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작가 박경리(82.사진)씨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경리 선생은 7일 오후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화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환경 문제를 아는 인물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고 "진정한 지도자는 국토의 관리자가 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선생은 원주 오봉산 기슭의 토지문화관에서 외부와 접촉을 일절 끊고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걱정스럽고 안타까웠다. 박경리(82)선생의 신작 '가설을 위한 망상'(나남)을 들춰보니 2003년 연재를 중단했던 '나비야 청산(靑山)가자'가 미완성인 채로 실려 있었다. 작가가 미완성 소설을 책으로 묶는 건 좀체 드문 일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끝내 글쓰기를 접으려는 것인가. 이태 전부터 "몸이 불편하다"며 십수 번이나 인터뷰를 고사한 선생이었다.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고, 왼쪽 시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얘기도 건너들은 참이었다.
하여 다시 인터뷰 의사를 넣었다. 며칠 뒤, 선생이 머무는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답변이 왔다. 7일께 내려오라고, 대신 몸이 성치 못하니 오래 앉아있지는 못한다고…. 어른이 드문 시대, 이 땅의 몇 안 되는 어른으로 우러러지는 박경리 인터뷰는 이렇게 성사됐다.
7일 오후 원주의 하늘은 흐렸다. 간간이 빗방울도 떨어졌다. 박경리 선생이 손수 심은 고추를 돌보는 장면은 진작에 머리에서 지워야 했다. 무거운 공기 탓에 선생의 육신마저 무거워지지는 않을까, 다시 걱정이 일었다.
선생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빨강의 개량 한복 차림이었다. 선생은 환히 웃어보였다. 다행이었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아니야. 지금도 많이 안 좋아. 날씨가 이러면 왼팔이 무거워져 제대로 들지도 못해. 요즘엔 텃밭에도 자주 못 나가. 내 나이가 얼만데…."
-그런 말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미완성 원고를 책으로 묶어내셨기에 놀란 마음으로 달려왔습니다.
"'나비야 청산가자'는 지금도 아쉬워. 해방 이후 지식인 사회를 제대로 다뤄보고 싶었거든. 하지만 내가 너무 각오를 크게 잡았나 봐. 그 전에도 혈압 때문에 약을 먹었어. 그런데 연재를 시작하고 보니까 눈 앞에 불이 번쩍번쩍하는 거야. 놀라서 병원에 갔더니 혈압이 200이 넘더라고. 나이 생각은 못하고 너무 무리했던 게지."(※대하소설 '토지'는 광복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해방 이후 50년을 다루려 했던 '나비야 청산가자'는 '토지'의 후속작인 셈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3회 만에 연재를 중단했다.)
-그래서 이제 글쓰기는 접으신 겁니까.
"한동안 못 쓰다가 두 달쯤 전에 새로 시작했어. 시일 수도 있고 소설일 수도 있어. 내 가족에 관한 얘기야.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선생에게 외할머니는 특별한 존재다. 먼 옛날 외할머니가 들려준 호열자 얘기가 바로 '토지'의 모태가 됐다.)
-그 옛날 일이 지금도 기억나세요?
"그럼, 다 생각나지. 희한하게 날이 갈수록 생생해. 새벽에 계속 무언가가 쏟아져 나와. 안 쓰면 못 배기겠더라고. 그게 하필이면 내 가족 얘기라는 게 이상해. 아마도 이제는 그때 일을 정리할 때가 됐다는 걸 내 몸이 먼저 아는 것 같아. 내 가족 얘기는 끝내고 가야한다는 의무감 같은 거 말이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세요?
"여느 할머니랑 똑같이 살아. 새벽 2시면 눈이 떠져.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아니면 낮에 텃밭에서 딴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 농약 안 뿌리고 짓는 농사잖아. 그래서 맛있어. 꼭 먹고 가."
-유기농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한미 FTA가 타결됐잖아요. 앞으로 우리 농산물 먹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우리나라가 잘 먹고 잘 사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우리 정치가들은 생각이 짧아. FTA라는 거, 우리는 공산품 만들고 미국은 농사짓자는 거잖아. 그러면 결국 우리 땅은 죽게 된다고. 앞으로 1~2년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맨 처음 고추농사 지을 때 농약 안 친 것에 비해 수확이 절반도 안됐어. 하지만 해마다 조금씩 나아지더라고. 지금은 농약 치는 거보다 훨씬 많이 따."
