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
-츠베탕 토도로프 저/류재화 역 | 아모르문디
계몽주의의 빛과 그늘을 탐색한 ‘사상가’ 고야
이성으로 폭력을 통제할 수 있을까? 무력으로 선(善)을 강요할 수 있는가?
프랑스 혁명의 결과 유럽 전역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스페인에서는 1808년에서 1813년까지 나라를 점령했던 나폴레옹 군이 통치의 수단으로 계몽주의를 이용했다. 프랑스 점령군과 스페인 민중의 극렬한 대치 속에 살인과 강간, 고문과 광기가 양 진영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계몽주의 사상을 지지하던 스페인의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모순에 빠져 괴로워했다.
이러한 혼란을 탁월하게 증언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마드리드의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한 화가 고야였다. 고야는 계몽주의가 그늘 속에 모호하게 내버려 둔 모든 것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1793년부터 1828년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계속된 탐색을 통해 그는 의지와 이성만큼이나 인간의 삶을 조종하여 폭력과 광기에 이르게 하는 어두운 힘을 발견했다.
고야가 밝혀 보이는 것들은 우리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의 새로운 무질서를 염려하는 냉철한 관찰자 츠베탕 토도로프는 이 책에서 천재 예술가 고야의 강력한 ‘사상’을 조명한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함께 42점의 흑백 도판과 24점의 컬러 도판을 실었다.
○저자소개
1939년 불가리아 소피아 태생으로 소피아대학에서 슬라브 철학을 전공했다. 1963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이후 프랑스 국립과학원(CNRS)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명예수석연구원으로 있다. 초기에는 주로 롤랑 바르트를 잇는 구조주의 문예비평가로 활동했고, 중기에는 관심 영역을 철학 ? 사상 ? 역사 ? 사회학으로까지 넓혔으며, 특히 1990년대 말부터는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실참여 성격의 저술들을 다수 발표함으로써 『휴머니즘의 사도』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국내 주요 번역서로 『러시아 형식주의』(1965; 1988), 『환상문학 서설』1970; 2013), 『산문의 시학』(1971; 2003), 『기호학 사전』(공저)(1972; 1990), 『상징 이론』(1977; 1995), 『상징과 해석』(1978; 1987), 『담론의 장르』(1978; 2004), 『바흐친 문학사회학과 대화이론』(1981; 1988), 『비평의 비평』(1984; 1999), 『덧없는 행복』(1985; 1996), 『일상 예찬』(1993; 2003), 『개인의 탄생』(2005; 2006), 『민주주의 내부의 적』(2012; 2012)이 있다.
국내 번역되지 않은 근래 주요 저서로, 『우리와 타인들』(1989), 『실향민』(1996), 『뱅자맹 콩스탕: 민주주의의 열정』(1997), 『악의 기억과 선의 유혹』 (2000), 『세계의 새로운 혼란』 (2003), 『기억의 남용』(2006), 『위기의 문학』(2007), 『전체주의의 경험: 인간의 낙인』 (2010), 『비굴복자들』(2015) 등이 있다
○역자: 류재화 (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울 거쳐 파리 누벨 소르본 대학에서 파스칼 키냐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문, 예술, 문화 등에 걸쳐 다양한 책을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는 레비스트로스의 『보다 듣다 읽다』 『오늘날의 토테미즘』 『달의 이면』, 다니엘 아라스의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 『세상의 모든 아침』,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 부인』 등이 있다.
