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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원 시집 해설《여름 낙엽》

금동원(琴東媛) 2009. 7. 19. 18:19

 

 

 

 

금동원 시집 해설 《여름 낙엽》

 

 

투철한 역사 의식과 참신한 비젼 제시

 

 

 금동원 시집 [여름 낙엽]이 시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투철한 역사 의식속에 사물의 본질을 깊게 관조하며 참신한 서정을 바탕으로 엮어내는 시작법 때문이다. 금동원 시인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적 정서를 이미지화 시키는 데 주력해 오면서 알아듣기 쉬운 일상어를 통해 역사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이미지화시키고 있다. 우선 시 [역사 속으로]를 읽어보자.


 

 

고향 조국이 그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마음이

 

어찌 정지용 시인뿐이었으랴 만은

 

압천을 마주하고 격정과 복받침의 시를

 

토해낼 수밖에 없는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고

 

저 아득한 구드레 나루터를 떠났던

 

백제의 혼과 얼이 깃든 숨결을 따라 길을 떠난다

 

 

 

시공을 지나온 역사의 넋에 말을 건네는 순간

 

대패를 밀던 목수의 우렁찬 기합소리

 

흙으로 깨달음을 빚어낸 도공의 물레 돌리는 소리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붓을 옮기던

 

담징의 벽화에 스며있는 얼룩진 땀 냄새가        

 

오롯이 살아있는 법륭사에서

 

뜨거운 서러움이 내 영혼 속을 아리게 파고든다

 

 

 

까마득한 기억 한 켠의 낯익음들이여

 

바로 몇 천 년의 세월을 건너

 

내 가슴에 파고들며 들리던 그 한마디

 

*구다라 나이데스!

 

 

 

잘린 귀로 쌓아 올린 귀 무덤의 한(恨) 서린 울림이

 

달래고 달래고 달래보아도

 

눈물을 품은 채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며

 

교토의 한 구석을 지키고 있다    

 

 

 - [역사 속으로] 전문

 

 

  젊은 학창 시절 시를 쓰며 정지용이 유학했던 일본땅 교토(京都)며 시가지를 누비며 흐르는 압천(鴨川, 가모가와) 냇가, 또한 온갖 일본과 일본 문화의 뿌리가 고대 백제였다는 것을 금동원은 이미지화 시키는데 열중한다. ‘구드레 나루터’는 고대 백제왕국의 문물이 일본으로 실려가던 부여 백마강가의 나루터를 말한다. 옛날 일인들은 백제를 가리켜 ‘큰나라’인 ‘구다라’라고 찬양했다. 그들은 백제에서 건너온 물건이나 백제 문화를 접하면 입버릇처럼 “구다라나이” 소리를 했다.

 

 

 “구다라나이”란 무슨 뜻이었던가. ‘구다라나이’는 일인들의 ‘백제 칭송’이다. 본래 일인들이 백제 문화를 우러르던 이 말의 어원은 “이것은 백제 물건이 아니다(これは百濟の物では無い)”였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뛰어난 생산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요즘 흔히들 우리가 외제 명품을 따지는 것과 똑같은 찬사. 이렇듯 고대 백제 문화는 왜(倭)나라에 영향이 컸다. 그러기에 ‘구다라나이(くだら無い)’라는 말이 일본 땅에서 오랜 역사 속에 이어져 왔다. 백제, 구다라 열풍은 이미 고대 일본땅에서 왕성하게 일었고 그것이 한류의 원조(元祖)였다.

 

 

 그런데 일본의 군국주의 일제 치하가 되면서부터 일본에서는 ‘구다라나이’라는 백제 찬사를 ‘쓸모 없는 것’이라고 나쁘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일본 역사학의 태두(泰斗)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는 “구다라(くだら, 백제)라는 말은 고대부터 일본에서 백제를 ‘큰나라’라고 섬긴데서 생긴 말이다”(KBS-TV [역사스페셜] 2002. 7 방송)라고 했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주장은 수긍이 간다.

 

 

금동원시인이 “시공을 지나온 역사의 넋에 말을 건네는 순간/대패를 밀던 목수의 우렁찬 기합소리/흙으로 깨달음을 빚어낸 도공의 물레 돌리는 소리/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붓을 옮기던/담징의 벽화에 스며있는 얼룩진 땀 냄새가/오롯이 살아있는 법륭사에서/뜨거운 서러움이 내 영혼 속을 아리게 파고든다”(제2연)노래하듯, 고대 백제로부터 일본으로는 불교를 비롯하여 벼농사며 베틀과 대장간 철기 문화, 종이 문화, 글을 쓰는 문자며 좋은 말(馬)과 소 등 가축과 그 밖의 모든 선진 문화가 건너갔다.