-구체적인 정책이 중요하겠지요.
"당연하지. 내가 말하는 건 정치인들의 철학이야. 표에만 눈먼 꼴이라니…. 환경문제를 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하는데…."
-환경을 아는 대통령을 바란다는 말씀이신가요.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 때 국토관리자가 되겠다고 했어. 물론 그렇게는 안 됐지. 대신 말은 맞아. 옛날 중국에서 황제는 황하를 다스린다고 했잖아. 그게 국토관리거든. 우리가 살고, 생명을 잇게끔 하는 것…."
-그러면 환경이란 무엇인가요.
"환경이란 말보다는 생태계란 표현이 그나마 낫겠지. 석유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못 살잖아. 석유는 개발을 말하는 거고, 물은 보존을 의미하겠지. 물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걸 말하는 거야. 근원적인 걸 깨닫고 사는 거지."
-그럼 청계천 복원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훌륭한 대통령 후보이겠네요.
"청계천 복원 얘기, 여기에서 시작된 거 알지? 토지문화관 세미나에서 맨 처음 주장했던 걸 이명박씨가 공약에 넣은 거잖아. 지금 보면 모자란 게 많아. 3600억 원쯤 썼다지? 그 정도 비용 가지고 그렇게 복원한 것도 사실 대단해. 하지만 이왕 하는 거 3~4조 원 풀어서 크게 했어야지. 그건 이명박 시장이 통(비용)이 적어서 그런 거고, 뜻깊은 사업을 제대로 못 밀어준 노무현 대통령도 문제가 많아."
-손학규씨하곤 친분이 있으시지요? 얼마 전엔 원주에도 내려왔는데.
"원래 원주랑 인연이 있는 사람이야. 찾아오겠다고 하더라고. 와서는 내 말만 듣고 본인은 별말이 없었어요. 그건 그렇고, 정치 얘기 더 물으려면 가."
-죄송합니다. 워낙 어렵게 찾아봬서…. 그런데 인터뷰는 왜 그리 싫어하십니까.
"작가가 작품 쓰고나면 그만이지. 기자들 불러서 왜 떠들어. 기자한테 얘기할 게 남아있다는 건 작품에 제대로 못 썼다는 거 아닌가?"
-그럼 환경 얘기로 돌아가죠.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이 능동적인 거라면 물질은 피동적인 거야. 풀잎도 생명인 이유가 있어요. 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기 위해 무언가를 섭취하잖아. 그건 오로지 능동적인 행위야. 물.불.바람, 어떤 뜻에서 모두 다 생명이야. 의지는 없어도 능동성은 있잖아. 그 원리를 여기서 날마다 지켜보며 살고 있어."
-후배 작가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작가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해. 인간의 본질, 인류의 운명을 고민하는 게 작가가 가는 길이야. 극도의 민족주의에 기대서는 훌륭한 예술이 나올 수 없어."
-일본에선 '토지'를 반일문학으로 치부하는 걸로 아는데요.
"일본 군국주의는 자체로 비도덕적이고 반생명적이었어.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 무엇보다 나는 일본 체제를 반대하지만 일본인을 반대하는 건 아니야."
-왜 토지문학관이 아니고 토지문화관입니까.
"문화도 생존이 있고 나서 있는 거야. 문학은 한참 부차적인 거고. 문화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 거라면 문명은 기술적인 문제야. 지금은 문명이 문화를 지배하고 있지. 그게 잘못된 것도 모르고…."
선생의 마른 기침이 잦아졌다. 입술은 이미 바짝 말랐고 말들은 자주 어긋났다. 30분도 성공이라고 각오했던 인터뷰는 꼬박 두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선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안 될까?" 마지막으로 지금 가장 바라는 한 가지를 물었다.
"행복해. 토지문화관도 그럭저럭 꾸릴 만해. 작가창작실을 10개 더 내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그건 목돈이 들어와야 하는 거고. 건강은, 나이가 있으니까….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아요. 하지만 혈압약만 먹어. 병원에도 1년에 두 번 정도만 가고.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
원주 글=손민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ploveson@joongang.co.kr></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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