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내 마음 속 영원한 순수의 소나기】
순수한 첫사랑의 상징,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 탄생 100주년(2015년)을 맞았다.
시골 소년 소녀의, 사랑이라 말하기엔 너무 풋풋한 감정의 일렁임과 순식간에 꺼져 버린 짧은 삶을 투명하고 아릿하게 그려낸 「소나기」는, ‘국민 단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고 또 지금도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여러 장르로 새롭게 재탄생되고 있는 작품이다.
한국적 첫사랑의 원형을 아로 새겨준, 소설가 황순원의 삶과 작품들을 다시 조명해본다.
황고집 집안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양 근처의 대동군 재경면에서 태어났다. 나름 유서 깊은 가문으로, 조선 영조 때 ‘황고집'으로 알려진 효자가 황순원의 8대 방조다. 황고집 기질은 어디 가지 않는 듯, 황순원의 아버지인 황찬영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일로 1년 6개월 간 옥살이를 한다. 황순원의 황고집 기질은 어땠을까? 그의 삶을 돌아보면 튀는 행동이나 강한 주장을 하는 일을 별로 없었지만 침묵을 지킬지언정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깐깐한 황고집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황순원이 6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 했고, 이후 황순원은 유복한 환경에서 숭덕소학교, 정주 오산학교,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게 된다. 황순원은 12~13살 무렵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체증을 다스리기 위해 어른들 허락 하에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후 일흔이 넘어 타계할 때까지도 매일 ‘마주앙'을 마셨다고.
시인 황순원
황순원은 중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1931년 7월 『동광 東光』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을 하게 된다. 1934년 숭실중학교 졸업 후 일본 와세다 제2고등원에 입학한 후에는 이해랑 등과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고 계속 시를 발표하여 27편의 시를 실은 첫 시집 『방가 放歌』를 간행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려고 동경에서 시집을 간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듬해 여름 방학 때 귀향했다가 평양경찰서에서 29일 간 구류를 산다.
1936년에는 와세다 제2고등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5월에는 두 번째 시집 『골동품 骨董品』을 낸다. 하지만 이후 황순원은 문학적 방향을 시에서 소설로 돌리게 되며 단편 소설들을 써내게 된다. 초기 황순원 소설의 특징은 ‘현재형 문장'이 많이 쓰이고 감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가 단편까지를 시의 연장으로 본 것이 아닐까"(「안과 밖의 변증법」)라고 추측하기도 했는데, 황순원의 문체가 가진 감각적이고 섬세한 특징은 이후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고고하게 피어난 창작의 열정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당시는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으로 한글로 된 작품을 발표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황순원은 이 시기 고향집에 칩거하여 혼자서 소설 창작에 매진했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글을 쓰기 보다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더라도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었던, 조용한 ‘황고집'의 표출이었다.
해방 후 평양으로 가지만 공산당이 북한을 지배하면서 지주 계급으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가족들과 월남해 서울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교편을 잡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를 통해 그려진다.
1957년부터는 정년 퇴임 때까지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문인 제자들을 길러내며 그 자신도 더욱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한다. 1980년 정년 퇴임 후 1985년 고희 기념집으로 『말과 삶과 자유』를 낸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며 평소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고 산문을 거의 쓰지 않았던 황순원으로서는 참 보기 드문, 그래서 더욱 빛나는 짧은 산문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 이후에는 간간히 시를 발표했을 뿐 더 이상 소설은 집필하지 않았다.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 그리고 산문집 하나. 황순원이 남긴 단정한 작품 목록이다. 보통 유명 작가들이 타계한 후 유고집이나 교정 전 원본 등이 나오는데 황순원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다. 생전에 전집이 발간되었고(1962년 창우사 전6권, 1973년 삼중당 전7권, 1985년 문학과지성사 전 12권). 평소에 교정본이나 교정본 이전의 원고까지 모두 치워버릴 정도로 깐깐했다고 하니 말이다.
2000년 9월 4일, 황순원은 세상을 벗어나 그가 그렸던 순수의 세계로 떠났다.
황순원이 우리에게 남긴 것
황순원의 대표작으로는 「학」「독짓는 늙은이」, 「소나기」, 「목넘이 마을의 개」와 같은 서정적이며 휴머니즘이 묻어나는 단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편 소설들도 다시금 주목할만하다.
황순원의 첫 장편은 『별과 같이 살다』(1950)으로,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는 역사의 격랑을 온 몸으로 겪어낸 ‘곰녀'라는 한 여인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카인의 후예』(1954) 『인간 접목』(1957)『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등의 작품은 6.25 전쟁 전후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담은 문제작이고, 그의 2기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일월』(1962)『움직이는 성』(1972)『신들의 주사위』(1982)에서는 신분제와 현대 사회 전통의 문제 등 보다 다양한 주제들을 치밀한 구조와 방대한 서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품 뿐이겠는가. 황순원의 장남은 바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평가받는 황동규 시인이다. 또 황순원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부터 중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황순원 문학상'이 제정되어 박완서, 김원일, 방현석, 김영하, 김훈, 구효서, 김연수, 박민규, 이승우, 은희경 등의 작품이 수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양평 소나기 마을
경기도 양평 소나기 마을에는 황순원 문학촌과 그의 묘가 있다.
황순원 문학관이 양평에 있는 이유는, 황순원의 고향이 평안남도라 고향에 그의 문학관을 세울 수 없어 마땅한 곳을 찾던 중 단편 「소나기」의 한 구절에서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어른들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나기」의 작품 배경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적어도 양평 근처라는 데서 착안, 2009년 1만 4천 평의 부지 위에 8백 평 규모의 3층 건물로 문을 열었다. 황순원의 생애와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또「소나기」의 장면들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 (매일 두 시간 마다 소나기도 맞을 수 있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원두막도 있다)도 마련되어 있다고 하니 황순원의 작품 세계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 번 쯤 찾아가면 좋을 것이다.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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