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문화예술 이야기

헨델, Piano Suite

금동원(琴東媛) 2015. 11. 29. 08:38

 

Handel - Keyboard Suites Vol.1 HWV 426-433 and Vol.2 HWV 435-441 (Gavrilov, Richter)

https://youtu.be/YVZC3J9a3Wo

 

Händel: Keyboard Suite HWV 428 - Daria van den Bercken, piano - Live Concert - HD

https://youtu.be/f-D8pUsIm5g

 

 https://youtu.be/EgVPrviDHSU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

요약 독일 태생의 영국 작곡가. 여러 편의 오페라를 썼으며 오페라의 시대가 저물자 오라토리오로 방향을 바꾸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음악에는 민족 정서가 담겨 있다고 여겨졌으며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오페라 〈리날도〉, 오라토리오 〈메시아〉, 모음곡 〈왕궁의 불꽃놀이〉등을 작곡했다.

○헨델


  후기 바로크 시대 독일 태생 영국의 작곡가로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은 바흐와 비교하여 당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대중적인 음악가다.

  헨델의 이름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며,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의 궁정 외과의였으며 어머니는 루터교 목사의 딸이었다.

  바흐와 달리 헨델의 집안에는 대대로 음악가가 나지는 않았으나, 헨델은 소년 시절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7세가 되던 해 바이센펠스 궁정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그의 음악을 들은 바이센펠스 공작은 크게 감동을 받고, 헨델의 아버지에게 음악공부를 시키라고 권유했다. 헨델의 아버지는 원래 헨델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이며 작곡가인 차하우(F. W. Zachau)에게 보내어 음악 공부를 시켰다. 이후 헨델은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뛰어난 연주자가 되었으며, 바이올린과   오보에 등 여러 악기를 배우고, 화성학과 대위법의 기초를 쌓는가 하면, 당시의 통상적인 학습방법대로 유명한 작곡가들의 악보를 사보하면서 공부했다.

 

 헨델의 침례 등록 기록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죽고 나서 헨델은 1702년에 법학도로 할레 대학에 입학했다. 이 당시 그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할레에 있는 개혁교회에서 일 년간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1703년, 헨델은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 위해 할레 대학을 떠나 당시 오페라의 중심지인 함부르크로 갔다. 함부르크에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 겸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오페라 관현악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된 1705년에는 첫 오페라인 〈알미라(Almira)〉를 작곡했고, 이어서 〈네로(Nero)〉 〈플로린도(Florindo)〉 〈다프네(Daphne)〉 등의 작품들도 작곡했다.

 

  한편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으며, 성공하려는 야심을 가진 작곡가 대부분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헨델 역시 1706년 함부르크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 메디치 가의 페르디난도 왕자의 초청으로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갔다. 이후 이탈리아에 3년간 체류하면서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였으며, 코렐리나 스카를라티 등 유명한 작곡가와 친분을 쌓았다.

  헨델은 피렌체에서는 이탈리아 어로 만든 첫 번째 오페라 〈로드리고(Rodrigo)〉를 작곡했고, 로마에서는 그가 체류하던 루스폴리 공작을 위하여 약 150여 곡의 세속적인 칸타타를 작곡했다. 1708년에는 오라토리오 〈부활(La resurrezione)〉이 코렐리의 오케스트라 반주로 루스폴리 궁정에서 공연되었다.

 

   나폴리에서는 〈아시스와 갈라테아(Aci, Galatea e Polifemo)〉 〈스페인 칸타타(Cantata Spagnuola, No se enmendera jamas)〉 등을 작곡했다. 또 베네치아에서는 1709년 12월 26일, 오페라 〈아그리피나(Agrippina)〉를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뒀다.

