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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현역시인 김남조-“인생은 크고 간절하고 귀한 것입니다”

금동원(琴東媛) 2017. 2. 10. 22:00

90세 현역시인 김남조

"인생은 크고 간절하고 귀한 것입니다."

 

 

 

▲ 김남조 시인이 ‘예술의 기쁨’에서 수령 600년 된 상수리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예술의 기쁨’은 시인이 남편의 이름을 딴 ‘김세중기념사업회’에 자택 터를 기증하면서 설립된 복합문화공간이다

 



“인생은 크고 간절하고 귀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마지막이 없으나
   시작엔 시작이 거듭 있습니다
   시작을 주관하는 분께서
   날마다 새 도화지를 나누어주십니다
   그러나 어느 날은
   이 도화지도 마지막이 됩니다

 - ‘시작과 마지막’(‘심장이 아프다’·2013)

 


   한 지인에게서 김남조 시인에 대한 근황을 들었다. 90세에도 여전히 곱고 정정하다며, 지력과 감성이 넘친다 했다. 김남조가 누구인가.

아흔 해를 살고, 그중 70년간 시인으로 산 현역시인. ‘여류시인’이 귀하던 1950년대, 김남조는 첫 시집 ‘목숨’을 냈다. 모윤숙·노천명에 이어 여성 시인이 낸 희귀한 시집이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써온 시가 900편에 이른다. 3년 전, 그는 열일곱 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를 냈다.

여성 시인뿐 아니라 108년 한국 현대시 역사 속에서도 그는 기념비적 존재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는 김남조의 70년 시인 인생을 되돌아보는 전시회가 9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린다.
   
   김남조의 시 세계는 웅숭깊다. 40대 초반 기자에게 ‘김남조’는 범접할 수 없는 석고 속 시인이었다. ‘겨울바다’ ‘아가’ ‘너를 위하여’ 등을 시집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었고,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로 시작하는 가곡 ‘그대 있음에’는 음악 교과서에서 배웠다. ‘정념의 기(旗)’는 수첩에 적어놓고 다니면서 마음이 어수선할 때 꺼내들었다. 그때마다 김남조의 시는 넓은 마음 자락을 펴서 고요히 감싸주었다. 60대 이전에 쓴 시가 그럴진대, 90세 시인의 혜안은, 그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인터뷰를 고사하던 시인은 기자의 팬심을 읽고 허락했다. 9월 30일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에 있는 ‘예술의 기쁨’ 2층에서 만나자 했다.  2년 전만 해도 이곳에 시인의 집이 있었다. 시인은 수십 년간 살던 자택 터를 김세중기념사업회에 기증했고, 이 터에 지난해 ‘예술의 기쁨’이라는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섰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조각한 김세중(1928~1986)이 시인의 남편이다. 시인은 남편의 이름을 딴 사업회를 만들어 매년 ‘김세중조각상’을 수여하고 있다. 올해로 벌써 30회째다.
   
   김남조 시인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남색 원피스에 단아한 남색 구두, 하늘거리는 흰색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특유의 퍼머머리는 여전했고, 과하지 않은 화장이 잘 어울렸다. 음성은 힘이 넘쳤고, 눈빛은 맑게 빛났다. 평생토록 독서와 사색, 자기 성찰에 전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매한 품격이라고나 할까.

 

 “90세로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숱하게 들었을 찬사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세월은 그냥 가지 않고 늘 발자국을 남기지요. 다행히도 나는 시력과 청력이 괜찮아요.

하나 선물을 받았다면 감성이에요. 감성의 고갈이 전혀 없어요. 기억은 자주 잊어버리지만 생각은 끝없이 가요.”
   
   두 시간 반 동안의 인터뷰에서 그는 ‘생명’ ‘감성’ ‘세월’ ‘성숙’ 그리고 ‘죽음’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지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었다. “꼭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라면서 인터뷰 처음과 끝에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 결코 짧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인생이 덧없다든가 순식간이라고 하는데, 내가 계산해 보니 삼만 몇천 번의 해돋이를 보며 살았어요. 그날 하루가 새로운 생애라고 할 때 삼만 몇천 번의 새 인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삼만 번의 기회이기도 하고, 삼만 번 새로운 것을 심을 수 있었다는 얘기예요.”   
   
