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저 | 열화당
소설의 주인공인 사비에르와 아이다, 두 사람은 각자가 처한 폭압적 현실에 맞서 자신들의 일상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발견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아이다는 약제사로서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듣고 어루만지면서, 사비에르는 감옥 안에서 듣는 바깥의 소식을 통해 또는 기억을 통해 이 세계의 불평등과 세계화,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지닌 폭력성에 대해 잊지 않고 되새기기 위해 메모를 한다. 그에게 부과된 이중종신형이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살았던 나이만큼 그 시신을 감금해 놓는다는 가혹한 형벌이다. 그런 데다 두 사람은 결혼한 사이가 아니므로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아이다는 자신의 일상에서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과 위협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변사람들의 소식을 따스한 어조로 편지를 써 보낸다.
쓰러지기 직전의 당뇨병 환자가 약국 문을 두드린 날 결국 그의 목숨을 살린 게 설탕 한 덩어리였음을 이야기하는 편지,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외출해 지프를 탄 그들로부터 총에 맞은 소년을 약국에 데려와 살려냈다는 이야기, 블랙베리 덤불에서 열매를 따던 날 그에게 이 맛과 향과 색을 전해 주고 싶다며 열매를 막 따려고 하는 자신의 손 그림을 그려 넣은 편지, 집이 폭격당한 이웃 앞에서 진정제로 쓰이는 쥐오줌풀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반사적인 직업 정신에 대한 무력감을 토로한 편지 등, 아이다가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글 모두는 서로의 부재를 견디고 현재에 맞서 당당히 그들의 일상을 나누고자 하는 치열하지만 절제된 몸부림이다. 또한 아이다의 편지 뒷장에 적어 내려간 사비에르의 메모 속에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인물들프란츠 파농, 마르코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 등에 관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가 감옥에서마저 현실에 대한 혁명과 저항의 내밀한 투쟁을 계속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 소개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했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했다. 저서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예술과 혁명』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말하기의 다른 방법』 『센스 오브 사이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모든것을 소중히하라』 『백내장』 『벤투의 스케치북』 『아내의 빈 방』 『사진의 이해』 『스모크』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초상들』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G』 『A가 X에게』 『킹』, 삼부작 ‘그들의 노동에’ 『끈질긴 땅』 『한때 유로파에서』 『라일락과 깃발』이 있다.
○출판사 리뷰
존 버거가 발견한 편지?
우리 시대의 양심이자 진보적 지성인 존 버거(John Berger, 1926- )의 신작 A가 X에게편지로 씌어진 소설(From A to X: A Story in Letters)은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부커상 2008년 수상 후보작(longlist)에 오른 작품으로, 출간 직후부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소설은 편지와 인용, 메모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두에서 존 버거 자신이 직접 등장해 이 편지와 메모들을 어느 폐쇄된 교도소에서 발견했음을 밝히고 있어, 기존에 나온 그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며 시작한다. 즉 약제사인 아이다(Aida)가 반정부 테러 조직 결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갇힌 자신의 연인인 사비에르(Xavier)에게 쓴 편지와 그 편지 뒤에 적힌 그의 메모로 이뤄진 이야기다.
여든을 훌쩍 넘긴 노구로, 가자 지구에 달려가 아이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미술학교를 열고, 작년말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으로 천삼백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작가 존 버거, 그는 현실사회의 문제들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소설에서도 두 남녀가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독자의 현실로 가져와 함께 고민해 보자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헌사에는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를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의 창립 멤버이자 난민 캠프의 교사이기도 했던 가산 카나파니(1936-1972)는 자신이 타고 있던 차가 폭파되어 죽었고, 이 죽음은 이스라엘 정보기구 모사드에 의한 암살이었으나 공공연한 비밀로 부쳐지고 말았다. 이 작가에게 바친 헌사를 통해 우리는 사비에르의 모델이 혹시나 카나파니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게 된다.
오늘날의 폭압적 현실에 띄우는 절박한 안부들
소설 속에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 단일시장 체제로 흡수돼 가는 전 세계의 불평등과 폭력, 정치적 종교적 갈등과 내분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오늘날의 현실, 이 세계가 바로 두 남녀의 일상이자 현실이다. 아이다는 사비에르를 여러 가지 애칭으로 부른다. 스페인어, 터키어, 아랍어 미 구아포, 미 소플레테, 미 골론드리노, 하야티, 카나딤, 하비비 등 여러 국적의 애칭을 쓴 것도, 비단 지구 반대편 어느 도시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이라는 구체성을 상기시키고 어딘가에서 억압받고 있는 사랑을 되살리기 위한 존 버거의 애틋한 호명이 아닐까. 198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체슬라브 밀로즈(Czeslaw Milosz)는 인간의 진정한 적은 일반화다라고 했다. 탱크와 지프, 험비, 우지 기관총, 헬리콥터, F16 등으로 무장하? 있는 그들의 위협적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아이다의 말을 우리는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들을 일반화시켜 특정한 지역의 특수한 상황, 특정한 적으로 대상화하여 바라본다면, 우리는 일반화가 지닌 폭력성과 함정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적은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비양심, 무력감, 눈가림, 외면에서 오는 세계와 대상에 대한 거리 두기에서부터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현실이 오늘날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일깨우기 위해, 작가는 실존인물들과 지명들을 적절하게 섞어 놓았다. 또한 이 편지들을 사비에르가 정리한 순서에 따르되 보내지 않은 아이다의 편지를 적절한 곳에 임의로 삽입해 놓았음을 밝히면서, 작가는 어쩌면 독자들이 이 편지의 사이사이, 이들의 절박한 현실의 사이사이를 함께 메워 주기를 당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하나하나의 편지와 메모는 소통에 대한 애틋한 갈망이자, 내면의 볼륨을 높이고 외치는 투쟁의 목소리이자, 사소한 우리의 일상에 대한 발견이다.
존 버거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문학의 집으로 들어가는 몇 가지 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권위있고 공적인 목적을 위한 정문, 그보다는 소박하고 개인적인 용도를 위한 옆문, 그리고 부엌으로 난, 소란스럽고 사소한 드나듦이 있는 뒷문, 이 세 가지 중 마지막이 바로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리고 자신이 이용한 문이라고 그는 비유했다. 이 문 앞에서 오고 간 작은 이야기들을 읽는 우리는, 어느새 그들의 식탁에 앉아 닫혀 있던 귀와 침묵하던 입을 조금씩 열고, 무기력과 고독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치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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