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카파(1913~1954) -Robert Capa, 총알 사이로 셔터를 누르다
불세출의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는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도 셔터를 눌렀다. 그에게 사진은 죽음이라는 두려움마저 극복해내는 힘이었다. 그는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국적은 헝가리였지만 유대인이기도 했던 그의 가족은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었다. 그가 한 살이 되던 해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유대인이었던 그들에게 정치적인 탄압을 가해왔다. 난민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카파는 누구보다 전쟁을 싫어했다
https://youtu.be/xHG6CaG5H3o
로보트 카파
시대와의 불화는 그를 반전주의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마흔한 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섯 곳의 전쟁터였다. 그의 일터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지였고, 그의 하루는 매 순간 전 생애를 걸어야 할 만큼 절박했다.
그런 절박함이 그를 위대한 사진작가로 만든 것이다. “한 발자국 더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라”는 사진 철학은 그를 자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최고의 사진은 바로 진실 그 자체’라 믿었던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서라면 밖으로 돌지 말고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허상보다는 진실 그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믿음으로 셔터를 눌렀던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7만 점의 사진이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달리는 모습’, ‘중일전쟁 시 눈싸움하는 아들’, ‘어린 여군들의 훈련’,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전사자’, ‘노르망디 상륙작전’, ‘병사의 죽음’, ‘울고 있는 아이’, ‘독일군 아이를 낳고 삭발당해 쫓겨나는 프랑스 여인’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진실
좌익운동에 가담했던 학생 시절에 이미 그의 삶은 결정되었다. 온 가족이 피신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서도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다. 전쟁을 형제처럼 달고 살아야 했던, 흔들리는 삶은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내야 했던 전쟁터와 묘하게 어울렸다. 사진에서 진한 화약 냄새가 묻어나는 것도, 목숨을 건 뒤에야 탄생한 듯한 절박함이 배어 있는 것도 사진과 그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파이즘(Capaism)이 탄생했다. 자신의 생명보다 예술을 더 사랑하는 작가적 정신,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마음이 카파이즘이었던 것이다.
그는 살육의 현장을 한 편의 영화처럼 치열하게 사진에 담아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인한 현장 사진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의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 한 장의 사진으로 전쟁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상황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속 군인은 어쩌다가 잡혔을까? 최전선에 서게 된 그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하얀 눈이 쌓인 참호를 기어 다니느라 무릎에는 흰 눈이 묻어있지만, 그는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언제 발사될지 모르는 총구 앞에 위태로이 서 있는 그 병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포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는 포로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며 여유를 부리고 있다. 그의 여유는 포로에게 극심한 공포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았기를, 그래서 포로가 살아남았기를 바라고 있다.
참혹한 전쟁터에서도 카파는 밝았다.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그에게 사진은 역사였고 운명이었다. 자기 일이 최선의 프로파간다(Propoganda)인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다 보니 단 한 컷의 사진으로도 역사적 여운을 통한 인간 내면의 파시즘, 증오심과 폭력성이 여과 없이 드러냈다. 모든 군인이 총을 들고 싸울 때, 그는 사진기 하나로 세상과 싸웠다. 그의 적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였고, 세상을 전쟁의 광기 속으로 몰아넣는 파시스트들이었다.
전쟁과 함께 카파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여성이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상류층의 저택을 방문했다가 그곳 부인의 유혹으로 이성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수많은 여성을 만나고, 그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의 카메라는 전쟁터만큼이나 많은 여성을 찾아다녔다. 전쟁터에서 만난 수많은 피사체 이상으로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정작 그가 사랑한 여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장을 누볐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한 여자를 사랑했다. 당대를 풍미하던 할리우드의 대스타 잉그리드 버그먼(Ingrid Bergman)의 구애도 거절할 만큼 그가 사랑했던 여성은 ‘게르다 타로(Gerda Taro)’였다.
◆운명의 여인, 게르다 타로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였던 타로는 카파가 모든 것을 걸었던 여인이었다.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으며,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그의 마지막 종착점은 언제나 타로였다.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진 반독재 시위에 참석했다가 수배자로 내몰린 카파 때문에 가족은 베를린으로 도주해야 했다. 수배령이 내려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 에이전시의 암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사진에 매료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가로 이름을 날리던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암살자들에게 쫓겨 덴마크를 떠돌던 중 강연회를 열게 된 것이다. 코펜하겐에서 진행된 강연회는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되었던 터라 접근이 쉽지 않았다. 카파는 작은 라이카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숨긴 채 강철 파이프를 옮기는 인부들 사이에 끼어 강연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레온 트로츠키의 강연 장면을 카메라에 담게 된다.
