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파스칼 키냐르/송의경 역| 프란츠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찬가입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음악, 위로가 되는 음악, 새들의 노랫소리에 담긴 생생한 자연의 소리 같은 그런 음악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보하고자 했던 무명 음악가의 내밀한 독백.
『음악 혐오』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음악 전문 출판사 프란츠에서 파스칼 키냐르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음악을 영혼으로, 문학을 육신으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악과 언어가 결속된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 파스칼 키냐르.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그가 평생에 걸쳐 몰두했던 생의 근원과 기원의 음악이라는 주제를 한 무명 사제 음악가의 삶을 통해 풀어낸 작품으로, 출간 즉시 도빌 시의 [책과 음악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시미언 피즈 체니는 아내와 사별한 뒤, 아내가 사랑했던 사제관 정원의 모든 사물이 내는 소리를 기보하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승화시키고자 했던 실존 인물이다. 그는 정원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뿐만 아니라 물 떨어지는 소리, 옷깃에 이는 바람 소리 등 생명이 없는 사물의 소리까지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그 지평을 넓히려 했다.
파스칼 키냐르는 노老 사제의 이야기를 통하여, 음악 이전의 음악, 즉 기원의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동시에 사제의 이 같은 노력이 상실한 사랑을 위무하기 위한 애도의 한 방식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음악이 지닌 사랑의 속성을 정제된 시적 언어로 들려주고 있다.
○책 속으로
― 성직자였던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다. 숲의 노랫소리와 열한 개 빙하 호수의 물결 소리에 화답했다.
--- p.9
― 그는 심지어 꽉 잠기지 않은 살수장치에서 마당의 포석 위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도 기보했다.
--- p.9~10
― 갑자기 소리들로 웅성거리는 기이한 사제관에 나는 불현듯 매료되었다. 그리고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끊임없이 서성이는 이 정원에서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 p.10
― 생명이 없는 사물들에게도 나름의 음악이 있다. 수도꼭지에서 반쯤 찬 양동이 속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라.
--- p.13
― 그는 뭔가 다른 것에 골몰해 있음이 역력하다. 거실에서 서성인다. 꿈을 꾸는 사람처럼,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처럼, 낡은 집을 구경시켜 주는 사람처럼, 자신이 기억하는 어느 세계로 옮겨가고 싶은 사람처럼.
--- p.24
― 정원은 늙지 않는 신비로운 얼굴이란다. 오, 심지어 나날이 젊어지는 경이로운 얼굴이야. 계절마다 한층 아름다워지는 얼굴이지. 나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미궁에 빠져있단다.
--- p.55
― 사랑은 절대적인 거니까. 사랑에 유통 기한 따위는 없어.
--- p.58
― 커다랗고 하얀 불길 같은 여인의
아름다운 육체가 흘러내린 옷들 위에
서 있다가 옷들을 건너뛰는 소리.
갑자기 잽싸고 어렴풋한 소리를 내다
스러지는 슬리퍼 소리.
불현듯, 한밤중에, 사랑하는 여인이 벽
한구석의 큰 도자기 요강에,
나무 뚜껑을 열고, 오줌 누는 소리.
--- p.75
― 의식儀式은 소리 없는 복원과 같은 것이므로, 제대로 올리려면 혼자일 필요가 있어. 말없이 과묵한 전례는 기도보다 더 강력하고, 더 효과적이고, 더 매력적이지.
--- p.93
― ‘자신의 고통을 나누는 건 배신이다.’ 이게 늘 속으로 생각했던 바야! 죽은 이들과 홀로, 독대하고 싶어.
--- p.91
― 새들의 노래에는 천국의 무엇이 있다. 하느님은 에덴에서 새들에게 영벌을 내리지 않으셨다.
--- p.183
― 내게서 뭔가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면서 행복해졌어요. 강물은 흘러가면서 희한하게도 이름이 바뀌잖아요.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정원에 대한 사랑을 이어받았어요. 아버지는 평생 그 일을 수행하셨고, 이제는 제가 돌봅니다. 이제는 감동도 제 몫이죠.
