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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금동원(琴東媛) 2018. 2. 25. 20:05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 행간에 놓인 사랑과 철학, 위대한 대화들

  -엘즈비에타 에팅거  저/ 황은덕 산 지니

 

 

 

 

  위대한 철학가,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의 내밀한 삶을 그려내다.

 

  행간에 놓인 사랑과 철학, 위대한 대화들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스승이었던 마틴 하이데거와 연인관계였던 아렌트의 사상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사상 이전에 존재하였던 두 철학가의 사고 전개과정 속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아렌트와 하이데거가 주고받은 서신 속 대화와,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두 철학가의 삶을 구체화하며 한 편의 서사를 구성한다.

 

   ○출판사 서평

 
  ▶ 위대한 철학가의 내밀한 삶을 그려내다-『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철학가들은 삶 속에서 어떠한 사랑을 나누었을까?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저자 엘즈비에타 에팅거는 저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태인이었던 한나 아렌트의 삶에 주목하여 이러한 의문의 답을 풀고자 한다. 스승이었던 마틴 하이데거와 연인관계였던 아렌트의 사상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사상 이전에 존재하였던 두 철학가의 사고 전개과정 속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아렌트와 하이데거가 주고받은 서신 속 대화와,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두 철학가의 삶을 구체화하며 한 편의 서사를 구성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하이데거보다 아렌트의 삶에 방점을 두었는데, 서술 과정에서 은연중에 아렌트를 향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1995년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발표되자 “공상적인 이야기”라는 평가와 함께 다양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때 이 책에 부정적으로 묘사된 하이데거의 모습을 두고 하이데거 측에서는 서둘러 두 철학자의 서신들을 전격 공개했다. 이후 둘의 관계를 토대로 구성된 다양한 서적물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의 서신관계를 토대로 쓰인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 스승과 제자로서의 첫 만남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첫사랑에 끝까지 충실했다.”
  하이데거는 강의실에서 아렌트의 크고 검은 눈을 찾아냈고, 두 달여 동안 지켜본 후 자신의 연구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했다. 이후 하이데거는 레인코트를 입고 얼굴 깊숙이 모자를 눌러쓴 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네” 또는 “아니요”라고 답하던 아렌트의 이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편지에서 회상하곤 했다. 그 만남 이후 정교하면서도 유려한 산문으로 이루어진 하이데거의 장문의 편지들이 이어졌다.
_본문 32~33쪽.

  1924년, 마부르크 대학에 입학한 열여덟 살의 아렌트와 서른다섯 살의 하이데거는 하이데거의 철학 수업에서 처음 만난다. 이미 엘프리데 페트리라는 여성과 결혼했던 하이데거였지만, 당시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렌트의 편지 속 문구처럼 “학문적 목표만을 헌신적으로 추구하는 한 남자의 무서운 외로움”이 하이데거의 고독을 짓누를 때마다 아렌트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친구 역할을 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롭고 관습을 무시하며 행복한 사랑을 꿈꿨던 아렌트의 열망은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 지 약 일 년 후, 박사학위 논문을 마부르크 대학에서 연구할 수 없다는 스승 하이데거의 통보에서 불거진다.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대학에서 떠나라고 종용하는데, 대학에서의 권위적 입지와는 반대로 점점 가까워지는 아렌트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 활발한 서신과 뒤이어진 침묵의 시간
 
  하이데거와의 짧은 연애를 마감하고 아렌트는 다른 연인들과 교류하며 또 다른 삶을 일군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를 향한 아렌트의 결속력이 줄어들거나 소실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렌트에 있어 하이데거는 권위자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편지왕래와 만남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며 편지와 쪽지들을 꾸준히 주고받고 있음을 저자의 서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후 히틀러 집권 시기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력하게 되는데,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력을 이유로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렇게 독일 민족성을 유독 강조했던 하이데거의 행동과는 별개로, 아렌트는 그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를 향한 끊임없는 애정을 유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 위대한 사랑과 나 자신의 정체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방법
 
  아렌트는 하이데거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한 후 독립성을 포기해야 했다. “만약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만약 사랑의 대가로 내가 독립성을 포기해야 한다면”이라고 아렌트가 블뤼허에게 말했을 때, 블뤼허는 확실히 그녀의 과거 경험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_본문 72쪽.