   

- 90세는 어떤 나이입니까. 

"지나고 보니까 삶에 미숙한 점이 너무 많아요.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다른 이들의 삶을 보면서, 그 삶이 온당하지 않을 때 나의 이력이 다 거기에 있더군요.

 인간은 뭘 좀 안다고 해서, 할 줄 안다고 해서 성숙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어떤 전공자이든 시인이든 마찬가지예요. 이건 어떤 의미에서 기능성이고 인간 자체는

엇비슷하게 어리석어요.”


   
   - ‘인간적 성숙’이란 어떤 경지일까요.

   

“나는 노년이 되어서 얼마간 성숙해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시인의 언어가 너무 과장되고, 엄살도 많고 색깔을 입힌 게 많아요. 사랑이라는 말도 눈부신 광채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아갑니다. 이번에 이걸(영인문학관 전시회) 준비하느라 오래된 인쇄글자를 찾아보니 종이가 바스라지고 활자가 뭉개져 있더군요. 종이와 글씨도 늙는다는 것, 결국 소멸에 이른다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생이 참 숙연해요. 안 죽어 봤기 때문에 죽음을 피상적으로 생각했는데, 종이의 종말을 보고 내 종말이 현실감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시는지요. 

 “하지요. 죽음에 대해 승복을 하는 것 같아요. 기력이 약해지고, 생명의 쇠퇴가 오면서 밤이 깊어지듯 그렇게 사그라들겠지요. ‘가자’ 하면 ‘기다렸습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순한 승복이 있을 듯합니다. 90년을 살았다는 건 엄청난 것이지요. 사자나 호랑이도 한 20년 산다는데. 내가 허락받아 살아온 세월은 이미 넉넉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생에 대한 집착이 커지나요. 

 

 “커진다 작아진다는 차원보다는 더 경건해지는 것 같아요. 식물이든 동물이든 동시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았다는 건 커다란 의미의 형제이지요. 전부가 생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모래알도, 거기에 맺힌 이슬도. 이슬이 1~2분 사이에 공기 중으로 증발해버리면 아무도 기억 못 하는 것이 안타깝고 그렇습니다.”


   
   - 젊은 시절과 비교했을 때 감성의 결이 어떻게 다릅니까.

“젊었을 때에는 감성이 양극적이에요. 아름답다 아니다, 슬프다 기쁘다 했는데 지금은 중간층의 색채가 좋아요. 재밌고요. 햇빛을 좋아해도 비 오는 날도 좋고 흐린 날도 좋아요. 조금 흐리고 조금 개이는 것이 보이고, 새벽이 천천히 오는 것이 보여요. 종이를 넘기듯 옵니다. 이런 걸 느끼면서 나도 조금씩 자라는 것 같아요.”
   
   

- 오다 보니 나뭇잎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데요. 

“계절의 변화를 매 순간 감지합니다. 문득 ‘아, 가을이구나’가 아니에요. 비 오는 날과 안 오는 날, 아침과 저녁의 변화에 대한 감각이 이어지는 거예요. 우주가 생긴 이래로 구름이 1분 1초도 동일한 적이 없었어요. 무한히 변모하지요. 그 안에서 나도 변해온 겁니다. 나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도 매 순간 변모해요. 그 변모를 넋을 잃고 좇는 거죠. 나는 문자 메시지도 모르고, 휴대폰도 한 3년씩 뒀다가지방에 갈 때 충전해서 가지고 가고 그럽니다. 아이들이 걱정할까봐요. 나에게 있어 과학성과 현대성은 많이 결핍됐지만 문학 안에서나 인간의 본질 안에서는새것이 자꾸 나옵니다. 백색이 오백 가지라고 하지요. 인간의 마음속에는 안 보이는 층계가 있어서 그 계단마다 다른 것을 보고 느낍니다.”
   
   

- 그 새것들은 다가오는 겁니까, 찾아가는 겁니까.

