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詩 이모저모 99

질문을 닦다/ 김향숙

질문을 닦다 김향숙 질문을 손에 쥐고 한참 만지작거린다 이쪽저쪽 섞어가며 갸우뚱거려도 중심이 서지 않는다 눈알을 좌우로 굴려도 자꾸만 넘어지려 한다 질의는 섣부르고 답변은 성급하다 어눌한 부위에서 넘어질 뻔했고 약삭빠른 부위에서는 기어이 넘어졌다 그때마다 일어선 것은 태도가 아니라 마음 다시 질문을 펴보기 위해서였다 돌멩이에 질문을 하면 퐁당 소리를 들려주거나 동그란 파문을 보여 준다 제약 없는 질문의 경우 제한 시간의 독촉이 있다 정답과 오답을 옮겨다니는 설문과 달리 대답의 한 짝은 왼발 오른발처럼 어색하고도 익숙했다 안경알을 닦듯 닦다 보면 초침을 끌고 다니는 질문의 일생이 보였다 의문만 모아 파는 책의 뒷편에는 대답만 모아놓은 별책 부록이 달려 있어 정답을 알게 되는 일은 질문을 통해 대답을 배운다..

詩 이모저모 2023.10.10

裝飾論/ 홍윤숙

장식론(裝飾論)1 女子가 장식(裝飾)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같다든가 「뛰는 생선(生鮮) 」같다든가 (진부(陳腐)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 만도 빛나는 장식(裝飾)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 보면 쇼우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裝飾)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生活의 의상(衣裳)들은 무엇일까 안개같은 피곤(痴因)으로 門을 연다 피하듯 숨어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滿發)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裝飾)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낙엽(落葉)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紫水晶)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장식론(裝飾論)..

詩 이모저모 2023.02.21

문학은 사랑이다/ 김주연

문학은 사랑이다 김주연(문학평론가) 사랑이라는 말이 귀청을 시끄럽게 때린다. 언제부터인가 장안이 온통 트로트 열풍인데, 그 열풍을 생산, 유통시키고 있는 기관이 티비와 유투브 등의 방송이어서 이들과 단절되지 않는 한 이 열풍을 피할 길이 없다. 문제는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제품들인데 이 단어는 인근 영화, 연극등의 장르와 더불어 우리의 감각을 완전히 장악하고 휘저으면서 흘러간다. '사랑'의 압도적인 위세는 오로지 이러한 대중매체로부터 침투해 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디 다른 곳이 있겠는가. '사랑'의 표방은 교회로부터도 사찰로부터도 온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설교를 듣고 '사랑'의 감화를 받고 흡족한 모습으로 귀가한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사랑으로 충만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

詩 이모저모 2023.02.11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정현종

녹아들다 정현종 녹아들지 않으면 그럴듯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마음은 특히 그렇다.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녹아들지 않으면 마음은 필경 삶의 전부인 저 진실의 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 없으면 삶은 깡그리 허탕이다. 녹는 일에는 물과 가름과 바람이 있고 살과 피와 무슨 그런 게 있지만 그러나 마음이 녹아들지 않으면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세계는 잿더미요 삶은 쓰레기 더미이다. 산책 산책을 한다. 그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니고 그 공간은 고해 苦海를 벗어나 있다 세계는 푸른 하늘까지 숨결은 대기 속에...... 그렇게 가없는 몸이여. 이 단순한 활동은 얼마나 풍부한가.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듯한 시간이라니! 사물사물하는 보석, 이 ..

詩 이모저모 2023.01.15

평론 ‘행동하는 비인간들의 힘 : 임승유론’ 황사랑

신춘문예 - 평론 [2023 신년특집] 기사입력 2023-01-01 21:34:46 기사수정 2023-01-01 21:34:46 ‘행동하는 비인간들의 힘 : 임승유론’ 황사랑 이 세계의 거주자들, 온갖 종류의 창조물들, 인간과 비인간은 모두 나그네이다. 1) 1. 재난 속에 있는 지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는 수십 년 내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난이 일상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2) 지구의 기온 상승은 곡물의 성장을 방해하여 곡물 수확량의 감소와 그로 인한 빈곤을 불러올 것이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열대 지방 모기의 영역 확장은 유해 바이러스의 전파로 이어지게 된다. 기후변화가 불러올 농업과 경제의 불안정함은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지며 국가 간의 분쟁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그러나..

