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1~2』
허먼 멜빌 저/황유원 역 | 문학동네 |
○책 속으로
이런 연유로 나는 포경 항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수문이 활짝 열렸고, 나를 이 결심으로 이끈 열광적인 상상 속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은 고래들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내 영혼 깊숙한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든 고래들 한가운데, 하늘에 우뚝 솟은 설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쓴 유령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 p.45~46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를 한 번 끝냈다 해도 뒤에는 두번째 항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며, 두번째 항해를 끝냈다 해도 뒤에는 세번째 항해가, 그뒤에도 또다른 항해가 영원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노고란 그처럼 모두 끝이 없고 견뎌내기 힘든 것들이다.
--- p.135
오오, 야심찬 젊은이들이여, 이 점을 명심할지어다. 인간의 모든 위대함이란 한낱 질병에 지나지 않음을.
--- p.159
내가 죽을 때 내 유언 집행인들이, 더 정확히는 내 빚쟁이들이 내 책상에서 어떤 귀중한 원고라도 발견해낸다면, 나는 그 모든 명예와 영광을 포경업에 돌리겠노라고 여기서 미리 말해두는 바이다. 포경선이야말로 나의 예일대학이자 나의 하버드대학이었으므로.
--- p.221
에이해브는 도저히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비록 에이해브가 명목상 기독교 세계의 인구에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그는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 p.291
그 깊은 의미를 잘 이해해보라고. 이보게, 눈에 보이는 대상은 모두 두꺼운 종이로 만든 가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삶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행위 속에서―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경우,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이성적인 무언가가 비이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거푸집을 내미는 법이지. 만일 뭔가를 찌를 생각이라면 바로 그 가면을 꿰뚫어야 해!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 무슨 수로 밖으로 나갈 수 있겠나― 나에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그 벽이야. 아주 바싹 다가선 벽이지. 가끔은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네. 하지만 아무러면 어때. 녀석은 나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괴롭히고 있단 말이야. 나는 녀석에게서 난폭한 힘과 그 힘을 북돋워주는 헤아릴 수 없는 적의를 느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말로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지. 그 흰 고래가 대리인이건 본체건 간에,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쏟아부을 거야. 자네, 내게 신성모독 어쩌고 하는 소린 꺼내지도 말게. 태양이 날 모욕한다면 그 태양도 찔러줄 테니까. 태양이 그럴 수 있다면 어디 나라고 못 그러겠는가 말이야. 왜냐하면 질투가 모든 피조물의 주인 노릇을 하는 이곳에서는 모든 게 정정당당한 시합이라는 느낌이 들거든. 하지만 그 정정당당한 시합도 나의 주인은 아니야. 날 지배하는 건 누굴까― 진실에 한계는 없어.
--- p.311
정신이란 영혼과 결탁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에이해브의 경우, 그는 분명 자신의 모든 생각과 상상을 하나의 지고한 목적에 바쳤을 것이며, 그 목적은 그 자체가 지닌 순전히 완고한 의지로 인해 신과 악마에게 맞서며 일종의 독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변해갔을 것이다.
--- p.378
이른바 인생이라고 하는 이 기괴하고 복잡다단한 일들을 겪어나가다보면,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짓궂은 농담처럼 느껴지는 어떤 기이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 p.419
자, 이제 냉정하고 침착하게 죽음과 파멸 속으로 뛰어들어보는 거야. 그다음 일은 될 대로 되라지.
뭐가 어째? 향유고래가 천재라고? 향유고래가 책을 쓰거나 연설을 한 적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아니, 향유고래의 위대한 천재성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딱히 한 일이 없다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 p.119
우리 앞에서 혼이 빠진 고래들의 기이한 모습에 놀랄 필요 없다. 지구상의 동물들이 아무리 바보짓을 벌여도 인간의 광기를 절대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 p.182~183
이봐, 에이해브는 영원히 에이해브야. 이 연극에서 이번 막 전체는 바꿀 수 없도록 이미 내용이 정해져 있어. 이 바다가 물결치기 십억 년도 전에 자네와 내가 리허설을 마친 부분이라고. 바보 같으니! 난 운명의 여신을 모시는 부관이야. 난 그저 명령에 따라 행동할 뿐.