 

 “내가 쓰는 모든 글이 나에게 따뜻하게 온 것은 아니에요. 백지를 대할 때 공포는 여전해요. 쓰기 전 무력감은 참담한 것이지요. 여기까지 들고 온 말이 바로 여기에서 없어지기도 해요. 힘들게 왔지만 그 시들은 나의 일부였어요. 결국 마지막에는 나와 나의 시가 함께 묻히고,

어떤 면에서는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나의 시에게’ 연작시 다섯 편을 썼다.

 2003년에 쓴 ‘나의 시에게’ 첫 시는 이렇게 맺는다.

‘나의 詩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 시인은 늘 새로운 것을 좇는 숙명을 지녔습니다. 70년을 시인으로 산다는 건 축복인 동시에 천형일 수 있을 텐데요. 

 

 “그렇지요. 목수가 책상을 만들 때에는 백 개의 나무를 똑같이 자르면 되는데 시인은 늘 다른 말을 해야 해요. 그러니까 항상 새로워야 하는 거죠. 내 안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서 기진맥진해져요. 그게 참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에 대한 성급한 욕구를 품으면 안 돼요. 새롭지도 않고 난삽한 시가 되어버릴 수 있지요. 오래된 시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려오기도 해요. 김소월의 시에서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중)를 보세요. ‘소리’가 아니라 ‘노래’로 표현하면서 갈잎의 소리에서 음악성을 발견한 겁니다.”
   
   

- 요즘에도 매일 새것을 배운다고 하셨는데, 선생님 시도 계속 발전할까요. 

 

 “내 글은 계속 좋아질 거예요. 인생이라는 책 한 권을 읽는다 할 때, 나는 거의 끝 페이지까지 다 읽었으니까 그만큼 내가 잘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모두 각자 인생의 저자예요. 내 책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읽을 줄 아는 것도 능력이에요. 한 송이 꽃이 있으면 꽃의 생애와 꽃의 이력을 읽는 것이죠.”
   
   

- 언제까지 시를 쓰실 건가요.

 

“언제까지 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5년은 글을 쓰지 않겠다고 오래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도 읽어야 하고, 못 본 자연도 보려 합니다. 지금 써둔 시가 서른 편 있어요.내년에 제자들이 90세 잔치를 하자고 합니다. 그때 마지막 책 출판기념회 모양새로 넘기려

합니다. 먼 여행은 못 합니다. 비행기 타고 다녀오면 오랫동안 몸이 아픕니다. 먼 곳에 있는 것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놀라움이란 몇 곳의 명승지뿐아니라 돌 밑에도 있고 어디에든 있어요. 가슴이 흡입하기에 따라서.”
   
   

- 마지막 5년 동안 시가 문득 찾아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찾아오더라도 내가 시와 더불어 대화자가 되어서 삼켜버리면 되지요.

 ‘이제 우리 나서지 말자. 여기에 앉아 함께 저녁 노을을 보자.’ 이럴 수 있지요.

나이 들면 글쓰기가 고통스럽고 자기 작품의 결점을 금방 알아버려요.

 ‘이 작품에선 두 줄 빼도 되겠다’ 이런 것에서부터 내 작품이 마음에 안 들죠.

그런 것이 괴롭고, 또 하나, 내가 안 써도 된다는 걸 너무 잘 알아요. 우리나라에 시인이 만 명이라지요. 이제는 관람석에 앉아 있자. 쉬다가 죽자,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 선생님이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상을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예술은 그렇게 위대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닙니다.

  실용성과 과학성도 중하지요. 인류를 돕는 기능, 가치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술가는 맨 끝에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추수 후 석양 속에서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그럼 사람이 되자고 합니다.”
   
   

- 1985년에 쓰신 시 ‘너를 위하여’에서 이미 ‘가만히 눈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이라고 하셨지요 

 

“이 세상이 진짜 오묘하고 신비롭고 눈물겹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임종의 집을 만들어서 마지막 가는 사람들의 피부를 어루만져 주라고 했어요. 옆에 누가 있다는 것,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노년의 세월에서는 주변에 많은 것들이함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도, 생명도, 사람도 있었고, 함께 동행해온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항상 나는 삶 안에 있다고 느낍니다. 사람 안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에도, 오솔길이든 어디든 누군가 곁에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늘 아래 나 혼자’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최소한 ‘하늘과 내가 둘이라고 하자’라고 말합니다.

 -출처;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