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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이야기

실베스트로 레가(Silvestro Lega, 1826-1895)

금동원(琴東媛) 2015. 8. 2. 01:08

 

실베스트로 레가

고요함과 평온함을 담다

http://blog.naver.com/dkseon00/220072290803   

오랜만에 다시 그림 여행을 떠납니다. 밀렸던 장맛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요즘, 실베스트로 레가 (Silvestro Lega, 1826-1895)의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 출발해 보겠습니다.

퍼걸러 The Pergola, 75x94cm, oil on canvas, 1868

퍼걸러는 등나무 같은 덩굴식물이 타고 올라가도록 나뭇가지를 엮어 그늘이 지도록 만든 구조물을 말합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때, 퍼걸러에 여인들이 모였는데 검은 옷의 여인은 턱을 괴고 엄마를 따라온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손을 활짝 벌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어른이 있어 신이 난 모습입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주전자를 든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표정을 보니 굳어 있군요. ​짜증이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그림자만큼 뻗은 모습입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늘은 빛으로 가득 찼고 땅에는 그림자들의 키 재기가 한창입니다.

레가는 이탈리아의 북부 모딜리아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열두 살이 되던 해 파이리스트 칼리지에 입학하는데 드로잉 실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림은 타고난 재능도 필요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 후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드로잉를 배우는데 간단하게 회화도 함께 공부하게 됩니다.

포로를 끌고 가는 저격병 Sharpshooters Leading Prisoners, 1861

19세기 중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몇 번의 전쟁을 치릅니다. ​그림 속 장면은 오스트리아군 포로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이탈리아 군대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제목은 ‘오스트리아 포로들을 데리고 가는 베르사글리에리(Bersaglieri with Austrian Prisoners of War)인데, 베르사글리에리는 저격병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부대 이름 중 하나입니다. 그 부대원들은 ​머리에 검은 닭털을 꽂았다고 하는데 그림 속 병사들의 철모도 닭털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닭대가리’가 되는 것 같아 꺼릴 것 같은데, 사는 곳에 따라 의미도 달라지는군요. ​승자와 패자의 표정이 확연히 갈립니다. 전투에서는 져도 인생에서는 지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레가는 아카데미에서 15세기 회화의 규칙과 형식을 배우게 되는데 훗날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차분한 분위기는 이때 배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물한 살에 아카데미를 졸업 한 후에도 레가는 학교를 옮겨 다니며 몇 년 간 더 공부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이탈리아가 처한 환경이 그를 계속 학교에 머물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모성애 Motherhood, 34.7x20.5cm, oil on canvas

화가들이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가 모성애입니다. ​대부분의 구성도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담거나 젖을 물리는 장면인데, 이 작품은 이 두 가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방금까지 엄마 젖을 먹던 아이가 잠이 들자 엄마는 옷을 여미고 있습니다. ​단추를 잠그는 그 순간도 엄마의 시선은 아이의 얼굴에 머물러 있습니다. ​잠든 어린 저의 모습을 제 어머님께서는 수도 없이 보셨겠지만 저는 어머니가 잠든 얼굴을 지켜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머니의 그 눈빛이 쌓여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1848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운동에 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했는데 레가도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가디발디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 지원했었죠. 통일 전쟁이 끝난 후 1850년, 레가는 그의 첫 대작인 <의심하는 토마스>를 제작합니다. ​그리고 3년 뒤 모딜리아나 아카데미의 회원이 됩니다. 피렌체에 계속 머물던 그는 1855년 고향으로 돌아가 2년간 머물게 됩니다. ​일종의 금의환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처음 맞는 아픔 Il primo dolore, 50x39.5cm, oil on canvas, 1863

이걸 어쩌죠? 소녀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가고 있습니다. ​소녀의 손바닥 위에는 죽은 작은 새가 놓여 있습니다.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모습에서 소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새였는지 아니면 길을 걷다가 죽은 새를 발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는 처음 맞는 안타까움이자 슬픔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들이 끝없이 우리 마음을 흔들었고 그 순간이 지나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은 다시 좀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더 단단해졌던 것 같습니다. 새롭게 맞는 아픔은 그 이전에 만났던 아픔보다 더 아플 수도 있습니다.

레가는 가끔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 카페를 찾곤 했습니다. 그곳은 1850년대에 젊은 화가들이 즐겨 모이던 곳이었는데, 빛과 그림자에 관심이 많았던 그들은 나중에 마키아올리라고 불렸습니다. ​이 카페의 단골 중에는 잔도메네기도 있었고, 개에게 물려 세상을 떠난 아바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진중했던 레가는 앞뒤 안 가리고 모든 것에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농부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Peasants

고요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이 편안해 보입니다. ​맑은 가을 햇빛이 가득한 오후, 어깨에 배낭을 맨 부자가 밭으로 나왔습니다. 뒷모습은 키만 차이가 날 뿐 똑같습니다. ​지금은 갈쿠리보다 키가 작은 아이도 언젠가는 아빠보다 더 큰 키가 될 것이고 옆에 아이를 데리고 이 밭으로 나오겠지요. ​이런 풍경을 만나면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시간도 서두를 것 없다는 듯 느리게 흐르고 심장도 천천히 뛰는 것 같습니다.혼자 남겨진 소쿠리, 햇빛을 즐기고 있습니다.

