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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이야기

클라라 슈만(1819~1896)

금동원(琴東媛) 2015. 4. 24. 11:11

음악

 

천상병

 

 

이것은 무슨 음악이지요? 새벽녘 머리맡에 와서 속삭이는 그윽한 소리.

눈물 뿌리며 옛날에 듣던 이 곡의 작곡가는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갔지요?

아마 그 여자의 이름은 클라라일 겝니다. 그의 스승의 아내였지요?

백년 이백 년 세월은 흘러도 그의 사랑은 아직 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녘 멀고 먼 나라 엉망진창인 이 파락호의 가슴에까지 와서 울고 있지요?

 

-시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미래사, 1991)

 

 

Amadeus Quartet - Brahms, String Sextet No.1 2nd movement 'Andante ma moderato'

Amadeus Quartet

Norbert Brainin, 1st violin,

Siegmund Nissel, 2nd violin,

Peter Schidlof, 1st viola

Martin Lovett, 1st cello

(with )

Cecil Aronowitz, 2nd viola

William Pleeth, 2nd cello

1966.12

'브람스의 눈물'이란 부제로 유명한 2악장입니다.

 

[지폐인물열전](23)클라라 슈만(1819~1896)…음악에의 열정을 불태운 세기의 여인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 goodpark@kyunghyang.com


브람스가 평생 가슴에만 품고 살았던 여인, 클라라 슈만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내가 진정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이 오늘 땅에 묻혔다.”

1896년 5월20일, 독일이 낳은 악성(樂聖)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는 슈만의 아내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이 사망하자 충격과 비탄에 휩싸였다. 세상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위안도 평생 한 여인을 사랑했으되 애틋한 감정을 가슴 속에만 품고 살아야 했던 브람스의 애절한 슬픔을 치유해줄 수 없었다. 그만큼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소중한, 너무나도 소중했던 여인이었다.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까지 독일에서 통용됐던 100마르크 지폐 앞면에 실린 클라라 슈만의 초상화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었던 클라라를 향한 사랑을 마음속에만 고이 간직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자 그녀를 위해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하고 1년 뒤인 1897년 클라라가 있는 하늘나라로 갔다.

브람스의 영혼을 사로잡은 여인 클라라는 1819년 라이프치히에서 당대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비크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못지않게 클라라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9살 때인 1828년 라이프치히의 게반트 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진 이후 해외 연주회만 38회를 열 정도였다.

리스트는 클라라를 ‘천재소녀’로 불렀으며 괴테, 파가니니, 멘델스존 등 많은 예술가들은 클라라의 열렬한 팬이 돼 후원을 자처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가가 된 딸을 늘 대견스러워 했던 아버지 비크는 그녀를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키우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비크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비크의 제자 중에는 낭만파 음악의 선구자인 로베르트 슈만이 있었다. 슈만은 약지의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못해 끈에 손가락을 매달아 피아노를 치는 특이한 방법을 고안할 정도로 집요하게 연습에 매달리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무리한 연습이 오히려 화가 돼 여러 차례 손이 마비되기도 했다.

비크 집에서 하숙을 하던 슈만은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 할 약속을 하지만 비크는 피아니스트의 생명이랄 수 있는 손이 성치 않은데다 장래도 불투명한 제자 슈만에게 딸을 절대로 줄 수 없다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18세, 슈만은 그보다 9살 많은 27세였다.

비크의 반대를 꺾지 못한 두 사람은 결국 법정에까지 갔다. 법정은 슈만과 클라라의 손을 들어줬고, 두 사람은 1840년 결혼했다. 부모보다 사랑을 택했지만 피아니스트로의 꿈을 키워갔던 클라라로서는 결혼이 되레 장애물이 됐다. 클라라는 남편 슈만의 작곡에 방해가 될 것을 걱정해 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 클라라는 집안 일에 파묻혀 음악과 멀어지는 사이 6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한 브람스(왼쪽)와 클라라 슈만을 묘사한 그림



■브람스와 클라라, 40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사랑의 감정 키워…클라라가 사망한지 1년 뒤 브람스도 세상떠나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인 1853년 9월이었다. 당시 무명의 피아니스트였던 브람스는 친구 요하임의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의 집을 방문한다. 브람스는 함부르크에서 연주회를 가진 뒤 슈만에게 작품을 우편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슈만은 브람스의 작품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되돌려보냈고, 브람스는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요하임은 “슈만만큼 걸출한 음악가는 없다. 슈만을 꼭 만나야 한다”며 친구 브람스의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한 브람스는 슈만의 작품에 빠져들게 됐고, 용기를 내 슈만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슈만과 클라라는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본 뒤 깊은 감명을 받는다. 슈만은 브람스를 자기가 발간하던 음악잡지에 크게 소개해 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슈만은 특히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브람스를 ‘시대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격찬했다.