○목차
1. 고야, 사상가
2. 고야, 입문하다
3. 예술 이론
4. 병과 그 영향
5. 치료와 재발, 그리고 알바 공작부인
6. 가면, 캐리커처 그리고 마녀
7. ‘변덕들’의 해석
8.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9. 나폴레옹의 침략
10. 전쟁의 참화들
11. 살인, 강간, 산적, 군인
12. 평화의 참화들
13. 희망을 갖다, 경계심을 품다
14. 두 가지 길
15. 두 번째 병, 검은 그림, 광기
16. 새로운 출발
17. 고야의 유산
○책 속으로
고야는 계몽주의 사상이 침략과 억압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폭력을 막기에는 충분치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계몽주의 사상의 이름으로 나폴레옹 군대는 폭력을 자행했다. 고야가 사회악에 대한 치료제라고 믿었던 것은 효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더 피해를 입혔다. 이성의 잠만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각성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한층 더 회의적이 된 고야가 특정한 이념에 찬동한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꺼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160쪽
고야는 왜 『전쟁의 참화들』을 제작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한 듯싶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겪고 보았기에 그는 귀중한 증인이 되었다.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살아 돌아왔을 때 인간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자신들이 아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것처럼, 그도 비탄의 외침을 내뱉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것이 모든 희생자들과 연대하고 살인에 살인으로 답하지 않아도 됨을 보여 주는 그의 방식이었다. - 185쪽
그는 자기의 일 자체에서 존엄성을 찾았다.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데 온전히 바친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60년 가까이 이어져 벽화와 회화, 판화, 석판화, 데생의 형태로 2천 점 가까이 전해지는 엄청난 수의 작품에 우리는 그저 놀랄 뿐이다. 화가가 여든 살일 때 그려진 “나는 늘 배운다”라는 설명이 붙은 데생은, 여기서 선언의 가치를 갖는다. 이 상징적인 자화상은 창작자의 고집뿐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길에 대한 그의 신념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그 무엇도 그를 그 길에서 멀어지게 할 수 없었다. - 310쪽
○출판사 리뷰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는 올해 2월 타계한 세계적 석학 츠베탕 토도로프의 역저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중점적으로 조명하였다. 익히 알려진 초상화나 종교화를 그린 궁정화가로서의 모습보다는, 나폴레옹 침략과 스페인 독립전쟁 시기 계몽주의 사상의 빛과 그늘을 수많은 데생을 통해 고발한 증언자이자 철학자로서의 고야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고야는 자신의 내적 필요에 따라 그리고 자기가 보는 그대로를 표현한 예술가였으며, 인간의 이성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과 광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깊게 성찰한 사상가였다. 이 책은 고야의 삶의 궤적과 더불어 이 특별한 화가가 이루어낸 예술적 혁신을 살펴보고, 계몽주의를 중심으로 인간 정신의 적나라한 모순을 파헤치고 있다.
고야, 우리 자신의 악마들을 불러내다
18세기 말, 고야의 조국 스페인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프랑스 혁명 직후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계몽주의는 스페인의 지배층과 엘리트들 사이에서 큰 공명을 일으켰고, 이 “깨인 자(계몽된 자)”들과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은 점점 더 심화되었다. 이 무렵 고야는 큰 병을 앓고 난 후 청각을 상실했으며, 알바 공작부인과의 연애에서 실연을 맛보았다. 그 결과 그는 커다란 예술적 변화를 겪게 되는데, 객관적 세계 속에 주관적 시선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자신만의 상상을 탐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상의 세계는 마녀와 주술사, 유령, 악마 그리고 때로는 가면과 캐리커처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그는 위험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온다는 것을, 가장 큰 수수께끼는 우리 각자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악마들을 불러내고자 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마녀를 믿는 민중의 미신과 반계몽주의를 타도하고자 하였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야의 계획은 계몽주의자들을 만난다. 그는 인간 정신 속에 살고 있는 환상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내기를 원했으며, “이성의 빛의 부족으로 어둡고 혼탁해지거나 과도한 정념으로 손상된 인간 정신 속에서만 존재해 왔던 형태와 태도들을 눈에 보이게” 가시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시에 고야는 미신과 환상, 정념이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며 계몽주의의 진척이 인간을 모든 정념에서 해방시켰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상상적인 것은 실제적인 것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었다.
『변덕들』
1799년 출간된 판화집 『변덕들』은 이러한 고야의 예술관을 잘 드러내주는 80점의 판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판화들은 주제 면에서 크게 사회적 풍자, 성적인 우스개와 남녀 관계, 미신과 마녀 및 유령을 다루었다. 이 작품들은 당대의 세태를 풍자함과 동시에, 작가뿐 아니라 관람자들의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였다. 무질서와 혼란, 사육제로 가득 찬 이 판화집은 오늘날 통용되는 해석처럼 단순히 계몽주의자들의 강령과 일치하는 미신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비판과 인간 내면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드러내는 요소들이 매순간 서로 침투한다. 고야의 구상은 미신과 환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제어하는 것이었다. 고야는 건강과 병, 이성과 광기, 낮과 밤, 빛과 어둠처럼 명확한 대립을 이루는 범주들의 상호 침투와 불가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변덕들』에서는 철저한 이원성이 감지된다. 고야에게 이성과 비이성은 인간의 특성이며 똑같은 지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계몽주의의 이상에 공감하였으되, 자신의 ‘깨인’ 친구들과 달리 계몽주의가 공포와 야만으로 치달을 수 있음 또한 예감하였다.