  독립적이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여성이었던 아렌트였지만, 하이데거의 관계에서 유추하듯 여전히 전통적인 역할 속에서 남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아렌트의 주된 내적갈등 요인이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가 부흥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두 사람의 삶이 극적인 변화를 겪던 시점 이후, 유대인이었던 아렌트는 독일을 떠나면서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방문 요청에 따라 그와 재회하게 되고, 하이데거의 저서를 미국에서 번역하고 출판하는 공적인 일을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과거의 ‘연인’관계로 범주화할 수 없는 두 철학가의 독특한 관계가 형성된다. 훗날 아렌트는 전체주의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하는데 이 소식은 하이데거를 불편하게끔 만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관계는 뿌리 깊은 결속력을 유지하는데 이 관계는 아렌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1975년까지 반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 소녀에서 여인으로, 여인에서 위대한 철학가로
     추상적인 사상가에서,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로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의 평생에 걸친 사랑은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아렌트는 사랑하는 연인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고, 아렌트에게 있어 하이데거는 철학과 동격의 의미를 지닌 신적인 존재였다. 당시 하이데거가 몰두하던 철학과 시, 문학, 음악은 아렌트의 사상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으므로 두 철학가가 서로에게 끼쳤던 중요성을 가늠하는 일은 그들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이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변을 통해 서로의 입장차를 드러냈던, 유태인으로서의 아렌트와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인으로서의 하이데거. 독자들은 그들의 편지 속 행간을 통해 위대한 철학자들의 인간다움, 양면성에서 비춰지는 인간 존재의 철학적 시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 철학자. 독일 태생의 유대인으로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을 떠나 파리 등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했다.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전체주의의 기원, 악, 폭력 등에 대해 깊이 연구했으며, 인간의 행위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악의 평범성’ 개념 등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저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부르크 대학 신입생 시절, 열일곱 살 연상이었던 스승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졌고, 이후 50여 년 동안 ‘충실’한 관계를 유지했다. 주요 저서로『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신의 삶』 등이 있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 철학자.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이 자명하다고 여긴 존재개념을 철학의 근본주제로 삼았고,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 야스퍼스 등과 평생 교류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사유와 저작의 대부분이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 산장에서 이루어졌다. 히틀러 집권 시기인 1933년 4월에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했고, 이후 나치당에 입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협력 사실로 인해 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51년에 복권되었다. 주요 저서로『존재와 시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니체』 등이 있다.

  

   Elzbieta Ettinger소설가이자 교수.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를 피해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했고, 전쟁 이후 폴란드 정부의 전체주의를 비판하여 감시대상자가 되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유치원』(Kindergarten, 1968), 『퀵 샌드』(Quicksand, 1989)를 발간했다. 1966년 바르샤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대학 래드클리프 연구소를 거쳐 MIT 교수로 재직했다. 전기 『로사 룩셈부르크의 생애』(Rosa Luxemburg, A Life, 1987)를 출간했고, 한나 아렌트의 전기를 집필하던 중인 2005년에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은덕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전남대 영문과 졸업 후 방송작가로 일했고 이후 가족과 함께 십여 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며 공부했고 일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했다. 귀국 후 부산에 정착하여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한국어 수업』이 있고, 마사 누스바움의 「민주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 등을 번역했다. 부산작가상,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 부산대학교 전임대우강사로 일하고 있다

 

 

 

   [ 뷰]

 

  두철학자의 사랑-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랄랄라의챙노리 | 2014-01-05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세상을 만나는 당신의 열쇳말은 무언가요. 이 물음에 나는 답해요.
  나의 열쇳말은 ‘사랑’이라고. 인간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 위대한 자들의 인류애, 부모의 자식 사랑,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동경과 신뢰, 이성/동성의 가슴 뛰는 사랑 등. 저는 ‘사랑’이 좋아요.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고 삶에 활기를 주며 누군가에겐 존재이유이기도 하죠.
  그래서일까요. 늘 사랑이야기에 몰두해요. 사랑에 빠지는 횟수도 다반사이고요.

 

 

 

  도서관에 비치된 이 책을 만났을 때 문득 떠올렸어요. 날마다 쏟아지는 수많은 책 가운데 “행간에 놓인 사랑과 철학, 위대한 대화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사람들 눈에 잘 띌 법한 곳에 배치한 도서관 사서를. 그이는 분명 멋진 사람일 거예요.

