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문학동네
제3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수록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김애란의 신작 소설집. 역대 최연소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젊은작가상 수상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다. 가까이 있던 누군가를 잃거나 어떤 시간을 영영 빼앗기는 등 상실을 맞닥뜨린 인물의 이야기, 친숙한 상대에게서 뜻밖의 표정을 읽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 언어의 영(靈)이 들려주는 생경한 이야기 등이 김애란 특유의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펼쳐진다. 작가생활 15년, 끊임없이 자신을 경신하며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 없는 김애란이 선보이는 일곱 편의 마스터피스.
○작가 소개
2002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에 「노크하지 않는 집」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2005년 대산창작기금과 같은 해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1980년 인천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대산창작기금과 같은 해 최연소로 제38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상을 꿰뚫는 민첩성, 기발한 상상력, 탄력있는 문체로 “익살스럽고 따뜻하고 돌발적이면서도 친근”(문학평론가 김윤식)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칼자국」으로 제9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어머니와 단둘이 반지하 단칸방에 사는 ‘나’가, 만삭의 어머니를 버려둔 채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해 떠올리는 상상을 의뭉스러운 서사와 경쾌한 문장으로 빚은 작품 「달려라 아비」에서는 근원적 결핍 또는 실존적 상처이기 쉬운 아버지 부재의 아픔과 페이소스를 아련히 전달하면서, 한국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전통적인 아버지와는 다른 모습의 아버지상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아버지 상이 갈등 또는 포용의 대상이었다면 김애란이 제시하는 아버지의 상은 아버지를 철부지로 표현하는 아버지 비틀기를 시도하고 있다.
작가는 엉뚱한 듯 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화법을 주로 구사하는데, 가볍고 경쾌하면서고 발랄하고 참신할 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사건과 인물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 예로「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후기자본주의의 일상을 예리한 시선과 단순명쾌한 문장으로 담아 전하고 있다.
또한 ‘딸이 말하는 어머니 이야기’라는 너무나 흔한 이야기를 독특한 감각과 표현으로 전혀 새로운 차원에 펼쳐놓은 「칼자국」에서는 작가 특유의 예리함, 신랄함, 명랑함, 상처가 될 법한 일을 상처로 구성하지 않는 독특한 발상법을 작품 곳곳에서 선보였다.
주요작품으로 소설집 『달려라. 아비』,『침이 고인다』,『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등이 있다.
○작가의 한마디
아픔을 농담처럼 말하는 것 역시 극복하려는 의지가 개입된 거겠죠. 제가 작품에서 말하게 된 상처는 대결이나 화해의 정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어쩌면 처음부터 농담처럼 주어진 상처일 겁니다
○목차
입동 _007
노찬성과 에반 _039
건너편 _083
침묵의 미래 _121
풍경의 쓸모 _147
가리는 손 _185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_223
○책 속으로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입동」중에서
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할머니는 집에 늙은 개를 들여 그 과정을 나날이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노찬성과 에반」중에서
이수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 있었다. ---「건너편」중에서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침묵의 미래」중에서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풍경의 쓸모」중에서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가리는 손」중에서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였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중에서
○출판사 리뷰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김애란은 수록작 가운데 한 편을 표제작으로 삼는 통상적인 관행 대신, 이번 소설집에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풍경의 쓸모」)는 문장에서 비롯됐을 그 제목은, ‘바깥은 여름’이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안’〔內〕을 골똘히 들여다보도록 한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입동」)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버린 누군가의 얼어붙은 내면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집 처음에 자리한 단편의 제목은 ‘입동(立冬)’이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부서진 일상을 따라가며 우리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자리에 우리를 위치시키게 될지 모른다. 하나는 싱그럽고 맑은 아이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옥죄이는 듯한 슬픔을 느끼는 ‘부부’의 자리, 다른 하나는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그들을 ‘꽃매’로 때리는 ‘이웃’의 자리. 그리고 불가해한 고통을 겪은 타인을 대할 때, 실상 우리의 모습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되리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다가도, 그 고통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그렇지만 소설은 이 외면을 확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소설집을 닫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는 남편을 잃은 아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편을 잃은 후 ‘시리(Siri)’에게 ‘고통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던 ‘나’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질문은,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남겨질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것. 그 아득한 질문에 골몰해 있는 ‘나’는 제자 ‘지용’의 누나에게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줄곧 외면하려고 했던 어떤 ‘눈’과 마주한다. 계곡물에 잠기며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지용의 눈과 말이다. 그 마주침 이후 ‘나’는 이전과 조금 다른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되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잃은 뒤 어찌할 바 모른 채,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어디로 갈 수 있느냐고 묻는 건 『바깥은 여름』 속 인물들이 나누어 가진 질문이기도 하다. 병에 걸린 강아지를 잃고 혼자 남겨진 아이의 모습에서(「노찬성과 에반」), 한 시절을 함께한 연인에게 이별을 고한 여자의 모습에서(「건너편」) 우리가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그 이후 그들이 어디로 가게 될지 쉽사리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지용이 죽기 전 움켜잡은 게 차가운 물이 아닌 사람의 온기였던 것처럼, 차가운 구(球) 안에 갇힌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시차’는 그간 익숙하게 여겨오던 생각이 깨어질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작품 「가리는 손」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여기서 시차는 잘 안다고 여겼던 인물과 우리 사이에서 생겨난다. 십대 무리와 노인과의 실랑이 끝에 노인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의 목격자인 ‘나’의 아들 ‘재이’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아무래도 그런 애들이 울분이 좀 많겠죠”라는 부당한 편견에 둘러싸인다. 그러나 김애란은 그런 편견들 틈에서 때묻지 않은 깨끗한 자리로 아이를 이동시키는 대신, 또다른 편견으로 ‘어린아이’를, ‘소수자’를, ‘타인’을 옭아맸을 가능성에 대해 묻는다. 천진하다고만 생각한 아이에게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터져나온 ‘나’의 탄식 앞에서, 우리는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하며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해온 시간들을 떠올리며 아연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바깥은 여름』은, 잘 안다고 생각한 인물에서부터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밀쳐둔 인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타인에게 다가가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명료한 단어가 아닌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고자 한 안간힘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언젠가 출연한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작가가 ‘소재를 이야깃거리로 소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소설집 편편에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배어 있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들이 최근 삼사 년간 집중적으로 쓰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어느 때보다 벌어진 ‘안과 밖의 시차’를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던 바로 그 시기에 쓰였다는 사실은, 김애란이 그 시기를 비켜가지 않고 그 안에서 천천히 걸어나가려 했던 다짐을 내비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의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친밀감과 반가움, 김애란은 등장 이후 줄곧 우리에게 그 각별한 체험을 선사했다. 이곳이 비록 언제든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가파른 절벽 위라고 하더라도, 그 언어가 화자(話者)가 한 사람밖에 남지 않은 소수언어처럼 타인에게 가닿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막막한 상황을 껴안은 채 써내려간 일곱 편의 단편이 『바깥은 여름』 안에 담겨 있다.