--- p.189
― 그림자 같은 세 사람은 말없이 관객에게 인사한다. 함메르쇠이의 화폭 같은 어둠, 외로움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떠오른 무지개, 기원의 소리 없는 음악, 마침내 깃든 평화와 고요……원서의 마지막 단어는 silence……이다.
파스칼 키냐르 자신이 책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1991년 발표한 『세상의 모든 아침』과 쌍을 이루고 있다. 키냐르의 출세작이기도 한 『세상의 모든 아침』은 17세기,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자 작곡자인 생트 콜롱브의 이야기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의 주인공인 시미언 피즈 체니의 서사는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한 채 은둔하여 살았던 그의 삶과 큰 줄기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26년의 간격을 두고 발표한 이 작품은 세부적으로 전작과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형식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국내에서 소개된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 중 희곡 형식으로 쓰인 첫 작품이다. 내레이터와 사제 시미언, 그리고 딸 로즈먼드가 최소한의 소도구만 놓인 널찍한 무대에서 고요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부름’이라는 행위로 연결되어있다. 키냐르가 19세기의 사제 시미언을 불러냈듯이, 노 사제는 오래전 죽은 아내를 목 놓아 부른다. 이른바 이중의 초혼극이, 섬세하게 직조된 아름다운 언어로 펼쳐진다.
두 번째는 두 인물의 음악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차이다. 생트 콜롱브가 음악을 세속적 명예나 청중을 위한 것이 아닌 실현되는 즉시 소멸되는 특유의 순수성을 추구하여 자신의 곡을 일체 출판하지 않은 반면, 체니의 경우 끊임없이 출간을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좌절을 맛본다. 그러나 이러한 두 인물의 차이가 음악의 본질에 대한 이견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두 인물 모두 음악의 본질을 음악 이전의 음악, 즉 기원의 침묵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키냐르 의식의 긴 흐름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천국의 노래―새소리
시미언 피즈 체니는 미국 뉴욕주 제너시오의 사제관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기보한 최초의 음악가이다. 그가 생전 그토록 출간하려 애썼으며, 사후에 아들(작품에서는 딸 로즈먼드)에 의해 자비 출간된 책이 바로 『야생 숲의 노트Wood notes wild』(1852)이다. 그는 새소리뿐만 아니라 바람 소리, 갈대나 사물이 내는 소리 등도 기보했는데, 그의 이러한 야생 그대로의 음악 시퀀스들의 기록은 훗날 드보르자크나 올리비에 메시앙 같은 음악가에게 큰 영감이 되어 주었다. 그 작업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내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이다. 키냐르는 노 사제가 남긴 야생과 사물이 내는 자연의 음악을 ‘음악 이전의 음악’, 즉 ‘기원의 음악’으로 보았다. 천국의 무언가가 깃든 음악,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이후에도 에덴의 주민으로 남은 새들의 노랫소리, 천국의 노래이다.
최초의 정원, 우리가 사랑했던 에덴에서
이 이야기는 세 명의 등장인물에게 차례로 임무가 주어지는 것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사제의 부인 에바가 가꿨던 정원을 에바의 죽음으로 사제가 가꾸기 시작하고, 사제 시미언이 죽은 이후로는 딸 로즈먼드에게로 정원 가꾸기라는 임무가 넘어간다. 마치 강물이 흘러가며 이름을 바꾸듯, 정원에의 임무를 수행하는 수행자들의 이름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키는 것은 한때 정원을 가득 채웠던 지복의 순간과 죽은 이에 대한 영속적인 그리움이다. 그리고 이들 수행자들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홀로일 것. 그리고 침묵할 것.
파스칼 키냐르는 “의식儀式은 소리 없는 복원과 같은 것이므로, 제대로 올리려면 혼자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말없이 과묵한 전례는 기도보다 더 강력하고, 더 효과적이고,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상실감과 외로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떠오르는 것은 침묵의 순간이다. 키냐르는 그 평화와 고요의 순간을 ‘최초의 음악’으로 기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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