매일 밤 끓어오르는 미켈란젤로 카페의 열기 속의 토론 속에서도 레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지켰습니다. ​그런 까닭 때문인지 1850년이 끝나 갈 무렵까지도 그의 작품은 아카데믹한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일종의 자존심 같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에 대한 레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민요 The Folk Song, 1867

피아노 앞에 모인 세 여인의 노랫소리가 높게 열린 창밖 아득한 풍경 속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얼굴을 보니 자매 사이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노래를 부르다보면 유대감이 생기는데 자매라면 어떤 화음이 나올지 짐작이 됩니다. ​가끔 4형제가 만나 어울릴 때가 있습니다. 같이 노래방엘 가게 되는데 우리는 저렇게 되지 않더군요. ​좋아하는 노래가 서로 다르기도 하지만 노래가 발표된 연대를 따져보았더니 거의 80년 가까이 차이가 났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한 곡은 1928년에 발표된 ‘세동무’라는 노래이고 막내동생이 부르는 노래는 노라조의 ‘슈퍼맨’이거든요. ​그나저나 이 작품의 묘사는 15세기 느낌이 납니다. 원근법과 관계없이 수직으로 처리된 바닥의 무늬 때문이죠.

레가는 마키아올리 멤버들과 함께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바텔리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가족의 아이들과 여인들은 그의 작품 속 모델이 되었습니다. ​특히 큰딸인 비르지니아와 사이가 좋았는데 10년 가까이 바텔리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간은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마흔네 살 때 레가는 파르마 전시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합니다. ​행복은 불행을 달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가의 세 형제가 이 무렵 세상을 떠나는 불행이 찾아오더니 그의 친구였던 비르지니아가 결핵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녀는 레가에게 친구 이상의 존재였지요.

죽어가는 마치니 The Dying Mazzini, 76.5x100.3cm, oil on canvas, 1873

그림 속 인물은 주세페 마치니입니다.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평생을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젊어서 이탈리아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레가에게도 중요한 인물이었겠지요.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도 조국의 앞날을 위해 뛰었던 몸은 세월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제 떠날 준비를 하는 투사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당당합니다, ​잠깐 한숨 자고 나면 좋은 세상이 와 있지 않을까, 혹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도착했는지는 그만이 알 수 있겠지요.

레가의 경력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기는 고요하고 낙관적인 것이 주를 이루었다면 후반기는 혼란과 가난한 경제 상황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분기점에 비르지니아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비르지니아의 죽음으로 슬픔에 찬 레가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눈에 문제가 생기면서 4년 가까이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합니다. ​훗날 레가는 거의 맹인이 되다시피 합니다. 화가 보라니와 함께 피렌체에 미술 갤러리를 열었지만 얼마 안 되어 망하고 맙니다. ​이제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더해지게 됩니다.

 

 

테라스 The Terrace

여인의 모습만 없었다면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과 분위기가 너무 비슷합니다. ​창 대신에 밖으로 열린 테라스가 있고 빛은 방안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림자는 작품 속 고요함을 만드는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는 여인의 모습은 정물 중 하나처럼 보입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선이 분산되는 느낌이 듭니다. 세로로 놓인 기둥과 홈통, 그리고 벽과 줄 때문일까요? ​기둥이 없고 위에서 내려온 줄이 없었다면 훨씬 근사한 풍경이었겠다 싶습니다.

쉰세 살이 되던 해 피렌체에서 개최된 전시회에서 피사로의 작품 두 점을 처음 만납니다. ​평생 외국을 나가보지 않은 그에게 인상파 대가의 작품은 충격이었겠지요. 빛의 효과에 가장 큰 흥미를 가졌었고 야외에서 작품을 완성하곤 했었던 레가는 피사로를 존경하게 됩니다. ​피사로의 작품 포스터를 몇 장 가지고 있는데 볼 때마다 참 대단하다 싶습니다.

엘레노라 토마시의 초상화 Portrait of Eleonora Tommasi, c.1884

초기의 레가 작품과 비교해보면 화풍이 변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명쾌한 선과 색, 그리고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면 선은 좀 더 모호해졌고 부드러워졌습니다. ​나이 들어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을 가끔 해보곤 합니다. ​이런 변화라면 나쁘지 않군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레가는 토마시 가족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그 집안 아들의 미술 선생님이 된 그를 토마시 가족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느낌이지만 레가도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남들로부터 환영받는 데는 이유가 있거든요. 1880년 대 중반, 예순 무렵의 레가는 거의 맹인이 되었습니다. 큰 덩어리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시력을 잃은 화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다리에 기대 선 시골 처녀 Country Girl Leaning against a Ladder, 38x 29cm, oil on canvas, c.1885

잠깐의 자투리 시간이라도 그냥 버릴 수 없다는 것일까요, 사다리에 몸을 기대 처녀는 뜨개질을 시작했습니다. 불편한 자세처럼 보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대 놓은 사다리에 몸을 올려놓으면 발판 때문에 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사다리로는 높은 곳으로 오를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건너 갈 수도 있습니다. 처녀는 사다리를 잠시 몸을 쉬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맑은 빛과 선명한 선, 그리고 차분한 구성으로 편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레가는 예순아홉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개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더구나 있는 자료는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어서 제 능력 밖이었습니다― 아쉬움이 남습니다. ​후텁지근한 날씨지만 아주 뽀송뽀송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