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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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詩 이모저모

조숙 / 이태준

금동원(琴東媛) 2017. 5. 25. 20:44

조숙

 

이태준

 

밭에 갔던 친구가,

“ 벌써 익은 게 하나 있네.”

하고 배 한 알을 따다 준다.

이 배가 언제 따는 나무냐 물으니 서리 맞아야 따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가다가 이렇게 미리 익어 떨어지는 것이 있다 한다.

먹어보니 보기처럼 맛도 좋지 못하다. 몸이 굳고 집찝한 군물이 돌고 향기가 아무래도 맑지 못하다.

나는 이 군물이 도는 조숙한 열매를 맛보며 우연히 천재들의 생각이 났다. 일찍 깨닫고 일찍 죽은 그들의.

어떤 이는 천재들이 일직 죽는 것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했다. 천재는 더 오래 산다고 더 나올 것이 없게 그 짧은 생애에서라도 자기 천분(天分)의 절정을 숙명적으로 빨리 도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인생은 적어도 70, 80의 것이어니 그것을 20, 30으로 달(達)하고 가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 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天命)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枯淡)의 노경(老境)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인생은 즐겁다!”

“인생은 슬프다!”

 

어느 것이나 20, 30의 천재들이 흔히 써놓은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 70, 80의 노경에 들어보지 못하고는 정말 ‘즐거움’ 정말 ‘슬픔’은 모를 것 같지 않은가!

오래 살아보고 싶은 새삼스러운 욕망을 느낀다.

 

-『무서록』, (깊은 샘, 1994) 중에서

 

 

 

 

 

작가 소개

 

  李泰俊, 호 : 상허(尙虛) 1904년 1월 7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그해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 1912년 모친마저 별세하자 철원의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1924년 퇴학하였다.

  1924년 학교 신문 [휘문 2호]에 단편동화 「물고기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다. 1925년 문예지『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신문·우유 배달 등을 하며 ‘공기만을 먹고사는’ 궁핍한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개벽』과 『조선중앙일보』의 기자, 『문장』지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출간을 시작으로 『가마귀』, 『사상의 월야』, 장편소설 『해방전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0년대 전후에 아동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많은 동화들은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해방 후에는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구인회’ 활동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저서로 단편소설집 『달밤』 『가마귀』 『복덕방』 『해방 전후』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수필집 『무서록』, 문장론 『문장강화』 『상허 문학독본』 등이 있다.

 

  작가의 말: 글짓기가 아니라 말짓기라는 데 더욱 선명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마음이요 생각이요 감정이다.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가까운 것은 글보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