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빛과 그리고 그림자
19~20세기 인상파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는 주요 작품으로 <인상, 해돋이>와 <파라솔을 든 여인>과 <수련> 연작. 인상파 또는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그 이름 또한 모네의 작품인 <인상, 해돋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어려서 바닷가 마을 생트아드레스에서 자라면서 자연과 빛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화풍은 스승 외젠 부댕과 바르비종파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인상파가 대두했던 1870년대에는 자연광과 야외 생활의 움직임을 즉흥적이고 간결하게 해석하여 화폭에 담았다. 1890년대부터는 빛과 기후 조건을 달리해 같은 주제를 되풀이 하는 연작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카미유 피사로, 프레데리크 바지유,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과 인상주의를 발전시켰다.
빛을 동경하고 사랑해서 풍경화 대신 빛을 그린 화가가 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이 빛을 그리며 그림자도 함께 그린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다. 그래서 그를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라 부른다.
그의 그림에 찬란한 빛과 어두운 그림자의 두 본질이 병치하듯, 어느 삶이든 두 본질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모네는 마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이다. 두 사람은 ‘마네모네’라 붙여서 불릴 만큼 친근했다. 마네가 순간적인 인상을 예리하게 그린 화가라면, 모네는 빛의 작용에 사물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모습을 ‘색깔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모네는 마흔세 살의 나이에 뒤늦게 집을 장만했다. 어렵게 마련한 집에서 인생 마지막을 보낼 때까지 30년 동안 그는 쉬지 않고 빛을 그렸다. 집을 사랑했던 그는 연못을 직접 꾸미고 일본식 다리도 놓은 후, 〈흰색 수련 연못〉을 그린다. 그림의 주인공이 ‘수련’인 것 같지만, 실제는 하늘과 구름을 품은 ‘연못’이다. 각도에 따라 연못에 달리 비치는 자연광과 조용한 수면에 떠도는 구름과 흔들거리는 버드나무 가지의 그림자가 어우러지는 그림이다.그 사이로 꽃을 피운 수련은 이른 아침 햇빛을 머금고 있는 호수의 엷은 안개 너머로 환히 피어 있다.
○고유한 빛깔이란 처음부터 없었다
르네상스의 15세기부터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지나며 작가들은 하나같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물체를 관찰했다. 그러면서도 야외 풍경화는 그리지 않았다. 19세기 이전까지의 풍경화란 주로 신화의 목가적 배경이나 이상적 전원생활 등이었다. 오래된 성터에는 황혼의 빛이 흐르고 그 안에 피리 부는 목동이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야외 풍경화를 무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인상파들뿐이었다.
모네가 태어난 다음 해인 1841년, 영국에 거주한 미국화가 존 랜드가 튜브물감을 발견하면서 야외 그림은 더욱 쉽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돼지 방광에 유화물감을 넣어 사용했다.
튜브물감과 함께 어두운 실내를 벗어나 자연으로 간 모네는 모든 물체에 고유한 색이란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빛의 작용을 받아 색이 변하는 자연에 고유한 빛깔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랗고 초원이 푸르다는 것은 고정관념일 뿐이었다.
모든 사물은 미묘한 빛의 변화에 서로 다른 빛깔이 된다. 석양빛을 받으면 풀잎도 붉어질 수 있다.
모네는 주저 없이 물체에서 반사해 나오는 빛의 작용을 색깔의 세계로 전환해 화폭에 담았다. 물체로부터 빛이 튕겨 나오는 그 순간, 그 빛깔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빛이 연출하는 ‘찰나의 미학’에 모네는 빠져들었다. 더 많은 자연을 보며 빛의 영감을 얻고자 모네는 1886년 풍차와 튤립의 나라 네덜란드로 갔다.
넓은 벌판에 튤립꽃밭이 끝없이 펼쳐있고 그 가운데 풍차가 우뚝 솟은 것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스케치하고 귀국해 〈네덜란드의 튤립〉을 그렸다. 광야에 이는 바람이 풍차를 흔들고 튤립에 파문을 일으키는 순간을 묘사했다. 모네의 그림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도 그렇다. 모네의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Jean)이 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핀 들판의 나지막한 언덕길을 걷고 있다. 바람 스치듯 걷고 있는 모자의 허허로운 한 찰나가 화려한 적색과 녹색으로 화폭에 찍어 넣듯 담겼다.