 

 

  나는 한나 아렌트를 <전체주의의 기원>이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난해한 책으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낭만적인 문구의 발화자로 기억해요.
  그런데 이 책을 보고 나서 한나 아렌트가 인간적으로 보이고 나의 또다른 자아와도 같은 동질감마저 느껴져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꺼냈어요. 사람을 이해하면 그이의 이야기가 더 잘 들릴 때가 있잖아요. 이번 겨울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완독하려고 해요.

 

  이 책에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사이에 오간 편지가 많이 실렸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엘즈비에타 에팅거라는 지은이는 한나, 마틴, 블뤼허(한나의 남편)의 편지를 부분적으로 인용했고, 작가의 관점과 해석으로 기술된 부분이 책의 대다수를 차지하죠. 긴장을 잃으면 안 돼요. 작가는 전적으로 한나 편이거든요. (한나는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기도 하고요.)
  편지 전문이 좀더 있었다면 좋았겠다 싶지만, 이것만 해도 어딘가요. 둘 사이에 오고간 기록을 엿볼 수 있다니.

 

  나는 편지가 좋아요. 지나친 1인칭 서술이 거짓말인 듯한 때가 있어요. 나의 무의식에서는 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를 상정하면서도, 마치 화자와 청자가 오직 나뿐인 것처럼 이야기를 마구 꺼내놓는 것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일기나 감상문을 쓰다 보면 자기연민이나 자아도취, 자기만족에 그치고 말아요. 이건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지금 내가 책을 읽고 난 후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편지는 내밀한 자기고백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의 서술이 가능한 방식이거든요. 내 글을 읽는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환기하면서, 내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여 말하게 되고요. 나는 이게 좀더 솔직한 태도인 것 같아요. 나 자신에게 말이에요. 그리고 언제나 내 이야기만 하고 싶어 환장했고 상대가 내 이야기를 전적으로 귀 기울여 들려주기를 요구하는 나이기에, 눈맞춤 없는 대화인 편지는 날 적당하게 만족시킬 수도 있어요.  

혹시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특히 마틴 하이데거가요. 불경스럽죠. 미천한 나와 위대한 학자들을 감히 비교하다.

 

  이 책을 통해 둘의 철학을 맛보리라 기대하면 실망할 수 있어요. 제가 볼 때 이건 ‘사랑이야기’랍니다. 애틋하고 가슴 아프고 때로는 뻔한 사랑이야기. 대신 두 철학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마음껏 즐길 수 있지요.

 

  한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는 다양하지요. 의식과 무의식, 성, 인종, 계급 등.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내가 처한 상황과 무관할 수 없어요.
  “넌 누구지?”
  “지금 네가 있는 곳은 어디이지?”
  “너는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정체성에 대해 고찰을 하는 이라면 그럴 만한 계기가 있고 그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에요. 남성성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인 곳에서 여성성을 묻게 되고, 경상도인들의 화합을 주장하는 곳에서 나의 지역성을 살피게 되고, 백인들의 세계에서 내 피부색을 깨닫게 되죠.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진 아렌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체성 혼란을 겪었을지도 몰라요.
  사랑을 하면 모든 걸 내려놓고 버리게 되는 순간/기간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혼돈이 필연적으로 찾아와요. 나의 견해나 삶의 방식 등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상대에게 기꺼이 종속하고 싶어져요. 열정적인 사랑에 사로잡힌 이라면.

  한편 열정 가운데 이성이라는 게 빼꼼 고개를 들 때 자문해보죠.
  ‘나는 뭘까? 내가 믿고 행동해왔던 것들은 무엇일까?’
  ‘내가,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사랑에 빠진 상대 역시 나를 위해 기꺼이 뛰어들었다면 이런 질문은 결코 찾아오지 않아요. 둘 모두 열정에 휩쓸려 열대를 살고 있으니, 한대성 작물 같은 질문은 끼어들 여지가 없거든요.  

 

  이 책을 읽으며 저는 드라마가 떠올랐어요.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어요. 여자는 회사원이고요, 남자는 그 회사의 사장이에요. 둘은 열렬히 사랑하죠. 대부분의 드라마는 신데렐라로 흘러갑니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고귀한 사랑.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자의 신분을 기꺼이 상승시키는 사랑.
  “그들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They lived happily ever!"

