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빗방울』
허형만/ 작가 세계
허형만 시인의 [가벼운 빗방울]은 서정의 원적原籍에서 길어올린 ‘성찰’과 ‘고백’과 ‘다짐’의 상상적 기록이다. 그동안 허형만 시인은 시종 맑고 고운 순수 모어母語의 속살을 섬세하게 굴착하여 보여주었고, 그의 시학은 이러한 언어적 속성을 통해 사회적 구체성보다는 근원적 보편성을 일관되게 탐색하고 추구해왔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원형적 사유로 집약되는 그 세계는 각별하고도 소중한 시인 자신의 ‘기억’과 ‘그리움’의 에너지를 통해 다양하고도 심원한 형상을 얻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모든 생명 앞에 겸손”(?자서?)하려는 마음을 담으면서 서정의 지표이자 뿌리로 더 깊이 가 닿고 있는데, 이처럼 허형만 시학은 우리 서정시의 깊은 광맥을 지속적이고 균질적으로 일구어온 미학적 성취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희를 넘기면서 펴내는 이번 시집은 이러한 서정의 원적으로서의 사유와 감각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그 심화 과정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성과이다. 그리고 더욱 청명하고 가벼운 언어 감각으로 감싸여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을 두고 있다 할 것이다
○작가 소개
1945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시집 [淸明](1978), [풀잎이 하나님에게](1984), [모기장을 걷는다](1985), [입맞추기](1987),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1988), [供草](1988), [진달래 산천](1991),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 [비 잠시 그친 뒤](1999), [영혼의 눈](2002), [첫차](2005), [눈먼 사랑](2008), [그늘이라는 말](2010), [불타는 얼음](2013). 일본어 시집 [耳を葬る](2014), 중국어 시집 [許炯万詩賞析](2003), 활판 시선집 [그늘](2012)이 있다. 영랑시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예술상, 펜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목포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중이다.
[시인의 말]
나의 스승은 말씀하신다.
생명 앞에 겸손했느냐.
더 겸손하여라.
종심從心의 나이에 열다섯 번째 시집을 내며 무릎 꿇고 듣는다.
○추천평
시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세계내적 존재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슬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그러한 슬픔을 우울한 비관주의로 바꾸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궁극적 자기 긍정으로 전화轉化하는 내적 계기들을 풍부하게 만들어낸다.
예컨대 그것은 사물들에 대한 외경과 생의 보편적 형식에 대한 믿음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오솔길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에 대한 미적 동경에서 발원하기도 하고, 가장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순수한 믿음에서 생성되기도 한다.
그 미적 동경과 믿음이 바로 그의 시편들에 편재遍在해 있는 형이상학적 힘이다. 허형만 시인은 이러한 사물의 불가피한 존재 방식을 통해 생의 비의에 가 닿으려는 일관된 의지와 실천을 보여주면서, 사물들 속에 편재해 있는 소멸과 신생의 원리에 대한 역설적 사유를 통해 성스러움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편력을 통해 우리도 잠시 그가 전해오는 짧고도 깊은 형이상학적 전율에 가 닿는다.
- 유성호(문학평론가)
오독誤讀 *1
허형만
너, 큰 실수한 거야
나를 잘못 읽었어!
사람이 한세상 살면서
행간과 행간 사이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넌 모른거야
오독誤讀은,오, 독毒이란 걸 알아야지
행간과 행간사이
때로는 쉼표와 마침표에도 스며 있는
순수한 영혼
빗살과 바람의 그림자도 읽었어야지
너, 정말이지 큰 실수한거야
나를 잘못 읽었어!
얻어도 놀라고
잃어도 놀라는 세상에
혼자, 혼자, 라는 것도 지우고
조용히, 조용히, 라는 것마저 버려
나에게 내 몸이 없으니
나에게 아무 근심도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온전히 읽었어야지
덧칠하고 비틀고 뒤집는
오독誤讀이야말로 오, 독毒이란 걸 알아야지
너, 큰 실수한거야
나를 잘못 읽었어
*及吳無身 吳有何患, 『老子』상권 제 13장.
오독誤讀 *2
허형만
너, 큰 실수한 거야
나를 잘못 읽었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너의 눈빛과 마음 사이가
그리도 굽이굽이 열두 굽이
깊고 험한 계곡인 줄 미처 몰랐어
오독誤讀은, 오, 독毒인줄 이제야 알앗어
사람은 만나기 위해 태어났지
아픔의 만남, 눈물의 만남
이 나이 될 때까지 많이도 겪어봤지만
두보杜甫처럼 곡강曲江까지 갈 것도 없이
저 앞산 두 고개만 넘으면 나도 어느덧 고희古稀
나, 정말 큰 실수했어
너를 잘못 읽었어!
먹물을 먹고 먹물을 먹어 먹물이 들었으나
내 영혼은 깨끗하기를 바라
비판과 다툼의 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거니
사랑과 더불어 증오의 차이가
얼마나 되어 무엇이 그리 다른가*
그렇다. 너를 읽기 전에 알았어야 했어
오독誤讀이야말로 오, 독毒이란 걸 알았어야 했어
나, 큰 실수했어
너를 잘못 읽었어!
*善之與惡 相去若何, 『老子』상권 제 20장.
-시집 『가벼운 빗방울』,(작가세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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