이 사진은 ‘강연 중인 레온 트로츠키’라는 제목으로 독일 〈슈피겔〉지 전면에 실리게 되면서 카파는 단숨에 촉망받는 사진작가 반열에 올라선다. 이후 파시즘에 대항하는 사진기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유대인이었던 카파는 독일에 더는 머물 수 없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 정착할 무렵, 비슷한 처지의 타로를 만나게 된다. 강인하고 발랄한 여인이었던 타로 역시 파시즘과 맞서 싸우던 유대계 독일인이었다.
둘은 같은 처지에서 오는 교감으로 금세 가까워진다. 1935년 여름, 에펠탑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 함께 살면서 두 사람은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1년 후, 스페인 내전(1936~1939)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종군기자가 되어 전쟁터를 누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은 둘의 사랑을 더욱 끈끈하게 맺어준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카파는 진정한 종군기자의 삶을 확인하게 된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더 리얼하게 담아야겠다는 욕심은 적진의 참호 속으로 달려가는 무모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덕분에 수많은 병사가 그를 엄호하기 위해 뒤를 따라야 했고, 위험한 순간과 맞닥뜨리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런 무모함 덕분에 스페인 내전은 생생한 기록으로 남게 된다.
◆명성과 비난 속에서 태어난 걸작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카파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다. 교전 현장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맞은 한 병사가 언덕에서 총을 떨어트리며 쓰러지는 찰나를 담은 ‘병사의 죽음’이 그것이다.
줌(Zoom) 기능이 있어 멀리서도 피사체를 선명히 찍을 수 있는 최신 카메라가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가장 근접해서 촬영해야만 가능했던 사진을 위해 그는 쏟아지는 총탄들 사이를 분주히 오갔고, 발줌(feet zoom)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한 병사의 죽음을 카메라 속에 생생히 담아낼 수 있었다.
이 사진은 카파에게 명성과 비난을 함께 안겨주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을 작품화했다는 비난과 찰나로 영원을 보여 주는 사진 미학의 최고조라는 극찬이 동시에 쏟아지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사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카파는 그런 평가에 초연했다.
적군과 아군으로 나눠 총을 겨누는 그 순간, 종군기자는 저널리스트 입장에서 전쟁의 참상 그 자체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카파는 자신의 사진을 통해 전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살육의 비극을 여과 없이 고발했다. 그의 사진은 평화를 기원하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병사의 죽음’이라는 사진 한 장은 그런 카파의 진심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전쟁의 참상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카파는 전설적인 작가로 명성을 남게 된다.
1937년 7월, 카파는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전달하기 위해 파리로 가게 된다. 홀로 남겨진 타로는 마드리드 부근에서 전투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날의 전투는 치열했다. 포탄은 비 오듯 쏟아지면서 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지휘관이 후퇴를 명했지만, 한 장의 사진이라도 더 찍으려는 타로는 참호를 지켰다. 그때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온 탱크가 참호를 덮치면서 타로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카메라와 필름이 무사한지’를 걱정하면서 타로는 후방으로 후송되었지만, 스물여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절명하고 말았다. 타로의 사망 소식은 다음 날 조간신문에 실렸고, 카파에게도 전해졌다. 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은 카파를 괴롭혔다. 라이카 카메라의 사용법을 알려준 것도, 종군기자를 권한 것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타로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에 치러진 장례식에서 결국 카파는 실신하고 말았다.