 

  전 이런 상황을 생각해봐요. 한 여성이 한 남성과 사랑에 빠졌어요. 여성은 노동자이고요, 남성은 자본가랍니다. 여성노동자는 자기가 왜 노동자로 살아가는지 생각을 하는 인간이에요.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라든지 비인간적인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회사의 구조라든지 동료가 해고되는 일상이라든지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는 인간 말이에요. 노동자는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한 삶의 방식을 지속하게 하는 어떤 구조나 힘이 있다는 것을 각성하게 돼요. 그 구조의 핵심에 남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요. 내가 사랑하는 이가 체제유지에 기꺼이 복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 당혹스러움은 사랑에 빠진 순간만큼이나 강한 힘을 발휘하죠. 그는 나를 구원하겠지만, 내가 속한 세계를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오르니까요.

 

  모든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기기만적이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사랑에 빠진 이는 어느 정도 자기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에요. 나는 그가 내가 속한 계급과는 다른 계급의 사람이어도, 체제 유지와 체제 공고화의 선봉에 선 이라 할지라도 믿고 싶어요.
  “그는 나를 사랑해.”
  “우리 둘 사이에는 계급이니 인종이니 하는 질문들이 무의미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고, 이미 뛰어들었으며, 앞으로도 서로를 위해 살 테니까.”

 

  성평등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남녀평등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을 하던 여자가 사랑에 빠졌어요. 남자는 여자에게 다정다감해요. 그런데 때때로 남자는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여요. 그래도 여자에게는 최고의 남자이지요.
  그 남자가 자기 일터나 사석에서 몰지각한 언행을 내뱉기도 하고, 여성을 하등동물 취급할 때도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여자에게 직접적으로 그리 하지는 않아요. 여자는 혼란스러워요.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수용이지, 개혁대상이 아니란 걸 잘 알거든요. 미묘한 줄타기가 시작되어요. 내가 그를 이해하고 수용하면 언젠가 그 또한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리라는 기대가 생기기도 하고요.

 

  이야기가 길었죠. 나는 한나와 하이데거의 사랑이 위에 언급한 사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처음부터 대등한 사랑이 시작되기 어려운 조건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이들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한나 아렌트는 자유롭고 기쁘게 사랑했고 관습을 무시했다.” (36쪽)
  사랑에 빠진 여자는 누구나 그렇죠.

 

  “자신의 수줍음과 말없는 숭배가 하이데거를 기쁘게 하고 흥분시킨다는 것을 그녀는 직관과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39쪽)
  대부분의 남자가 그렇다는 것을 어떤 여자는 알고, 자신만만한 인간이 그렇다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하고요.

 

  “근본적으로 선한 하이데거의 천성을 신뢰하는-내게는 설득력이 있지만, 사실 그 누구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어요-확신이 내게 있었고, 이것은 항상 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어요.” (132쪽) -한나가 남편 블뤼허에게 쓴 편지 중에서

 

  이것이 함정이죠. 인간성에 대해 신뢰를 하는 이가 사랑에 빠진 경우라면. 내가 사랑하는 이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의 환상이 그렇게 볼 뿐이죠. 하지만 사랑에 눈먼 자는 결코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하이데거는 “내가 충실하거나 충실하지 않았을 때에도,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는” 남자였다. (11쪽)

  부치지 않은 편지에서 그랬다고 하죠, 한나가.

  나는 이게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강한 첫사랑은 후발주자들에게 결코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아서요.
  그리고 어쩌면 열정 넘치는 한나 아렌트는, 사랑 그 자체보다 때로는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를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이는 최초의 결핍이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사로잡히기 쉬운 상태랍니다.

 

  전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꼈어요. 한나 곁에서 한나를 오랫동안 지켜준 블뤼허가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한나는 자신의 지적 유산이 하이데거로부터 빚진 거라고 말했지만, 글쎄요 제가 보기엔 한나 아렌트는 블뤼허가 없었다면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한나와 하이데거는 지금까지만으로 족해요. 이 둘의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 중 하나일 뿐이거든요. 

  그러니 이제는 한나와 블뤼허의 이야기를 들어야겠어요. “당신은 확실히 모든 걸 올바르게 하고 있어요.” 하고 한결같이 다정하게 말을 건넨 블뤼허의 이야기를요.
  이 이야기 조만간 나올 거예요. 작가들이란, 늘 새로운 이야기에 굶주려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늘 사랑이야기에 감탄하는 독자, 제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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