『전쟁의 참화들』 그리고 계몽주의
복잡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 스페인은 1808년부터 1813년까지 나폴레옹 군의 지배를 받는다. 점령자들이 내세운 사상적 무기는 바로 계몽주의였다. 이 ‘빛’의 사상으로 무장한 최초의 근대적 군대인 나폴레옹 군은 역시 최초의 조직적 저항군인 게릴라, 스페인 민중의 극렬한 무장 반격에 맞닥뜨린다. 시간이 갈수록 양쪽의 폭력은 극심해졌고, 한쪽에서 공격이 있을 때마다 보복과 더 잔혹한 공격이 이어졌다. 판화집 『전쟁의 참화들』에는 이 전쟁에 대한 고야의 중요한 예술적 반응이 담겨 있다. 아마도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고야는 전쟁의 모든 화려한 위용과 매력을 벗겨냈다. 고야의 전쟁 그림은 영웅적 장면이 아닌 추잡한 학살을 담아낸다. 최소한의 미화 시도도 없으며, 토막 난 몸과 겁탈당한 여자들, 목매달린 사람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고야는 계몽주의를 전파하고 독립을 위해 싸우며 신을 섬긴다는 고상한 계획들이 가져온 황폐한 결과를 그렸다. 그리고 선의 유혹이 악의 유혹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여기서 19세기 식민지 정복의 특징적인 도식을 다시 보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과 유럽 문명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구실 또는 변명으로 사용됨으로써 신뢰를 잃었고, 그 이후 식민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해 자행되는 정책적 위장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야는 ‘평화의 참화’라 불릴 만한 참혹한 사회적 현상들을 데생 연작으로 그려낸다. 여기에는 가톨릭교회와 종교 재판이 시민 사회에 휘두른 횡포 그리고 반대 진영을 택했던 모든 이들에게 가해진 박해, 고문, 사형 등이 포함된다.
고야의 유산: 이중의 삶, 이중의 작품세계
『변덕들』에서 출발하여 생을 다할 때까지 30년간 고야는 이중생활을 영위하는데, 이것은 매우 새롭고 특별한 창작의 방식이었다. 그는 삶의 한 부분, 즉 대중의 눈에 비치는 동안에는 당대의 사회 규칙을 따르고 왕실과 교유했다. 그리고 다른 부분, 곧 자신만의 사적인 세계에서는 마음껏 상상력을 펼쳤고, 이는 그로 하여금 전에 한 번도 탐험해 보지 않은 길로 인도했다. 이러한 내적 균열로 인해 그는 뚜렷이 구별되는 두 부류의 작품을 창작하는데, 하나는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자가 ‘낮의’ 작품이라면, 후자는 ‘밤의’ 작품이다. 고야 이전과 이후 그 어떤 예술가도 이처럼 공식적인 창작과 은밀한 창작이라는 완전히 분리된 두 종류의 창작 활동을 지속적으로 한 경우는 없었다. 고야의 작품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 양과 질에서 압도적인 것은 바로 비밀스러운 ‘밤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의 주를 이루는 것은 데생과 판화였고, 고야는 많은 수의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창작하여 내밀히 간직했다.
고야의 작업은 뒤따르는 두 세기 동안 시각 예술 내에서 일어날 수많은 발전의 싹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관성이란 결코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외부의 대상과 맺는 관계를 의미했다. 고야의 세계는 자의적인 것의 지배나 소통의 완전한 거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보편적인 인류 공동체에게 호소할 수 있는 방식을 간직했다.(그 공동체가 설령 후대에 속한다 할지라도.) 고야의 그림들이 오늘날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가 최근 지구 상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메아리를 그의 그림들에서 찾아내는 것은, 바로 그가 인간의 행동과 태도와 몸짓을 이해하고 가장 진실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온 힘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고야가 열망하는 진실은 눈에 보이는 형태들의 진실이 아니라 열망, 사랑, 폭력, 전쟁, 광기의 진실이었다.
○고야의 대표작품들
1820-1823, 캔버스에 유채, 143.5x81.4cm
백작부인의 반지에 남편 마누엘 고도이의 초상화가 보인다.