 

 

 그런데 또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잘린 귀로 쌓아 올린 귀 무덤의 한(恨) 서린 울림이/달래고 달래고 달래보아도/눈물을 품은 채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며/교토의 한 구석을 지키고 있다”(제4연)고 한다. 이것은 금동원시인이 일본 교토의 중심가에 있는 [귀무덤](京都市東山區茶屋町527)이란 곳에 찾아가서 우리 민족사의 아픔의 현실에 직면하면서 경악하는 광경이다.

 

 백제문화로 자라난 일본은 백제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임진왜란 때(1592~1597, 정유재란까지), 왜인들은 조선 침략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 사람들 수십만명의 귀와 코를 베어갔고, 그것을 오늘의 교토땅에다 전리품인양 함께 묻고 무덤을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당시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부하 장수들에게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많이 베어올수록 큰 포상을 했다는게 일본 학자들의 연구다. 그렇듯 금동원시인의 예리한 역사의 시각은 [역사 속으로]라는 이 명편을 우리 시단에 남기고 있다.

 

 

 시인은 일본속의 백제여행 뿐 아니라 백마강이 흐르는 백제의 왕도였던 소부리(所夫里) 땅으로의 여행도 줄기차다. 실은 [소부리]라는 예전 백제왕도의 명칭은 뒷날 [서울]이라는 국도(國都)의 어원이 되기도했다는 것을 이 시에 담고 있어 박식한 모습이 들어나기도 한다. 이어서 [백제여행]을 읽어보자.

 

 

 

 

 

봄볕은 아직 멀리 있는데

 

곰강 너머 구드레 나루터로

 

불어오는 쌉쌀한 바람은

 

백제 처녀의 슬픈 숨결

 

 

 

낙화암 절벽에만 자란다는 고란초는

 

꽃잎 되어 스러진

 

삼천 궁녀의 절개

 

 

 

주작대로 한가운데 우뚝 선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명멸한  슬픈 백제의 빛바랜 자태로 남아

 

나그네의 마음을 흔들고

 

주인도 알 길 없는 능산리 고분 아늑한 햇살과 고요만이 왕릉의 기품을 드러내놓고 차마 두고 가는 맘 무겁구나

 

백제의 영혼들이여 백마강에 아지랑이 피면 달빛 젖은 기러기 떼 되어 소부리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백제여행] 전문

 

 

 660년 백제 멸망의 상징적 전설 “낙화암 절벽에만 자란다는 고란초는/ 꽃잎 되어 스러진/삼천 궁녀의 절개”(제2연)며, "주작대로 한가운데 우뚝 선/ 정림사터 오층석탑은/명멸한 슬픈 백제의 빛바랜 자태로 남아/ 나그네의 마음을 흔들고”(제3연) 있다는 백제의 정한이 넘친다.  정림사터 오층석탑을 쌓았던 백제인들은 663년부터 대대적으로 일본에 건너가기 시작해서, 백제왕족이었던 덴치천황(天智天皇)의 철저한 도움을 받으며 교토 동쪽 ‘비와코’ 호숫가에 새 터전을 잡고, 그 곳에다 정림사터 오층석탑을 방불케하는 백제의 석탑을 다시금 세운 것이 지금도 우뚝한 [세키토지](石塔寺) 사찰의 ‘백제 석탑’이기도 하다. 한국 문인들이 이번 여름(2009.7.25~28) 그 정겨운 1300여년 전의 백제탑을 찾아 문학 탐방에 나선다.

 

 

 덴치천황은 집정한 지 두 달째인 서기 661년 9월, 나가쓰궁(長津宮)에서 백제에서 망명하여 일본에 건너 온  백제왕자 풍장(豊璋)에게 직관(織冠)을 수여했다. 덴치천황은 백제 멸망 뒤인 665년 2월,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인 난민 400여명을 맞아들여 비와코 호숫가 오우미(近江) 땅 가무사키(神前)에다 주택과 논밭을 주어 자리잡도록 적극 지원했다. 뒤이어 같은 해인 666년 10월에는 또다시 백제에서 건너온 난민 남녀 2000여명에게 아즈마국(東國) 지역에 새삶의 터전을 잡아주고 관급(官給)을 베풀었다. 또한 뒤이어 덴치천황은 667년 3월에는 백제 난민들을 정착시킨 오우미땅으로 이번에는 왕도까지 새로히 옮겨 왔다. 즉 왕도 나라(奈良) 땅으로부터 왕도를 옮겨 오우미땅에 천도까지 했다. 일본 역사책은 덴치천황이 이전의 왕도였던 나라(奈良) 땅에서 오우미(近江)로 천도하자 이에 항의하는 백성들이 몹시 소란을 피웠다고 전한다.