2개월여 동안 슈만의 집에 머물던 브람스는 당시 14살 연상이었던 클라라의 미모와 재능에 매료됐다. 존경심에서 비롯된 클라라를 향한 마음은 어느새 사랑으로 훌쩍 자라버렸다. 물론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키우기에는 현실적인 장애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음악계의 대선배인 슈만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의 죄악’을 짓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있는 못을 숨길 수 없듯이, 클라라를 향한 사랑은 자신도 모르게 커져만 갔다. 브람스는 “클라라는 슈만의 부인이다. 존경심이 사랑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일렀다. 브람스는 <피아노 소나타 작품2>를 클라라에게 헌정하고, 오로지 창작에만 매진하려 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슈만이 1853년 라인 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브람스는 한 걸음에 달려가 극진하게 간호한다. 이듬해 3월 슈만은 정신요양원으로 옮겨졌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절망의 늪’에서 구해내려 혼신의 힘을 쏟는다. 7번째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피아노 3중주곡 제1번>을 들려주고, 아이가 태어나자 <슈만을 위한 변주곡>을 작곡했다. 1855년 가을 브람스는 클라라, 요하임과 함께 3인 합동 연주회를 연다. 정신요양원에 있는 슈만을 돕기 위한 연주회였다.

이 무렵 브람스와 클라라 사이에 편지 교환이 시작된다.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그후 40년이나 계속됐다.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쓴 첫 편지에서의 호칭은 ‘경애하는 부인’이었다. 그 뒤 ‘나의 클라라에게’, ‘당신’으로 변해갔다. 브람스는 가끔씩 편지에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클라라는 매정하게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고, 오직 ‘모성적 우정’만을 나눌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하지만 클라라도 자신의 삶에서 브람스가 점점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큰 사랑이 없었다면 단 한순간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사랑의 고통은 브람스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그는 불쑥불쑥 치솟는 사랑의 감정과 냉철한 이성 사이에서 번민해야 했다. 당시 브람스의 심경은 1854년 말에 작곡한 어둡고 열정적인 발라드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브람스는 당시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를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려는 한 남자를 상상해본 적이 있나?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누려 하는 것은 그에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1856년 7월 정신요양원에 머물고 있던 슈만은 끝내 눈을 감았다. 슈만이 사망한 뒤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 양육과 남편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클라라는 슈만의 <사랑의 봄에서 딴 12시(詩)>의 제2, 제44, 제11곡을 작곡하는가 하면 슈만의 사진집과 작품전집을 편집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또 프랑크푸르트 음악학교 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브람스는 슈만이 사망한 뒤 ‘죽음과 부활’의 문제에 집착하다 ‘현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며 독일 레퀴엠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라면 브람스가 구현하려 했던 레퀴엠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클라라를 위한 레퀴엠이었던 셈이다.

클라라는 남편이 죽은 뒤 40년을 더 살았다. 남편 슈만의 죽음이 클라라에게 큰 슬픔을 던져준 것은 사실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슈만의 죽음은 클라라가 피아니스트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클라라는 결혼생활동안 소홀히했던 피아니스트로 돌아와 정열적인 연주활동을 했고, ‘리스트에 견줄 만한 명연주자’라는 평을 듣게 됐다.

 

클라라는 1896년 초 바드이슐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클라라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직감한 브람스는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짓기 시작해 그해 5월7일 완성했다. 클라라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곡들이었다. 클라라가 사망한 지 꼭 1년째 되던 날 브람스는 세상을 떠났다. 주위 사람들은 “브람스가 평생토록 흠모했던 여인 클라라를 따라 하늘나라로 갔다”며 안타까워했다.

평생 슈만의 그늘 밑에서 살았지만, 브람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은 여인, 그가 바로 클라라였다.

http://bizn.khan.co.kr/khan_art_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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