·박정자 선생 등이 멘토로 참여합니다. 인문학도 배우고 여행도 합니다.”
지난해 박물관 25돌 기념사업의 하나로 제작중인 화첩 <군현화집>엔 오승우·김병종·방혜자·임옥상·석철주·박재동 등 화가 40여명의 작품이 실린다. 화가들이 화첩을 돌려가며 그에게 헌정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화첩이 완성되면 박물관에 전시도 하고 화가들을 모두 모아 파티를 열려고 합니다. 서로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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