 

 

 백제가 망한 뒤의 아픔의 발자취를 섭렵하는 역사시인 금동원은 백마강에서 부여 시내 정림사탑을 돈뒤에 이어 “주인도 알 길 없는 능산리 고분”(제4연) 등, 백제사의 발자취를 꼼꼼히도 챙긴다. 그 뿐 아니라 이번에는 부여 능산리 백제 절터에서 발굴된 문화재로서 눈부신 [백제금동대향로]를 찾아 백제 여행을 계속한다.


 

 

숨 한번 제대로 쉬지 않고 진흙 속에 꼭꼭 숨어 오늘을 기다렸소

내가 살던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성羅城에서 불어오는 보드랍고 달콤한 바람은 여전해도 세상은 많이 변했구려

시공을 초월해도 변하지 않은 것은

우주 속에서 숨 쉬는 자연 뿐인 것 같소   봉래산에 간 이유는 신산神山이기 때문이오

일흔네 개의 산봉우리엔 서른아홉 마리

 

온갖 동물들이 넘나들고

열여섯 분 신선들이 이곳저곳 다니실 때

다섯 악사 둘러앉아 천상계를 연주하고

활짝 핀 연꽃 새로 스물여섯마리 물고기들 물결 따라 세월 따라 고개 쳐든 용 아가리 가득 신산을 받쳐 물고

세 다리와 꼬리로는 세상을 끌어안고 

 

날아갈 듯 한발은 하늘을 향해있고  

신산위 여의주를 품은 봉황 한 마리 천상을 향해 날갯짓하기 시작하는구려

 

도교에서 나왔대도 불교에서 배웠대도 동양적 정신이건 백제의 얼이 되건 흘러간 것은 모두 역사가 되고 시간은 또다시 진흙 속에 덮여 긴 기다림의 금은화로 다시 태어나겠구려 

 

  -[하나의 우주]-백제금동대향로- 전문

 

 

 

[백제금동대향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는 이 훌륭한 시가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힘들줄 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지난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되어 온 국민을 경탄시켰다. 능산리 절터는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523~554, 백제에서의 재위 기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567년에 세워진 큰 가람이다. 금동원시인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큰 기쁨에 이 국보(제287호) 문화재인 6세기 백제 대향로를 마주하며 감동에 잠겨 “숨 한번 제대로 쉬지 않고 진흙 속에/꼭꼭 숨어 오늘을 기다렸소/내가 살던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나성(羅城)에서 불어오는 보드랍고 달콤한 바람은/여전해도 세상은 많이 변했구려”(도입부)찬탄하며 다채로운 이미지 발산의 메타포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나성(羅城)이란 백제 왕도인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성을 말한다.

 

 

 높이 62.5cm의 이 대향로에는 그 정수리에 봉황이 턱밑에 여의주를 끼고 두 날개를 하늘로 활짝 펼치며 당장에라도 웅비할 것 같은 황홀한 모습이다. “우주 속에서 숨 쉬는 자연 뿐인 것 같소/봉래산에 간 이유는 신선이기 때문이오/일흔네 개의 산봉우리엔 서른아홉 마리/온갖 동물들이 넘나들고/열여섯 분 신선들이 이곳저곳 다니실 때/다섯 악사 둘러앉아 천상계를 연주하고” 있다는  고대 백제의 완벽한 조형 예술로서 평가받는 이 대향로 몸체에는 사슴이며 학, 물고기 등과 74곳의 산봉우리가 솟구치면서 16명의 신선들이 좌정한다. 이는 고대의 도교 사상과 불교 사상 등 을 바탕으로 하는 백제 시대의 종교적인 근엄성이 잘 들어나고 있다고 시인은 “도교에서 나왔대도 불교에서 배웠대도/동양적 정신이건 백제의 얼이 되건/흘러간 것은 모두 역사가 되고/시간은 또다시 진흙 속에 덮여/긴 기다림의 금은화로 다시 태어나겠구려”하고 노래한다.

 

 

 이상과 같은 금동원 시인의 백제 역사 탐구 역편들만으로서도 이 시집은 문단의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이제 안성땅으로 발길을 옮겨 [청룡사에서 만난 바우덕이]를 찬양한다. 함께 감상해 보자.

 

사당패 우두머리 꼭두쇠 노릇을 하며 한 시절을 살던 여장부 비천하게 태어난 한 세상

억눌린 끼와 서러움 한이 되어

소고장단에 한바탕 춤추고 노래하면 남정네들 거친 숨결도 기쁨과 희망이 되고

외롭고 고단한 인생살이

외줄하나에 청춘을 던지고 삶을 살다간 아름답고 기구한 예술가

 

“사람으로 대접받긴 글른 세상 모심던 어느 봄날 떠나온 고향 첫 눈 오시기전 돌아나 갈거나

겨울 지나면 마음 녹이러 돌아나 갈거나

어허야 둥둥 어허둥둥...”

