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인이랍니다 심보선 오늘은 오랜만에 산책을 했지요. 되도록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요. 당신, 그리고 당신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지난해의 친구들, 그중 제일 조용한 친구에 대해. 내일의 미망으로 쫓겨난 희미한 빛과 가녀린 쥐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지상의 얼굴 위로. 나는 한껏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갔지요. 중간에 아는 시인을 봤지만 모른 체했어요. 시인끼리는 서로 모른 체 하는게 좋은 일이랍니다. 시인은 항상 좀도둑처럼 긴장하고 있지요. 느릿느릿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들은 가장 사소한 풍경에서 가장 치명적인 색깔을 꺼내 달아나는 중이니까요.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에 대고 속삭였죠.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