詩 이모저모 2023.01.02

한 줄도 너무 길다

《한 줄도 너무 길다》 -류시화 편역 | 이레 | ◎책 속으로 하룻밤 재워주고 한끼 밥을 사준 사람에 대해선 절대 당연히 여기지 말라, 사람들에게 아첨하지도 말라,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천한자이다. 하이쿠의 길을 걷는 자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저녁에 생각하고 아침에 생각하라, 하루가 시작될 무렵과 끝날 무렵에는 여행을 중단하라, 다른 사람에게 수고를 끼치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들이 멀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들의 이러한 철저한 방랑은 현대 시인 나나오 사카키에게도 이어졌다.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는 유럽, 한국, 중국, 미국, 호주, 스리랑카 등지를 걸어서 여행하며 일본어와 영어로 시를 썼다. 굳이 하이진들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인생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것이며, 온갖 부조리한..

詩 이모저모 2022.08.28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김혜순 저 | 문학과지성사 “모래의 시간은 늘 이별이야” 지배적 언어에 맞서는 몸의 언어로 한국 현대시의 미학을 갱신해온 ‘시인들의 시인’, 김혜순의 열네번째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567으로 출간되었다.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에서 김혜순은 세상의 죽음을 탄식한다. 1부는 시인의 ‘엄마’가 아플 때와 돌아가신 후에 죽음을 맴돌며 적은 비탄의 시들이다. 2부에는 코로나19라는 전 인류적 재난을 맞이한 시대적 절망이, 3부에는 죽음의 바깥에서 텅 빈 사막을 헤맨 기록이 담겼다. 시인은 사적으로 경험한 병과 죽음을 투과하여 세상의 죽음을, 그 낱낱의 죽음에 숨겨진 비탄 하나하나를 바라본다. 비탄의 연대를 도모하면서 모래처럼..

詩 이모저모 2022.08.08

이 시대의 아벨 / 고정희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가 높으면 높을 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사랑법 세째 제가 제 살 찌르지 못하는 법 이리 와요 제가 제 절망 찌르지 못하는 법 이리 와요 제가 제 아픔 자르지 못하는 법 이리 와요 제가 제 죽음 죽이지 못하는 법 이리 와요 제가 제 사랑 이기지 못하는 법 이리 와요 이리 와요 곪은 살일수록 깊이 들어가는 가시 탱자나무 가시 받아요 확실한 것을 우린 죽여야 해..

詩 이모저모 2022.06.29

연인들 / 최승자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최승자 ​ ​ 창문 밖, 사막, 바라보고 있다. 내세의 모래 언덕들,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 창가에서 이 십 년 전쯤 처음 만났던 노래를 들으며 찻잔을 홀짝이다가, 나는 결정한다. 이제껏 내가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을 이제 결정적으로 밟아버리겠다고 한때는 그것들이 날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이제 안다. 그 슬픔들은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 그러나 대책 없는 픽션이었고, 연결되지 않는 숏 스토리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저 창 밖 풍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 눈먼 하늘의 흰자위, 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 -《연인들》, (1999, 문학동네) ○책 속으로 책속에서 누가..

詩 이모저모 2022.04.15

죽마고우/ 강우식

《죽마고우》 -강우식/ 리토피아 지은이로부터.1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죽음만이 죽마고우가 아니라 詩도 죽마고우였다. 이승에서 배운 게 마음도둑질이라고 시를 팔아 입에 풀칠해 왔다. 그러면서도 늘 시쟁이라고 손가락질만 받아왔으니 걸어온 발이 부끄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저승에 가서도 시를 쓰겠다는 일념뿐이다. -2022년 2월 봄을 기다리며 水兄散人 강우식 ○시 속으로 죽마고우 竹馬故友 젊었을 때는 곁에 말 걸 상대라도 없으면 세상 혼자 떨어져 사는 거 같아 싫었다. 그것보다는 늙으면 더 외롭다 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다. 늘 곁에 누군가 잇는 것 같다. 둘러보니 없긴 없는데 있는 것 같다. 가만히 보니 죽음이다. 당연히 죽음이 날 데려 갈 테니 외톨이로 살아 고독하여도 두렵지 않다. 왜 ..

詩 이모저모 2022.03.11

평론 ‘허수경 후기시론―자연의 고아, 시간의 낙과, 우주의 난민’

자연의 고아, 시간의 낙과, 우주의 난민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중심으로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소감-육호수 심사평-김주연 문학평론가 허수경의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까지의 긴 여로를 몇 줄의 문장으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시의 시작점이자 모어였던 진주를 고향이라는 그리움에게 물려줄 때까지, 전 세계의 폐허를 전전하며 발굴해낸 무수한 고향들을 다시 자연이라는 아득함에게 돌려줄 때까지, 허수경은 지난한 시적 변모의 과정을 감행해 왔다. 제1시집 당시, 동시대 독자에게 ‘주모적 여성’으로 이해될 때 모두 해명되지 않던 “아낙들의 눈물”(「남강시편3」)이 제5시집에서 “나의 어머니는 꼬치구이였다”(「카라쿨양의 에세이」)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13페이지의 장시로..

詩 이모저모 202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