 

바우덕이의 노래인지 울음인지 모를 메아리가 깊은 울림이 되어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

 

 - [청룡사에서 만난 바우덕이] 전문  

 

 

 조선시대 말기, 대원군시절에 이름을 떨치던 여자 사당패 [바우덕이]. 전국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여성이거니와 “외롭고 고단한 인생살이/외줄하나에 청춘을 던지고 삶을 살다간/아름답고 기구한 예술가” 바우덕이는 15세에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23세에 요절한 바우덕이(본명 金岩德)를 기리는 안성의 축제는 전국에서 주목 받아온다.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였던 안성남사당패 바우덕이의 예술혼을 기리고 남사당문화를 복원 전승하는 경기 안성 시립남사당바우덕이 풍물단의 활약 등을 찬미하는 오늘의 ‘바우덕이 축제’의 고장인 안성은 공설운동장과 안성 시내 곳곳에서 간단없이 다채로운 공연과 행사가 벌어지고 있어 각종 남사당놀이를 관람할 수 있다.

 

 

“사람으로 대접받긴 글른 세상/모심던 어느 봄날 떠나온 고향/첫 눈 오시기전 돌아나 갈거나/겨울 지나면 마음 녹이러 돌아나 갈거나/  어허야 둥둥 어허둥둥... 바우덕이의 노래인지 울음인지 모를 메아리가/깊은 울림이 되어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는 곳에 필자도 지지난 해 열린문화마당에서 축제기간에 안성에서만 볼 수 있는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즐겼다. 남녀 줄꾼 4명이 하루 4회 이상 줄타기를 계속하고 풍물놀이·덜미(인형극)·덧뵈기(탈놀이)도 수시로 이어지는 등 참으로 알찬 구경이었다.
 [청룡사에서 만난 바우덕이]는 머슴이었던 아버지가 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 남사당패를 따라가게 되었다. 안성에는 청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에 시주를 많이 했다는 바우덕이는 불운하게도 스물한 살 때 병을 얻어 스물셋 되던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가 그 옛날 몸 담았던 ‘안성 남사당패’는 1989년 제30회 전국민족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계속하고 있으며 2004년 초 안성 남사당 (줄타기)가 유럽국가들과의 겨루기에서 1위를 차지하여 ‘기네스북’에 기록되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고. 청룡리 불당골에는 “이곳서 자라 기예를 닦고 닦았으니 모름지기 신기의 경지에 이르러 온 나라안의 어디이고 다니면서 펼친 벅구·사당춤·줄타기 등은 그 재주가 너무나 뛰어나 모르는 이가 없이 유명하였노라. 그의 넋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여기에 이 비를 세우노라”는 바우덕이 묘비명도 전하고 있고.

 

 

금동원 시집의 표제시 [여름 낙엽]도 함께 감상하여 보자.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날 미련 탓인가 지난봄의 목련은 더욱 그립고 벌써 지루해지는 사루비아는 빗속에서 더욱 붉다

 

슬픔도 시리게 화려한 날 눈물은 사치스러워 흩어진 날들을 줍는다는 게 숨 쉬는 일만큼 쉽지 않고 벌써 매미는 울기 시작했다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계절들 이미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로등 아래로 일곱 살의 기억을 찾아 기차를 탔다.             

 

  - [여름 낙엽] 전문

 

  여름 낙엽의 원인은 무엇인가. 계절적으로 마냥 푸르러야할 나뭇잎이 시들어 조락한다니 “조로증에 걸린 계절들”(제4연)은 약사빠른 인간들의 환경 파괴 탓이런가. 시인의 메타포는 자못 심각하다.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슬픔도 시리게 화려한 날/눈물은 사치스러워/흩어진 날들을 줍는다는 게/숨 쉬는 일만큼 쉽지 않고/  벌써 매미는 울기 시작했다”(제2연)는 스피디한 계절의 변이에서 시인은 상실당한 자연의 정서와 청소년 시절의 화평스러웠던 날을 절절하게 그리운다.

 

 자연스럽고 아름답기만했던 계절감을 처참한 공해 속에서 상실당한 21세기 현대 사회에 대한 문명비평의 예각이 번뜩이는 가편이다. 그렇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날이 거듭될수록 본래의 노멀한 온갖 삶의 양식마져 모두 억죄고 파멸당하고 있다는 강력한 비평 의식은 독지로하여금 이 작품을 거듭 암송시킨다.

 

 남이 인식하고 보는 것을 쓰는게 시가 아니고, 남이 미쳐 깨닫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줄아는 눈을 가진 것이 시대에 앞서는 시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시를 쓰는가. 남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뚜렷이 제시하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나는 시인은 새로운 ‘영혼의 엔지니어’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련다. 엔지니어 시인 금동원에게.     

 

 

-홍윤기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