1799, 캔버스에 유채, 338x282cm
1800, 캔버스에 유채, 280x336cm
1800, 캔버스에 유채, 72x59cm
프란시스코 데 고야 〈옷 벗은 마하〉(위), 〈옷 입은 마하〉(아래)
1795-1800, 캔버스에 유채, 98x191cm / 1800-1807, 캔버스에 유채, 95x190cm
우리 앞에 있는 두 작품은 서양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본 그림일 것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미술 교과서에도 나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사람을 하나는 누드로, 하나는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다는 것이 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나 보다. 먼저 ‘옷 벗은 마하’, ‘옷 입은 마하’ 등으로 불리는 이 여인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마하(maja)’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오래된 책에서는 ‘마야’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스페인어 발음을 잘못 표기한 것이고, 마하가 맞다. 여자의 경우 마하, 남자의 경우 마호(majo)라는 단어는 옷을 잘 차려입고 생김새에 신경을 쓴, 그러나 귀족은 아닌 마드리드 사람들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요즘의 스페인어에서는 인상이 좋고 옷도 잘 입고 서글서글한 사람을 표현할 때 마호, 마하라고 하고, 성격이 좋은 사람을 부를 때도 이 단어를 쓴다. 그러므로 고야의 그림에서 ‘마하’란, 멋쟁이 혹은 예쁘장한 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마하’라는 단어가 누군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이 아닌 것은 알았다. 게다가 이 그림들은 집시 여인, 혹은 베누스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수많은 추측이 있지만 확실히 내려진 결론은 없다. 당시의 세도가이면서 고야와도 친분이 있었던 알바 공작부인(Duquesa de Alba)이라는 가설 때문에 고야와 공작부인 사이의 러브라인이 강조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리고 19세기에도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하면 스페인의 왕비보다도 작위를 많이 가지고 있는 귀족이다. 그만큼 스페인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것이다. 고야와 공작부인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둘 사이의 신분 차이라든지, 둘의 성격 등으로 보아 그 사이가 심각한 관계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야가 공작부인을 짝사랑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공작부인에게 고야는 여러 애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마누엘 고도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여자가 알바 공작부인일 리는 없다. 고도이와 공작부인은 서로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이드북이라든지 일부 서적에서 이 그림의 모델이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서술된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 그림이 제작될 당시 고도이의 여러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모델이 누구인지 확실한 결론이 내려진 것은 없다고 말해두고 싶다. 혹은 아예 모델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 그림을 주문했던 마누엘 고도이는 이 두 작품을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베누스(로크비 베누스), Venus del espejo(Rokeby Venus)〉(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그리고 티치아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베누스 작품과 함께 걸어 놓았다고 하며,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누구냐에 따라 누드를 걸어 놓기도 하고 때로는 옷을 입은 마하를 걸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프라도 미술관에는 물론 두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다.
사실 서양 회화에서 여성의 누드를 그린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유독 고야의 이 누드화가 유명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서양 회화에서 누드로 등장하는 여성은 그리스 · 로마 신화의 여신들이다. 아름다움의 여신인 베누스가 대표적인 예다. 혹은 그리스도교의 인물이나 성인이라도 성서의 내용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라(목욕 중이었다든가, 허영의 상징인 좋은 옷들을 모두 벗어버렸다든가 하는 식이다) 누드로 나오는 여성도 있다.
이런 누드가 나올 때는 이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한 단서가 늘 작품에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베누스의 경우는 쿠피도가, 목욕 중인 수산나(구약성서의 등장인물)는 이를 엿보는 노인 두 명이 늘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에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단서가 전혀 없다. 이 작품이 기존의 여성 누드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여인을 누드로 그렸다는 것, 누드로 있어도 괜찮은 여인(베누스나 수산나)이 아닌 사람을 누드로 그렸다는 것. 이 점이 당시로서는 파격이었고 스페인 종교재판의 검열 대상이기도 했다. 고야의 누드보다 60년 정도 뒤에 그려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나 〈올랭피아(Olympia)〉(두 작품 모두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같은 작품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누드로 있을 수 있는 자격이랄까, 그런 것이 없는 여자가 누드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관람자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몇 십 년 뒤의 프랑스에서도 그랬는데, 하물며 1800년의 스페인에서는 과감한 시도가 아닐 수 없었고, 종교재판까지 받는 등의 역경이 있었다. 물론 당시 권력의 핵심이 주문한 작품이니 여차저차 별 문제 없이 풀려났을 테지만.
사실 고야는 인체를 그리는 것에 그리 전문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마하의 얼굴과 상체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목이 없는 것 같고, 가슴은 중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오히려 옷을 입은 마하가 고야의 그림 스타일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옷감의 색채나 질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든지 흐르는 듯한 붓자국으로 옷감과 베개의 레이스를 표현한 것 등에서 거장의 솜씨가 잘 드러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같은 여인을 옷 입은 모습과 옷 벗은 모습으로 나란히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일단 흥미롭고, 누드인 여인만 보는 것보다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함께 보는 것이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단순한 누드가 아니라 마치 이 여인이 옷을 벗어젖힌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두 마하가 있는 방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북적거린다.
-출처: 스페인 미술관 산책/저자최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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