빛과 그림자의 순간을 그리려면 카메라 렌즈처럼 순간적으로 대상의 색채와 모양을 파악해야 한다. 마네는 자신의 영원한 모델 카미유와도 빛처럼 만나고 그림자처럼 헤어진다.
○가난한 화가와 가난한 모델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무렵 항구 도시 르 아브르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수평선의 구름과 햇살에 반짝이는 파도, 바위에 깨지는 하얀 포말,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열다섯 살에는 돛단배를 스케치하고, 풍자만화도 그리면서 돈을 벌기도 했다. 열여덟 살이 되자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파리로 나갔다. 당시 보통 화가들은 전형적 코스인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모네는 달랐다. 그는 진보적 예술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에게서 전통과 거리가 먼 화풍을 배웠지만, 주류 매체와 미술계의 혹평을 들어야 했다.
이 무렵 힘겨운 화가의 길을 걸어가던 그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여인이 등장한다. 1865년, 자신의 그림 모델을 찾다 만나게 된 카미유 동시유(Camille Doncieux, 1847~1879)였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카미유는 가난한 모델이었다. 스물다섯 살의 모네 역시 가난할 뿐 아니라 주류화단에서 배척까지 받고 있던 앞날이 보이지 않는 화가였다. 두 사람은 묘한 동질감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깊은 슬픔이 배어나는 카미유의 눈빛은 모네의 마음을 흔들었다. 매사에 차분하고 온화한 카미유에게 모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된 모네는 드디어 청혼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된다.
당시는 모델을 창녀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던 때였다. 모네가 카미유와 함께 사는 것을 알게 된 모네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런데도 카미유가 아이를 가지게 되자 그나마 보내주던 생활비마저 끊어 버렸다. 모네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하얀 옷을 하얗다고 믿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모네의 그림은 인기가 없었다. 흰옷이 빛에 따라 다른 색조를 띨 수 있다는 모네의 그림을 이해되지 않았다.
붓이나 물감조차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등잔불에 켤 석유도 하루 먹을 양식도 걱정해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물감이 떨어지면 그리던 그림을 중단하고 돈을 모았다. 먹지 못한 카미유는 젖이 나오지 않아 구걸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세상은 두 사람에게 차가웠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다독이며 그 안에서 만족했다. 그러면서 물질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카미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굳센 예술적 신념이 잘 드러나는 〈빌 다브레 정원에 있는 여인들(Women in the Garden)〉이 탄생한다.
그림 속엔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의 뜨락에서 꽃을 꺾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네 명의 여인은 모두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포즈를 잡은 카미유였다. 그림 구도는 앉아 있는 여인의 무릎을 중심으로 연속적인 타원형이다. 오솔길과 여인들의 흰 치마폭 위로 화사한 햇살이 쏟아지는데 나무의 그림자가 엷게 배여있다. 모네는 궁핍했지만, 그림자와 대비되는 밝은 빛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그려냈다.
높이 2.5미터가 넘는 대작은 완성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윗부분을 그릴 때는 뜰에 도랑을 파고 이젤을 그 아래로 내린 체 그림을 그렸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67년, 캔버스에 유채, 25.5×20.5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그 이듬해 모네는 다시 카미유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달랠 겸, 아버지가 모델인 〈생타드레스(Sainte-Adresse)의 정원〉을 그렸다.
항구도시 르 아브르 부근의 바다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 속에는 두 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가운데 남녀가 서 있다. 그 앞에 앉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의 시선이 사각 정원에 대각선으로 향해 있다. 그 시선은 두 남녀를 비켜 수평선 멀리에 떠 있는 범선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이 원근법을 무시한 대표적 작품이다. 생활고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 모네의 아방가르드한 패기를 보여 주고 있다.
○힘든 결혼생활과 해돋이
가난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가던 모네였지만, 카미유의 잦은 병치레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린 자식을 볼 때마다 너무 예뻐 세상 시름이 모두 사라진다네. 하지만 쇠골이 피접한 카미유를 볼 때마다 내가 큰 죄를 짓는 것만 같네. 죽을 맛이네”라며 자신의 심정을 자주 털어놓기도 했다.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그리는 남편 덕에 카미유는 남편의 모델이 되는 틈틈이 어린 장을 업고 빚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집세를 낼 여유가 없자 주인이 모네의 그림까지 압수해갔다.