 

독일 할레에 있는 헨델의 생가

  독일 할레에 있는 헨델의 생가



  이후 하노버 공작의 초청으로 하노버 궁정 음악감독으로 적을 둔 후, 1710년 가을 런던으로 향했다. 1711년 초, 런던에서 오페라 〈리날도(Rinaldo)〉를 공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헨델은 일 년 후 자신을 고용하고 있던 하노버 공작의 허락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와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로 작곡한다. 1712년에는 〈충실한 양치기Il(Pastor fido)〉 〈테세오(Teseo)〉, 1713년부터 〈여왕의 생일을 위한 송가(Ode for the Queen's Birthday)〉 〈위트레흐트 테 데움(Utrecht Te Deum)〉 〈유빌라테(Jubilate)〉를 작곡하였다.

 

리날도와 아르미다

   리날도와 아르미다


  영국에서 상류층에서 인정받고 성공적인 작곡가 생활을 영위하던 헨델은 1718년, 섄도스 공작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곳에서 헨델은 시인인 존 게이의 〈아시스와 갈라테아〉에 곡을 붙인 종교음악 〈섄도스 앤섬(Chandos Anthems)〉을 작곡했다. 1719년에는 왕립 음악원을 설립하여 음악감독을 맡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계속해서 작곡하였다. 이때 작곡된 〈이집트의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in Egypt)〉〈타멜란도(Tamerlando)〉 〈로델린다(Rodelinda)〉 〈아드메토(Admeto)〉 등은 킹스 시어터에서 공연되었다.

 

   1726년 헨델은 비로소 영국 국민이 되었다. 그리고 왕실 부속 예배당의 작곡가로 취임하여 1727년에 〈조지 2세의 대관식 앤섬(Coronation Anthems for George Ⅱ)〉, 1737년에 〈캐롤라인 여왕의 장례식 앤섬(Funeral Anthem for Queen Caroline)〉을 각각 작곡했다.

그런데 1728년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Beggar's Opera)〉가 큰 인기를 끌면서, 영국 시민 계급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헨델은 여전히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고라고 생각했으나, 민족주의 오페라가 등장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대신 오라토리오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헨델은 오페라의 쇠퇴에 낙담하지 않았다. 1734년에 헨델은 코벤트 가든으로 자리를 옮겨서 몇 편의 오라토리오를 공연했는데, 헨델은 오라토리오의 막 사이에 연주하는 오르간 협주곡을 작곡하여 스스로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데번셔 공작의 의뢰로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했는데, 1740년 8월 22일부터 9월 14까지 불과 24일 만에 오라토리오의 걸작 〈메시아〉의 초고를 완성했다. 헨델은 〈메시아〉의 연주회를 거듭하며 악보를 수정했으며, 1742년 4월 13일에 공식적으로 초연하였다. 이후 10년간 헨델은 오라토리오를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형식으로 만들었다.

 

1808년 화재가 나기 전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하우스 극장 내부

  1808년 화재가 나기 전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하우스 내부


  한편 헨델은 오라토리오 외에도 수많은 기악곡을 남겼다. 〈수상음악(Water Music)〉 〈왕궁의 불꽃놀이(Royal Fireworks Music)〉 등 지금까지 연주되는 관현악곡들을 작곡했으며, 하프시코드나 오보에 등을 위한 협주곡도 다양하게 작곡했다.

  당대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걱정하던 영국인들은 종교음악에서 일종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때문에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주는 감동, 그리고 작곡가의 개인적인 인품은 영국인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헨델은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며, 앤 여왕, 조지 1세, 조지 2세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경제적인 후원도 받을 수 있었다.

 

  헨델은 1750년 네덜란드에서 사고를 당해 심한 부상을 당했으며, 1751년에는 녹내장과 백내장으로 〈입다(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실명했다. 그럼에도 꾸준히 도움을 받아 기존 작품을 수정하는 등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759년, 코벤트 가든의 정기적인 연주회에서는 그의 후기 오라토리오 공연을 개최했는데, 이 정기 연주회의 마지막 작품인 〈메시아〉 공연에 참석한 헨델은 연주 도중에 졸도하였다. 급히 집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759년 4월 14일 오전 8시에 운명했다. 헨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헨델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생전에도 음악과 인간적인 면모 모두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후원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줄 알았으며, 동시에 상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고전음악의 영역을 폭넓게 확대했다.


집필자 김상엽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로마제국과 곡물문제>

집필자 김지원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화학생물공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