○작가 소개
근대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철학적 사고, 풍부한 상징성이 뭍어나는 작품을 쓴 하먼 멜빌. 살아생전에는 단순한 해양 탐험 소설을 썼다과 평가되었을런지 모르지만 현대에 와서는 친구 N.호손과 더불어 인간과 인생에 비극적 통찰을 한 상징주의 철학적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멜빌은 미국의 소설가로 1819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지만 13세 때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한다. 그때부터 멜빌은 은행이나 상점의 잔심부름, 농장일 등을 전전한다. 20세에 처음으로 상선의 선원이 되어 바다로 나간 그는 22세에 포경선을 타게 된다. 이때 항해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 그의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된다. 이후 포경선의 선원과 미 해군이 되어 5년 가까이 남태평양을 누볐다. 포경선에서 탈주해 마르키즈 군도의 식인종과 함께 보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첫 작품 『타이피』(1846)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바다 생활을 담은 『오무』 (1847)에 이어 발표한 『마디』(1849)에는 철학적 논의들을 담았지만 평단의 차디찬 반응에 멜빌은 다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바다에서의 모험으로 돌아가 『레드번』(1849), 『하얀 재킷』(1850)을 발표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표작 『모비 딕』(1851)조차도 그 실험적인 형식으로 인해 혹평에 시달린다. 시대와의 불화로 은둔하면서 단편 「필경사 바틀비」(1853)를 비롯한 중단편과 장편, 시편을 꾸준히 써낸 그는 마지막 소설 『빌리 버드』(1924)를 집필하던 중, 1891년 9월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이해브 선장이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에 도전하는 내용을 다룬『모비 딕(백경)』은 멜빌의 대표작으로,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작가 하수에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포경선 선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리는 한편, 악·숙명·자유의지 등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까지 담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인 『피에르』는 전작처럼 경험에 입각한 해양 이야기에서 탈피하여, 시골의 부유한 평민 집안의 외아들 피에르가 이복누이 이사벨을 구하려다가 빠져 들어간 비극적인 삶을 그리고있다. 이 작품은 캘비니즘적 그리스도교 사상에 의지하면서도 때로는 그 범주를 넘은 견해를 제시하여 인간심리의 착잡함을 비유적·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 역시 오늘날에 와서 더욱 각광받는 부분이 되었다.
○출판사 리뷰
‘진정한 독창성’의 탄생 그리고 ‘멜빌 부흥’ ―포경선이야말로 나의 예일대학이자 나의 하버드대학이었으므로
허먼 멜빌은 1819년 8월 1일 부유한 무역상인 앨런 멜빌과 마리아 갠즈보트 멜빌의 여덟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계인 앨런과 네덜란드계인 마리아는 미국독립전쟁에서 공을 세운 명문가 출신으로, 허먼 멜빌은 자신이 모계와 부계로부터 ‘혁명’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흡족해했다. 1832년 앨런이 사업 실패 후 세상을 떠나게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형과 더불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 나선다. 삼촌이 중역으로 있던 뉴욕주립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시작해 형이 운영하던 상점의 점원으로, 농장 일꾼으로, 교사로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게 된다. 1839년 6월에는 뉴욕과 리버풀을 오가는 상선의 사환으로 취직해 처음으로 배에 오른다. 그는 이 일자리를 얻기 몇 주 전 [니커보커] 5월호에 실린 제레미아 N. 레이놀즈의 「모카 딕, 혹은 태평양의 흰 고래」라는 글을 읽었다. 멜빌 연구자인 허셜 파커 교수에 따르면, 이 무렵 이미 멜빌은 고래에 대한 글을 쓸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840년에는 형과 함께 19세기 세계 최대 포경기지였던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뉴베드퍼드를 찾아 포경선 어커시넷호의 선원으로 계약을 맺고 1841년 1월 3일 출항한다.
당시 포경선의 항해 기간은 3년 내지 4년 정도로 길었고, 항해중 다른 포경선을 만나는 ‘사교적 방문(gam)’을 통해 소식을 교환하곤 했다. 멜빌은 사교적 방문으로 윌리엄 헨리 체이스를 만나 그의 아버지 오언 체이스가 쓴 에식스호 난파기를 빌려 읽게 된다. 오언 체이스는 1820년 남태평양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고 난파된 포경선 에식스호의 일등항해사로 몇 달을 표류하다 가까스로 생환했다. 멜빌은 오언 체이스의 이야기에서 『모비 딕』의 영감을 얻는다.
멜빌의 포경선원 생활은 쉽지 않았다. 선장의 폭압과 격무에 시달리다 1842년 7월, 동료와 함께 탈주해 타히티섬을 비롯한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들을 떠돈다. 1843년 미 해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자신의 경험을 담은 첫 소설 『타이피』 집필을 시작한다. 1846년과 1847년 각각 『타이피』와 속편 『오무』를 출간해 영국과 미국에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식인종들과 함께 산” 모험 작가로서의 명성과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성공 이후 멜빌은 작가로서의 야심을 발휘해 소설들을 쓰지만, 대중의 반응은 점차 싸늘해진다. 1850년 너새니얼 호손과 친교를 맺고 문학적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 멜빌은 장편소설 여덟 편, 「필경사 바틀비」와 「베니토 세레노」 등을 담은 단편집을 내지만 더는 자신의 작품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한 채 1860년 시로 전향한다. 시도 꾸준히 쓰나 소량의 부수를 자비출판으로 출간할 정도로 말년에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1891년 9월 미완성 유작으로 남게 된 「선원, 빌리 버드」를 집필하다 심장발작으로 영면한다. 어느 신문에서는 그를 ‘한때 작가’였고 대표작은 ‘Mobie Dick’이라며, 과거형과 엉뚱한 철자로 그의 부고를 전했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이후 성취하기 어려웠던 ‘진정한 독창성’이 19세기와 20세기 미국문학에서 일부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그 시작은 멜빌이리라 평했다. 시대를 앞선 불운한 작가 멜빌은 그러한 독창성 탓에 생전에는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멜빌 부흥(Melville Revival)’이 인다. 1919년 평론가 레이먼드 위버가 [네이션]에 허먼 멜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특히 『모비 딕』을 극찬한 것을 계기로 재조명되면서 1924년 유작인 「선원, 빌리 버드」까지 포함한 허먼 멜빌의 전집이 발행되고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멜빌은 에드거 앨런 포, 너새니얼 호손과 함께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게 된다.