그러다가 아이가 아파도 약조차 사 줄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보고 사랑만 먹고는 살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프랑스 정부가 후원하는 살롱전에 참가를 결심한다. 이전에도 출전할 때마다 낙선의 아픔을 안겨주는 바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살롱전이었다. 하지만 화가의 명성과 수입을 올리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1868년, 바닷가 풍경화를 그려 드디어 살롱전에 입상했다. 그러나 살림살이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 일은 더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친구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다 못한 에밀 졸라가 바지유 등 동료 화가를 비롯한 후원자들을 모아 센 강 부근에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얻어주었다. 르누아르는 젊은 귀족 부인인 고디베르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모네는 스물두 살 젊은 부인의 초상화를 최대한 우아하게 그려냈다. 부인의 심리적 묘사를 최대한 자제하기 위해 부인이 옆으로 서서 고개를 살짝 돌리게 했다. 그리고 인물보다 의상을 더 세심히 그렸다. 그림에 만족한 부인이 거금을 내놓으면서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가난은 계속되었지만, 모네의 가족은 행복했다. 카미유는 어린 장을 키우며 저녁이면 등불을 켜서 남편의 귀갓길을 밝혔다.
모네도 쑥쑥 크고 있는 아들을 보며 삶의 환희를 누렸다. 이 시기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를 〈초록 드레스의 여인〉에 담았다.
짙은 녹색 치마에 검은 모피(毛皮) 코트를 입고 걷는 순간을 포착했다. 이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관객들은 마네의 작품으로 알고 마네에게 ‘멋진 그림’이라며 축하했다. 모네는 자기 그림도 몰라본다며 관객들에게 불평한다. 그때부터 서먹한 관계가 된 두 사람은 1869년 바티뇰의 한 카페에서 만나 정식으로 인사한 뒤 좋은 친구가 된다.
모네는 부모를 설득해 1870년 6월 28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며칠 뒤 보불전쟁이 터지자 영국으로 피신했다.
안개 낀 런던은 모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파리로 돌아와 1874년 4월 15일부터 열린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를 내놓았다. 이 전람회 명칭은 원래 ‘무명예술가 협회가 연 협회전’이었다.
주도의 살롱전에 대항하여 무명예술가 협회가 협회 소속의 화가 30여 명을 모아 개최한 전시회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상파라는 이름은 붙지 않았다. 모네는 ‘해돋이’ 작품에 ‘인상’이라는 단어 하나를 더 붙여 전시했다.
한 미술 담당 기자가 이 협회전을 둘러보고 비난과 조소가 가득한 기사를 쓰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전람회’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때부터 그들을 지칭하는 말로 ‘인상파’라는 악명이 만들어졌고,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지금은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풍의 화가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지 않고 색별로 점을 찍어 그린 안개 자욱한 해돋이 풍경은 모든 형태가 희미해 미완성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성하기까지 해 존엄한 감동을 준다. 마치 천지가 처음 열린 그 첫새벽처럼.
해는 순결한 처녀처럼 매번 새롭게 하루를 연다. 순간 해면과 배와 사공, 구름과 하늘이 함께 되살아나는 것이다.
○정거장, 그것은 인생
언론이 〈인상: 해돋이〉를 조롱하는 바람에 악명이 드높아질 무렵, 오히려 모네의 작품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팔리기 시작한다. 당시 파리는 일본 문화가 소개되면서 일본 열풍이 불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유럽에 들어온 일본 상품들의 포장지가 인상파 화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모네 역시 일본 열병을 앓으면서 카미유에게 기모노를 입힌 뒤 〈일본 옷을 입은 마담 모네〉라는 그림을 그린다. 금발의 카미유와 화려한 기모노는 잘 어울렸다. 부채를 들고 있는 카미유 뒤로는 여러 종류의 부채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그림이 팔리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그림 안에 들어갈 소품들을 마련할 수 있은 여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모네는 기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 기차역은 사람과 물건을 싣고 내리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였고 문명의 상징이었다.
