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서 길이 된 길 방지원 참 오래 걸었다 여럿이서 혼자서 여럿일 땐 길도 얼굴도 여럿이었지만 혼자 걸을 땐 두려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가끔 신작로에서 신기루를 만나기도 했지만 내려주신 길엔 자주 물이 굽이치고 바람이 불고 전염병이 세상을 휘저었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도 내 뜻은 아니었다 다 주어도 좋을 사랑을 하고 살이 찢기는 이별을 하고 나중엔 서로의 이름을 놓아버렸다 돌아보니 텅 빈 길에 수북이 남은 마음부스러기들 마음도 마음을 밀어낼 때가 있다 몸 비듬처럼 길은 예전 얼굴이 점점 아니어도 다녀간 발자국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왼쪽 귀에 바닷소리가 산다》,(2023, 미네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