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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이야기

Pablo Casals(1876~1973)

금동원(琴東媛) 2016. 9. 19. 08:12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로 널리 알려진 파우 카살스 이 데피요(1876년 12월 29일~1973sus 10월 22일)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출생한 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이다. 그는 "현대 첼로 연주의 아버지"로 불린다. 소년 시절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초연한 바 있다. 대표적인 음반으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936년~1939년, 엔젤/EMI (위키백과 참조)

 

https://youtu.be/_T8DjwLt_c4

 

https://youtu.be/s-pXTIUGQZA

 

https://youtu.be/qKoX01170l0

 

 

  스페인 태생의 첼리스트.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로의 전설이다.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했으며, 자크 티보, 알프레드 코르토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현대의 첼로 주법을 확립했으며,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견하고 세상에 내놓은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재능 있는 한 소년에서 20세기 첼로의 전설이 되기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로의 전설, 영원한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카탈루냐 벤드렐 마을의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건반음악에 관심을 가진 카잘스는 9세부터 오르간 연주를 시작했다. 뛰어난 재능과 노력 덕분에 아버지가 몸이 아플 때면 대신 가서 오르간 연주를 할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오르가니스트를 꿈꾸던 카잘스가 첼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1세 무렵 마을에서 열린 피아노 트리오 연주회를 본 후였다. 처음 본 첼로의 음색은 카잘스를 매료시켰고 그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회상했다. “첼로의 첫 음을 듣는 순간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압도되었습니다. 무언가 부드럽고 아름답고 인간적인 빛이 내 속을 가득 채웠죠. 그날부터 첼로를 사 달라고 매일 졸랐죠.”

  부모님으로부터 4분의3 사이즈 첼로를 선물 받은 카잘스는 바르셀로나 음악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그를 첼로로 이끌었던 일전의 피아노 트리오 연주회에서 첼로를 연주했던 호세 가르시아(Jose Garcia)에게 첼로를 배웠다. 음악원 재학 시절, 카잘스는 학교가 끝나면 ‘토스트’라는 카페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여기서 유명한 작곡가 이삭 알베니스(Isaac Albéniz)를 만나게 되었다. 카잘스의 재능을 알아본 알베니스는 그를 유명한 음악학자인 기예르모 모르피(Guillermo Morphy) 백작에게 보냈고, 그곳에서 음악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백작을 통해 독일어와 문학, 철학 등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얻은 카잘스는 백작의 도움으로 왕실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이삭 알베니스

 

기예르모 모르피 백작

 

 

  1897년 카를로스 3세의 훈장을 받으며 스페인 왕실의 인정을 받은 그는 유럽 각지를 다니며 연주를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 등으로 인해 연주를 중단해야 하는 시련도 있었으나 카잘스는 꾸준히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유럽 연주를 하던 1919년에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온 카잘스는 고국 음악계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80여 명으로 구성된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Pau Casals Orchestra)를 창단했다. 강도 높은 연습을 진행하고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에르네스트 앙세르메(Ernest Ansermet) 같은 지휘자를 초빙하면서 실력을 끌어올렸고 모든 운영비용을 사재를 털어 충당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는 1936년 파시스트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습격하며 해산되었고, 이후 카잘스는 남프랑스로 건너가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자크 티보(Jacques Thibaud)와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이루어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코르토이다) 카잘스는 두 사람과 함께 트리오를 이루어 연주활동을 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부활시킨 장본인  

  파블로 카잘스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부활시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바르셀로나 음악원 재학 시절인 열세 살 무렵 우연히 한 서점에서 낡은 악보를 찾게 된 카잘스는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홀로 악보를 탐구하고 연습한 끝에 비로소 이 곡을 세상에 알렸다. 카잘스의 연주 이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 가치가 알려지면서 오늘날 첼리스트들의 필수 레퍼토리가 되었다. 카잘스는 60세가 되어서야 이 곡을 음반으로 녹음했다.

  1961년 카잘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1971년에는 UN의 날을 맞아 뉴욕 UN 평화 메달의 수상자인 카잘스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카잘스는 자신이 작곡한 〈미국에 대한 찬가〉(Hymn to the United Nations)와 〈UN 찬가〉를 직접 지휘하며 음악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이날 그는 고향인 카탈루냐의 민요 〈새의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 카잘스는 생의 말년을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엘 페세브레’(El Pessebre)라는 이름의 집에서 보냈다. ‘말구유’라는 뜻을 가진 이 집은 카잘스가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 카탈루냐를 생각하면서 지은 집이었다. 매일 아침 바흐의 평균율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한 카잘스의 하루는 말년에도 여전히 음악과 함께였다. 왕성한 연주 활동은 아니었으나 이곳에서도 음악 축제를 만들었고 고국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이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져 난민 구호 협회와 평화 캠페인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년 후인 1973년 9월 말, 카잘스는 심장 발작을 일으킨 후 산후안의 아우힐리오 무토오 병원에서 97세를 인기로 세상을 마감했다.

 

 

 

 

백악관에서 연주하는 파블로 카잘스(1961년)

백악관에서 연주하는 파블로 카잘스(1961년)
바르셀로나에서 치러진 파블로 카잘스의 장례식

 

 글: 정주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이론전공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와 경영학 석사를 졸업하고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 기자, 한국교육방송 〈서양음악기행〉 작가를 역임하고, 국립오페라단 교실 속 오페라 여행 대본, 키즈 오페라 〈울려라 소리나무〉의 대본을 집필하였다. 현재는 KBS 클래식 FM 〈장일범의 가정음악〉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사회교육원과 영남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저서로는 《독재자의 노래》(공저, 한울, 2012)가 있다.( 출처: 클래식 백과, 이보경외 음악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