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에서
금동원
경남 하동에서 있었던 [2017 토지문학제]행사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구례 화엄사에 들렀다.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천 년 고찰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로 기억된다. 생물학과 학생이었던 나는 열혈 지도교수님의 방학과제인 현장채집과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친구들과 전국으로 채집여행을 떠났다. 생기발랄하고 불타는(?) 의욕에 넘쳐있던 나와 여섯 명의 같은 과 친구들은 계룡산의 갑사와 덕유산 무주구천동 백련사를 거쳐, 마지막 여정지인 지리산화엄사로 발길을 돌렸다.
화엄사 바로 아래 계곡이 흐르는 민박집에 숙소를 정하고, 우리는 곧장 지리산 노고단으로 향했다. 칠월의 뜨거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싱그러운 바람과 숲길이 만들어주는 깊은 그늘 덕분에 더운 줄도 몰랐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산길을 타고 올라 노고단 정상을 정복했다는 감격도 잠시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민박집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집을 나설 때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당부하시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학생들, 산에서는 해가 빨리져요, 환하다고 꾸물거리며 놀지 말고 서둘러 산 밑으로 내려와야 해요." 자칫 날이 어두워지면 산이 깊어 길을 잃기 쉬우니 올라가다가 힘들면 그냥 되돌아 내려오라고 등산 진입로 입구까지 따라나서며 당부를 하셨다.
그 날 우리는 겁날 게(?) 없는 일곱 명의 여학생이었다. 애정이 담긴 걱정의 말씀은 귓등으로 흘리면서 "네, 알겠습니다. 다녀올께요." 합창을 하다시피 소리치며 기세 좋게 산을 향해 출발했다.일곱 명 여학생들의 재잘거림과 꽃망울 터지듯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지금 떠올려 봐도 가슴 벅차고 울컥 그리움이 복받치는 젊음과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함정은 거기에 있었다. 산행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주의사항도 숙지하지 않은 채, 가벼운 옷차림으로 노고단을 향해 돌진했으니 그 무모하고 당돌한 청춘이라니...
하산 하는 길 중턱을 지나면서 급격히 날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뒤늦게 정신이 바짝 들어 내려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미 올라갈 때 체력을 다 써버려 기진맥진했던 우리는 금방 지치기 시작했다.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산길은 점점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친구 한 명이 발을 접질러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두렵고 불안해졌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길눈이 밝은 두 명은 앞장서서 길을 따라 내려갔다. 뒤에 남은 우리들은 다친 친구를 부축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어두운 산길을 천천히 하산했다. 노래를 불러가며, 일부러 수다를 떨며 헛웃음을 흘렸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 생각해보라~~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아찔함은 지금 생각해도 생생하다.
지리산 계곡 밑 민박집은 민박집대로 난리가 나 있었다. 서울에서 온 여대생 일곱 명이 아침 일찍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갔는데, 날이 어두워져도 내려오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큰 사단이 난 것 같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파출소에 연락을 하고 우리를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다. 마침 선발대로 출발했던 두 명이 먼저 도착하면서 우리들의 소동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났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빨치산이 숨어들 만큼 깊어 길을 잃으면 조난당하기는 식은 죽 먹기인 산이 아닌가.
그 때 우리들이 실제 조난을 당했다면 어쩔 뻔 했을까. 산에서 늑대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는데... 지리산 호랑이는 또 어떻고... 허연 수염과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날아다닌다는 산신령과 신출귀몰하다는 산도적은 어떻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운이 좋은 날이었던가.
한 손에 잡힐 듯 수려하고 가깝던 지리산이었다. 노고단의 장엄하고 경이로운 풍광은 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나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채집여행이었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배낭 안에 동식물 도감과 채집을 위한 도구들을 짊어지고도 힘든 줄을 몰랐던 뜨거운 시절이었다.
그리운 시절이다. 그러나 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이다. 나도 변했고, 지리산과 화엄사도 변했다. 그러나 아름답고 순수했던 마음만은 변함없이 그 시절 그대로 남아 살아있는 추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수원 시인, 손경형 소설가, 백덕순 시인과 함께 (필자 왼쪽 두번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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