다시금, 고전이 전하는 위대함 ―우리는 그 주제의 크기만큼이나 확장된다
『모비 딕』은 멜빌이 작가로서의 인기와 명성을 잃고, 둘째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라 생활고는 한층 깊어져가는 때에 집필한 여섯번째 장편소설이다. 너새니얼 호손에게 헌정한 이 작품은 영국에서 먼저 출간 계약이 이루어져 1851년 10월 18일 세 권으로 분권되어 세상에 나온다. 멜빌은 인쇄 직전에 제목을 변경하는데, 이 중요한 내용을 담은 편지가 한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영국판은 『고래The Whale』로 출간된다. 이에 더해 결정적인 인쇄 실수도 발생해 ‘에필로그’가 누락된 채 출간되어 화자의 정체는 그야말로 유령이 되어버린다. 해적판의 유통을 막기 위해 곧장 미국판 출간이 추진되는데, 멜빌은 영국판에서의 실수들을 바로잡아 『모비 딕, 혹은 고래Moby-Dick; or, The Whale』(멜빌은 구두점에 엄청나게 예민한 작가였다. 까닭에 본문 내에서는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이 제목의 하이픈을 두고 논쟁이 분분해 문학역사상 가장 유명한 하이픈이 되었다.)로, 두툼한 한 권으로 출간한다. 1851년 『모비 딕』이 출간되었을 때 [리터러리 가제트]에 실린 리뷰(“이 책은 정말 이상하다. 소설이라고 호언하나 상식에서 꽤나 벗어난 작품이다. 괴이하게 거창하고 곳곳에 매력적이고도 생생한 묘사가 있다.”) 및 서점과 도서관에서는 이 소설이 고래학 내지 포경업 실용서로 분류되었다는 설은 멜빌의 작품이 얼마나 낯설고 새롭고 독창적인가를 오히려 역설한다.
1920년대 이후 멜빌의 작품이 다시 읽히면서 그에게 영향을 받은 후대 작가들이 등장한다. 특히 윌리엄 포크너, 코맥 매카시, 노먼 메일러 등이 빚어낸 인물들은 멜빌의 피쿼드호에 승선한 여러 인물들을 원형으로 삼았다. 위대한 첫 문장([텔래그래프] 선정 ‘가장 위대한 첫 문장 30’)으로 꼽히는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Call me Ishmael)”에서부터 독자는 등장인물의 이름 그리고 그 상징과 마주하게 된다. 이슈미얼이 본명인지 가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성경에서 차용한 이름과 그 상징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즉 ‘추방된 자’이자 ‘떠도는 자’로. 이슈미얼은 이 땅에서 겪는 삶의 염증, 우울 그리고 자살충동을 달래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인물로, 이교도 친구인 퀴퀘그와 함께 포경선 피쿼드호에서 경험한 사건을 독자에게 전한다. 그 사건이 곧 이 소설의 줄거리랄 수 있다. 지능이 높고 광포한 흰 고래, 전설의 향유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해브 선장은 복수심에 불타 일등항해사인 스타벅의 반대에도 피쿼드호의 선원들을 이끌고 모비 딕과 대결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불가능함을, 파멸할 것임을 알면서도 운명을 따르는 에이해브의 최후는 그리스비극,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잇는다. 하지만 멜빌은 그러한 비극에 이르기까지 삶에 대한 성찰, 풍요로운 상징과 알레고리. 고래학을 방불케 하는 백과사전적 지식과 온갖 사료 그리고 실제 포경선원으로 겪은 경험과 위대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섞어 다채로운 포경선의 모습과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로 가히 고래처럼 ‘거대하고 자유로운’ 허먼 멜빌만의 진정한 독창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비 딕』은 이처럼 여느 소설에서는 맛보기 힘든 다채로운 특장들이 있으나, 매력적인 플롯 때문에 “흰 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후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 노선장 에이해브의, 광기와도 같은 추격을 뼈대로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흡사 언젠가 읽은 듯 그 주제를 읊게 된 유명한 고전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작품을 가장 제대로 소개해줄 문장은 작품 내에 있을 듯하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거대하고 자유로운 주제가 지닌 미덕, 모든 것을 확대하는 엄청난 미덕이다! 우리는 그 주제의 크기만큼이나 확장된다. 웅장한 책을 쓰려면 반드시 웅장한 주제를 택해야 한다. 벼룩에 대한 책을 쓰려고 시도해본 이들은 많겠으나, 그 주제로는 결코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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