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두이노의 비가-제2 비가 /릴케

두이노의 비가 릴케 -제 2 비가- 모든 천사는 두렵다. 아, 그러나 그대들,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는 영혼의 새들이여, 그대들을 알기에 나는 그대들을 향해 찬미한다. 토비아의 시대는 어디로 갔는가? 그날은 찬란한 천사 하나 여정을 위해 가볍게 꾸며 입고, 두려운 모습 조금도 보이는 일 없이, 소박한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호기심에 찬 토비아도 젊은이끼리 대하듯 그렇게 바라보았건만) 그러나 이제, 만일 대천사, 그 위험한 존재가 별들 너머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우리를 향해 내딛는다면, 우리의 심장은 높이 고동치며 우리를 파멸시키리라.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대들은 창세의 걸작, 조화의 총아, 창조의 산맥, 아침 햇살에 빛나는 지붕의 당마루, 만발한 신성의 꽃가루, 빛의 굴절, 복도, 계단, 왕좌, 본질의..

두이노의 비가- 제1 비가 /릴케

두이노의 비가 릴케 -제 1 비가-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주랴? 설혹 어느 천사 하나 있어 나를 불현듯 안아 준다 하여도 나는 그의 보다 강력한 존재에 소멸하리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아직은 견뎌 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우리가 그처럼 찬탄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 따위는 멸시하는 까닭이다. 모든 천사는 두렵다*. 그리하여 나는 암울한 흐느낌이 섞인 유혹의 소리를 억누르고 삼켜 버린다. 아,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천사도 아니다. 인간도 아니다. 명민한 짐승들은 우리가 이 해석된 세계**에서 마음 편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란 아마도 날마다 바라보는 언덕의 한 그루 나무, 어제 ..

사물의 정다움/ 정현종

사물의 정다움 정현종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네. 구름나라와 은하수 사이의 우리의 어린이들을 꿈의 병신들을 잃어버리며 캄캄함의 혼란 또는 괴로움 사이로 인생은 새버리고, 헛되고 헛됨의 그 다음에서 우리는 화환과 알코올을 가을 바람을 나누며 헤어졌네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고. 죽음이었지만 허나 구원은 또 항상 가장 가볍게 순간 가장 빠르게 왔으므로 그때 시간의 매 마디들은 반짝이며 지나가는 게 보였네 보았네 대낮의 햇빛 속에서 웃고 있는 목장의 울타리 木幹의 타오르는 정다움을, 무의미하지 않은 달밤 달이 뜨는 우주의 참 부드러운 사건을, 어디로 갈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길과 취기를 뒤섞고 두 사람의 괴로움이 서로 따로 헤어져 있을 때도 알겠네 헤어짐의 정다움을, 불붙는 신경의 집을 위해 때때로..

종소리 / 신달자

종소리 신달자 종이 안에서 울리는 것을 듣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종이 앞에서 뜨거운 과욕의 갈망을 걷어 내는 순간 울리는 종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고 넝마같이 귓전에 펄럭이는 소음을 지나 해거름에 더욱 눈 찔리는 불빛들 헐떡이는 울화처럼 치솟은 빌딩 숲을 걸어와 간절히 마주하는 종이 앞에서 맑은 랩으로 싸 얼려 놓은 순수라는 말 두 손을 비벼 더운 사람의 기운으로 풀어 녹이는 순간 저 지하 층층 어둠 속에서 푸르게 다가와 내 가슴에 울리는 종 종 울린다 -『종이』, (민음사, 2011) ○ 신달자 시인은 1964년 〈여상〉을 통해 시 〈환상의 밤〉으로 여류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뒤,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발〉, 〈처음 목소리〉가 추천되면서 ..

신은 인간을 만들기 전에/ 릴케

신은 인간을 만들기 전에 R.M. 릴케 신은 인간을 만들기 전에 누구에게나 말해준다. 그리고 묵묵히 그와 함께 밤으로부터 나온다. 그 말, 인간이 시작하기 전에 신이 한 말, 그 구름 같은 말은 이러하다. 너의 오관으로부터 그리움의 끝에까지 가거라. 옷을 나에게 다오. 사물들 뒤에서 불길처럼 크게 자라라. 넓게 번져가는 그 그림자가 항상 나를 완전히 가리도록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만나거라. 오직 걸어가기만 해야 한다. 감정에게는 이르지 못하는 먼 곳이란 없다. 나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라. 그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토지는 가까이 있다. 그 엄숙함에서 인생을 알게 되리라. 나에게 손을 다오 그럼에도 나에게는 그럼에도 나에게는 그를 위해 모든 노래를 내 깊은 곳에 간직해 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는 떨..

꽃2/ 김춘수

꽃2 김춘수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잎이 훈김에 떤다. 花粉도 난(飛)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 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가 까마득히 멀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는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디딤돌1 디딤돌이 달빛에 젖어 있다 아내의 한쪽 발이 놓인다 어디선가 가을 귀뚜리가 운다 무중력 상태의 한없이 먼 곳에 아내는 떠 있는 느낌이다 라일락 꽃잎 한 아이가 나비를 쫓는다. 나비는 잡히지 않고 나비를 쫓는 그 아이의 손이 하늘의 저 투명한 깊이를 헤집고 있다. 아침 햇살이 라일락 꽃잎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아침에 크고 꺼칠한 손이 햇서리가 내린 밀감나무의 밀감을 따고 있었다 밀감밭이 있는 탱자나..

우표 한장 부쳐서/ 천양희

우표 한장 부쳐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마음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시냇가에서/ 천양희

시냇가에서 천양희 수면의 파문이 겹쳐 떨린다 둥근 물방울같이 환한 수궁(水宮)이 그립다 오늘은 솔새들의 이정표 별자리도 보인다 수정빛 메아리도 들리는 것 같다 마을 집들엔 감꽃이 눈처럼 떨어지고 맨드라미 몇 포기 그만, 그만 하듯이 흔들린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대수로운 것이냐 하면서 나는 바람 쪽으로 돌아 앉는다 삶 속에는 왜 그런가요? 물을 수 없는 것, 그런 것이 있다 말벌에 쏘인 듯 살갗이 아프다 직소포에 들다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 왔다 ..

흔해빠진 독서 /기형도

흔해빠진 독서 기형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

새해의 기도/ 이성선

새해의 기도 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이성선 시선집』. (시와시학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