타로가 사망하던 그해 봄, 카파는 타로에게 청혼을 했다가 퇴짜를 맞았었다. 결혼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서로 의존하게 되어 독립적 작업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타로는 연인관계로 남기를 원했다. 그때 타로를 설득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하며 카파는 카메라에서 손을 놓았다. 그렇게 몇 해를 의미 없이 보낸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카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냉소적이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슴엔 늘 타로의 사진을 품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위안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런 카파를 두고 “세상은 둘의 사랑이 낭만적이라 말하지만, 타로가 죽을 때 이미 카파의 일부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타로는 카파의 반쪽 영혼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타로와 함께 세상을 잃다
타로를 잃었을 때, 카파는 스물세 살이었다. 타로를 잃은 슬픔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했다. 또 다시 별리(別離)의 상처를 받을까봐, 사랑이 깊어질수록 뒷감당이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뒤였기에 쉽게 옆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깊은 사랑 뒤에 경험한 상실감은 사람과의 관계 자체를 막았다. 그녀의 죽음은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은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여자, 가족, 친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최대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자 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폭격당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았다. 그가 누빈 전쟁터는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1937~1945),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제1차 중동전쟁(1948),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 등 이었다.
다섯 곳의 전쟁터를 누비면서 그가 버리지 않은 신념이 있었다. 전쟁을 사진으로 남겨 유명해지겠다는 공명심 대신 따뜻한 마음이었다. 전쟁의 참혹성을 생생히 고발해 평화를 기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다. ‘공습경보 중 피난처로 달려가는 개와 여성’, ‘자욱한 포연 속의 병사’ 등이 그런 마음에서 촬영되었다. 카파가 많은 종군기자 중에서도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런 마음에서 나온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든 사람도 카파였다. 해변으로 진격하는 미군들을 보며 106장의 사진을 찍었다. 총알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물방울을 튀기는 가운데 쫓고 쫓기기는 장면을 미친 듯 찍어 댔다. 그중 8장만 남아있다.
◆잉그리드 버그먼과의 만남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그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남프랑스 해안가에 있던 피카소(Picasso)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별장을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그들의 일상을 사진에 담은 것도 이즈음이다. 사진 속에는 환갑을 넘긴 피카소가 마흔 살이나 아래인 스물한 살의 프랑수아즈 질로(Françoise Gilot)를 위해 파라솔을 들고 있다. 자신은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그대로 받으면서. 카파는 존 스타인벡, 어니스트 헤밍웨이, 피카소, 어윈 쇼 등과 친밀하게 지낸다. 이들 모두 전쟁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어느 날 어윈 쇼가 뉴욕에서 날아왔다. 두 사람이 파리 리츠 호텔 고급 바에 앉아 포커를 치고 있었다. 이때 어윈 쇼가 갑자기 카파에게 속삭였다.
“어이! 저기 좀 봐.”
그가 가리킨 곳에는 일행에 둘러싸인 잉그리드 버그먼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사진작가의 눈에 버그먼은 최고의 피사체였다. 유럽의 각 부대를 돌며 순회 위문 공연 중이던 그녀는 연합군 병사들이 가장 흠모하던 여배우였다.
버그먼이 파리에 온다는 소식에 유럽의 모든 사진작가가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버그먼이 보이면 경쟁적으로 셔터를 눌렀고, 어떻게 하든 개인적으로 그녀를 만나려고 노력했다.
그날 저녁 카파와 어윈 쇼는 버그먼이 머물던 방문 아래로 메모지 한 장을 집어넣었다.
‘당신에게 멋진 꽃을 드리고, 최고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데 돈이 좀 모자라요.’
요행을 빌면서 넣어진 메모지를 읽던 버그먼은 한참을 웃었다. 그녀는 머리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꽂고 그들이 정한 장소로 나갔다. 두 젊은이는 처음에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금세 꿈같은 현실을 알아채고 버그먼과 함께 그 시간을 즐겼다.
카파와 어윈 쇼의 주머니는 금세 바닥이 났다. 버그먼은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내주며 초호화 사교 장소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렇게 셋은 파리의 밤을 함께 보냈다.
그날의 일은 카파와 버그먼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버그먼의 딸은 “어머니는 카파와 처음 만나고 굉장히 독특하고 멋진 분이라며 사랑에 빠졌다”며 어머니의 말을 회고록에 남겼고, 버그먼은 “호텔 방에서 꽃병만 바라보고 가만히 앉아 있느니,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함께 저녁을 보내는 것도 즐겁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카파와 시간을 보낸 뒤, 버그먼은 카파에게 할리우드행을 제안한다. 종군기자를 그만둔 뒤 뭘 해야 될지 찾던 때였다.
