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253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여진 꿈 / 허수경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여진 꿈 허수경 포도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언덕을 넘어가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태양이 저 너머로 무한의 순간을 내미는 7월의 저녁이었다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 그리고 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아, 말의 귀에는 여름 들판의 늦은 야생 양귀비꽃이 꽂혀있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녀에게 길을 물었다 여기, 저 검은 숲으로 둘러싼 마을이 있다는데요, 어디인지요? 소녀는 양귀비꽃이 꽂혀있는 말의 귀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오래 전에 사라진 마을이에요 마을 학교도 교회도 시청도 시민회관도 여관도 도서관도 아주 오래 전에 사라진 마을이에요 숲도 사라졌고요 소녀와 말이 사라지는데 태양이 거느린 새떼가 붉은 바람을 물고 날아올랐다 포도나무 사이로 한 노인..

기운다는 것 /황순원

기운다는 것 황순원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졌지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별로 기운 것 같이 않기도 하고 아주 기울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기도 하다 내 시각에 의하면 피사의 사탑을 보기 전 이미 거쳐온 밀라노도 기울었고 피사의 사탑을 보고 난 뒤 거친 로마도 플로렌스도 베니스도 다 기울어 있었다 그래도 밀라노는 스칼라 오페라하우스가 버티고 있고 로마는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플로렌스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버티고 있지만 베니스만은 버티고 있는 것이 없었다 베니스 공화국의 화려했던 궁전도 거기 붙어 있는 마르크 성당도 이를 버틸 힘이 없었다 그대여 그대의 시각에 나는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가 아무리 위태롭게 기울었다 해도 버텨줄 생각일랑 제발 말아다오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하는 것 그저 보아다오 언제고 ..

나는 네 모습을 기억한다/ 네루다

나는 네 모습을 기억한다 파블로 네루다 나는 지난 가을의 네 모습을 기억한다. 너는 회색 베레요 조용한 가슴이었다. 네 눈 속에서 황혼의 불꽃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뭇잎은 네 영혼의 물에 떨어졌다. 기어오르는 식물처럼 내 팔을 끼고 이파리들은 느리고 평화로운 네 목소리를 거두었다. 내 갈증이 타고 있는 경외(敬畏)의 모닥불, 감미로운 푸른 히아신스가 내 영혼을 감아 붙였다. 나는 네 눈이 여행하는 걸 느끼고, 가을은 시방 아득하다: 회색베레, 새의 목소리, 내 깊은 그리움이 이주하는 집과 같은 가슴 그리고 내 키스는 떨어진다, 잔화(殘火)처럼 행복하게 배에서 보는 하늘.언덕에서 바라보는 들판: 너를 생각하면 기억나느니 빛과 연기와 고요한 연못! 네 두 눈 너머, 저 멀리, 저녁은 타오르고 있었다...

릴케의 시를 읽다

정적 내가 손을 듭니다. 임이시여- 나의 소리를 들으십니까...... 고독한 사람의 어느 몸짓인들 그 많은 사물들이 듣지 않겠습니까? 임이시여, 내가 눈을 감습니다. 당신에게 이르는 그 소리를 들으십니까. 다시 뜨는 그 소리가 들리십니까...... 그런데 당신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가장 나직한 내 움직임의 자국이 비단 같은 정적 속에서 새겨졌습니다. 먼 곳의 팽팽한 커튼에 분명하게 조그만 흔들림이 자리를 남기고 있습니다. 나의 호흡을 따라 떴다가 가라앉는 별들의 무리. 나의 입술엔 향기가 젖어 들며, 멀리에 있는 천사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당신만이 나에겐 보이지 않습니다. -『형상시집』 P108 진보 이제 더 넓은 해안을 걸어가듯다시금 내 깊은 생명이 요동한다.사물들이 차차 다..

강설/ 허연

강설 허연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强雪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럼 서 있다. 선명해지 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고장 난 채로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 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아 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꾸만 강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 는지, 너는 왜 하얗기만 한지 아프지 말라고 아프지 말고 살아서 말해 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이십 년이 걸린다..

순수의 전조/ W.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윌리엄 블레이크(1757~ 1827)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린다.여기저기를 헤매는 들사슴은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준다.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그렇게 되는 일은 올바른 일이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세..

시가 막 밀려오는데/ 정현종

시가 막 밀려오는데 정현종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 지구라는 이 알이 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 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 그 빛이 만드는 웃고 있는 무한- 아주 눈 속에 들어 있는 그 무한 온몸을 물들이는 그 무한,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 (쓰지 않으면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없는지) 잠의 품속에서도 알은 부화한다는 것인지) -『광희의 속삭임』,(2008, 문학과지성사)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견딜수 없네』,( 2003, 시와시학사) ○작가 소개 鄭玄宗은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인.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

시학습/ 김남조

시학습 김남조 나의 시는 애벌레들의 비애와 그 생존의 지혜를 모른다 나의 시는 격심한 아픔의 체험이 없고 단두대에 선 사형수의 심정을 모른다 나의 시는 고뇌와 탐색이 부족하고 나의 시는 감상과 회고주의에 부침하여 세계와 미래에 관해 무지무능하다 고작 부족하다 부족하다고, 자주 탄식한다. -『충만한 사랑』,(2017, 열화당) (작은노트) 올해 92세이신 김남조 선생님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사유의 늪 속을 헤맬 때 깊은 위로와 힘을 얻게 된다. 뜻이 보이는 듯 하여 다가서면, 눈앞에서 금방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처럼, 허공을 만진 듯 잡히지 않을 때, 시를 왜 쓰는가에 대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