모네는 아예 생 라자르 역 근처에 방을 얻고 오가는 기차를 상세히 관찰하며 〈파리의 생 라자르 역〉을 그린다.
푸른 증기를 내 뿜는 기차가 유리지붕을 받치고 있는 삼각형 철골사이로 서서히 들어온다. 이미 들어와 정지해 있는 기차와 막 들어온 기차의 수증기 뒤로 역 건물들이 보인다. 햇빛이 유리 지붕과 창문, 탁 트인 철골구조문의 입구를 통해 쏟아지며 무수한 음영(陰影)을 만들고 있다. 모네는 이 음영을 여러 색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역 안과 밖에 작고 희미한 사람들을 통해 몽환적인 장면들을 완성해냈다.
모네는 이 그림을 통해서 쓸쓸함과 몽환적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기차역이 이별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네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카미유와의 이별을 예감한다.
1878년, 둘째 아들 미셸(Michel)을 낳은 카미유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진단을 받아보니 자궁암이었다. 남편이 기차역을 그리는 동안 카미유는 이 사실을 숨겼다. 모네는 자기의 무명 시절을 함께한 아내가 작품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방해하지 않으려 병을 감추다가 끝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그런 아내를 모네는 그저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죽는 그날까지 손을 붙잡아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카미유의 임종 때가 되자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양산을 든 카미유
카미유가 떠난 날, 모네가 한 친구에게 돈을 주며 부탁했다. 양식이 없어 저당 잡힌 메달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 메달은 유일하게 부부가 함께 지녔던 것이었다. 모네는 그 메달을 아내의 목에 걸어주고 영원히 이별하는 길로 떠나는 아내 옆에 〈양산을 쓰고 왼쪽으로 몸을 돌린 여인〉이라는 그림을 세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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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31×88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시대와 불화하며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작품을 내놓느라 가난하게 살았던 젊은 시절, 일부러 어둠 속에서 헤매던 시절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준 한 줄기 빛과 같은 여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이제 겨우 화가로서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어둠 속 그림자로 묻히고 말았다.
카미유를 떠나보낸 뒤 모네는 풍경화에 매달린다. 둘째 아들이 태어날 무렵부터 카미유의 몸이 허약해져 갔다. 그런 카미유를 보낸 뒤, 모네는 오래 같이 지낼 수 없는 안타까움을 그림 속에 담았는데, 그것이 〈파라솔을 든 여인-카미유와 장〉이다.
병약한 아내와 아들을 바람 부는 언덕에 세웠다. 마침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바다의 용오름처럼 펼쳐있다. 카미유와 아들 장이 서 있다. 카미유는 꼭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려는 사람만 같다.
뒤돌아보는 카미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헐렁한 하얀 드레스도 바람에 휘감기고 있다. 그녀가 든 파란 우산과 파란 스카프만 안정적이라 곧바로 하늘로 들려 올라 갈 것만 같다. 카미유의 얼굴도, 아들 장의 얼굴도 모호하다. 단지 언덕에 굳건하게 서 있는 장의 눈동자만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다. 오히려 두 사람의 발아래 풀들이 빛의 음영을 따라 비교적 세밀하다.
카미유가 땅에 묻힌 후 화실에 홀로 앉아 그린 그림이 〈임종을 맞은 카미유〉이다.
오른쪽 창문에서 카미유의 얼굴에 부서지는 햇살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 변화를 감지하여 황금 빛깔로 표현했다. 빛도 찰나이고, 사랑도 예술도 인생도 찰나이다. 이 세상에 찰나가 아닌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카미유는 결혼 10년 만에 모네 곁을 떠났다. 카미유를 보내고 13년이 지난 1892년이 되어서야 모네는 알리스 오셰데(Alice Hoschedé)라는 여인과 재혼한다.
○글: 이동연
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대화의 연금술》을 비롯해 《통하는 대화법》, 《소비 트렌드》, 《리더십 불변의 법칙》, 《최고 마케팅 경영자 예수》, 《CEO형 인재》, 《해체냐 해탈이냐》,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두 개의 길 하나의 생각》, 《바루나-포용의 신화를 찾아서》, 《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과 중국에 수출된 《행복한 수면법》 등이 있다
-출처: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