“카파, 할리우드로 함께 가서 내 이야기를 글로 쓰고 감독 일을 해 주세요.”
카파는 통 큰 제안에 선뜻 응하지 않는다. 대신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어떻게 사는지 먼저 〈라이프〉지의 사진기자로 일해 보고 연락하겠다”고 대답한다.
1945년 말, 프리랜서 사진작가의 삶을 정리한 카파는 버그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영화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둘은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는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카파가 인터내셔널 픽쳐의 제작을 맡게 되면서 둘의 만남은 잦아진다. 하지만 조직에 얽매인 시간이 카파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면서 회의에 빠지기 시작한다. 틀에 매인 삶에 지쳐가던 그에게 유일한 낙은 경마와 음주, 일광욕이었다.
◆마지막은 전장에서
타고난 연기자였고, 누구보다 연기를 사랑했던 버그먼은 연기 이상으로 카파를 사랑하고 있었다. 카파가 적극적으로 구애해온다면 연기는 포기할 수도 있었다. 자서전에 비슷한 글을 남긴 바 있다.
만일 카파가 나에게 “우리 함께 인생이라는 멋진 포도주를 격하게 들이켜자. 우리 기회를 만들어 세상과 부딪치자”라고 했더라면 남편을 떠나 그와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파는 달랐다. “나는 한곳에 얽매여 살 수 없다. 결혼할 인물이 못 된다”며 그녀의 구애를 거절했다. 카파가 틀에 박힌 결혼생활을 못 한다며 버그먼의 청혼을 거절했지만, 실상은 그의 마음속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타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해 줄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그녀를 부추겼다. 그녀에게 할리우드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고, 얼마든지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그먼이 유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도 카파가 만들어 준 것이다.
카파는 버그먼에게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만든 영화 두 편을 보여 주었다. 그 영화에 감동받은 버그먼은 로셀리니 감독에게 “제가 아는 이탈리아 말은 띠 아모(Ti amo, 당신을 사랑합니다) 뿐입니다”라는 편지를 썼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카파는 다시 전장에 선다. 버그먼이 싫진 않았지만, 카파의 마음을 오롯이 메우고 있는 것은 언제나 타로였다. 카파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타로가 생을 마친 전장으로 떠난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현장을 누비며 다시 그는 종군기자의 삶을 시작한다. 전쟁터에서 카파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다. 지휘관이 주의하라고 했음에도 ‘더 좋은 사진을 단 한 장이라도 더 찍기 위해’ 자주 부대를 이탈했다.
1954년 5월 25일 오후 3시경, 인도차이나 남단을 지나는 프랑스 군대의 호송차에 있던 카파는 또 다시 지휘관의 경고를 무시하고 차에서 내린다. 근처 마을로 진격하는 프랑스 군대를 찍기 위해서였다. 잡초가 무성한 둑 위에 올라 마을 방향으로 몸을 틀던 그때 대인지뢰가 터지면서 그는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가 찍은 ‘지뢰밭의 군인들’은 마지막 유작이 되고 말았다. 그의 지갑 속에선 한 장의 사진이 나왔다. 그가 평생을 잊지 못한 타로였다. 사진 속에서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미 군부는 하노이에서 카파의 군사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자 했다. 카파의 어머니는 “내 아들은 평화주의자였습니다”라며 그 결정에 반대했다
글: 이동연 작가
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대화의 연금술》을 비롯해 《통하는 대화법》, 《소비 트렌드》, 《리더십 불변의 법칙》, 《최고 마케팅 경영자 예수》, 《CEO형 인재》, 《해체냐 해탈이냐》,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두 개의 길 하나의 생각》, 《바루나-포용의 신화를 찾아서》, 《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과 중국에 수출된 《행복한 수면법》 등이 있다.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년 10월 22일 ~ 1954년 5월 25일)는 헝가리계 유태인이자 미국인으로, 세계적인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포토스'의 설립자인 동시에, 20세기에서 유명한 전쟁 보도 사진작가로, 에스파냐 내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유럽전선, 제 1차 중동 전쟁,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하였다.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은 유명한 미국 영화감독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의 이름을 본따 지었으며 '카파'라는 말은 헝가리어 '차퍼(Cápa)'에서 유래한 말로, 상어를 의미한다. 그의 동생 코넬 카파도 사진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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