│작가의 말│
여름을 맞는다.
누군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거나 놓은
내 친구들처럼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인 채
여름을 난다.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
2017년 여름
김애란
○바깥은 여름인데, 아직 한 겨울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leesan72 | 2017-07-09 |
아마 윤대녕의 소설 <대설 주의보>(2010, 문학동네)를 읽었을 때였을 것이다. 친한 후배와 이 소설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요새는 예전과 다르게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소설 속에서 해피엔딩이란 너무 쉬운 현실적 타협이라고 이야기 하던 젊은 시절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우리도 이제 나이를 조금씩 먹나보다 하면서 어색해 했다. 그러면서도 아마 우리는 소설속의 장면들처럼 어긋난 인연들이 다시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이 세상을 슬픔으로 몰아내는 많은 것들 속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7년, 여름.
내가 작년부터 읽은 몇 권의 단편 소설집(최은영, <쇼코의 미소>, 공지영<할머니는 쉽게 죽지 않는다>, 김영하, <오직 두 사람>, 한강<채식주의자>)에서는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아니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 있었다는 희망을 떠올리는 것마저 사치스러울 만큼 소설 속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물론 이러한 우울과 절망 무기력의 원인에 대한 작가들의 진단은 각기 다르다. 그것은 공지영의 ‘할머니’와 같이 다른 것들을 잡아먹으면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독점 자본주의이기도 하고, ‘육식’을 강요하는 폭력과 억압이기도 하며(한강, <채식주의자>), 세월호 사건과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 사회가 보여준 천박함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최은영, <쇼코의 미소>, 김영하, <오직 두 사람>)
그리고 이러한 소설의 연장선에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이 있다.
2012년 <비행운> 이후에 발표된 단편 소설들을 묶은 이 소설집의 목차를 본 후, 마지막에 이 작품들의 발표된 연도들을 보았다. 2012년 이후, 1년에 한 편 정도의 작품을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1980년생인 작가가 쉽지 않은 시기를 넘어가고 있구나 하는 막연한 염려였다. 한 작가가 써내려가는 작품의 양이 작가의 성실성을 바로 드러낸다고 하지는 못하더라도, 한창 문학 작품을 써 내려갈 나이의 작가로서는 너무 과작(寡作)에 가까운 작품 발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대에 소설 쓰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당연한 회의의 결과가 과작(寡作)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소설을 쓰기에도, 소설 속에서 희망을 찾기에도 어려운 시대임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행운>에서 조금 암시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 소설집에는 초기작 <달려라 아비>에서 보이던 김애란 특유의 위트는 살아지고, 인물들을 압도하는 거대한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어긋남과 결핍을 반복하는 인물들의 일상이 아프게 드러나 있다. 여전히 김애란 소설 속 ‘아비’들은 부재하거나(<노찬성과 에반>), 살아있는 가족들에게 짊이 되는 존재이며(<풍경의 쓸모>), 그녀의 인물들은 ‘노량진’이라는 상징적인 곳을 통과했거나, 통과하는 중이며(<건너편>), 그곳을 통과해서 새로운 사회에 편입하더라도 예상치 못하는 죽음으로 고통받는 존재들이다.(<입동>,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어떻게 보면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이러한 고통들은 드물지는 않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심심찮게 목도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특별할 것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김애란의 소설들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슬픈 현실은 비극적인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상처’와 새로운 ‘상처’를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많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입동>, 37쪽)
그런 점에서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침묵의 미래>는 ‘서사’가 아니라 ‘상징’을 통해 오히려 이번 김애란의 소설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수 언어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소수 언어 박물관’에 모인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거대한 문명 언어에 의해 소멸되어가는 소수 언어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 언어’와 ‘개별적 언어’ 사이의 간극과 오해이며 그 차이로 인한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 인용했던 소설 <입동>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하는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그것은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침묵의 미래>, 145쪽)
에서처럼
그들의 필요에 의해 ‘오해’를 ‘이해’로 만든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슬프다.
‘재미’가 아닌 ‘희망’과 ‘해피엔딩’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나 “얼렁뚱땅 해피엔딩”을 좋아하게 된 나 같은 독자에게 소설을 읽으면서 잔잔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김애란식의 위트를 발견하게 될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답해야 할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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