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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그를 뽑았더니…내 삶이 충전됐다.

금동원(琴東媛) 2017. 8. 12. 14:20


  플러그를 뽑았더니…내 삶이 충전됐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ㆍ전기·화학물질 최소화
ㆍ지속가능한 삶 꿈꾸는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


전기·화학제품을 적게 사용하는 생활도구 제작 기술과 유기농법을 익히기 위해 서울시의 ‘비전화공방’ 양성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지난 8일 서울혁신파크 안 텃밭에서 환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전기·화학제품을 적게 사용하는 생활도구 제작 기술과 유기농법을 익히기 위해 서울시의 ‘비전화공방’ 양성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지난 8일 서울혁신파크 안 텃밭에서 환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투명한 1.8ℓ 유리병에 모래알만 한 검은 알갱이들이 가득 들어 있다. 알갱이는 잘게 썬 야자껍질활성탄이다. 야자껍질활성탄은 정수기 필터에 사용하는 물질로 정수효과가 뛰어나다. 이 유리병을 수도꼭지에 연결하면 그대로 정수기가 된다. 


염화칼슘에 적신 여과지를 활용해 만든 반영구 제습기.

염화칼슘에 적신 여과지를 활용해 만든 반영구 제습기.


  폭 60㎝, 높이 60㎝, 두께 5㎝ 정도의 금속판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금속판 안에는 염화칼슘에 적신 여과지가 들어 있다. 이 여과지는 이틀에 1~1.5ℓ 정도의 습기를 빨아들인다. 푸른빛의 여과지가 분홍색으로 변하면 햇볕에 말려 다시 사용하면 된다. 반영구 제습기다.


단열판과 반사판을 이용해 만든 태양열 식품건조기.

단열판과 반사판을 이용해 만든 태양열 식품건조기.


   서울 은평구 혁신파크에 위치한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 한쪽에는 일상에서 사용하던 익숙한 기기들이 다소 낯선 생김새로 놓여 있었다. 보통 전력을 이용해 사용하던 것들이지만 이곳에 놓여 있는 물건들에는 플러그가 없다. 전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비전화 제작물’이기 때문이다. 정수기, 제습기 외에도 태양열 식품건조기, 비전화 냉장고, 비전화 커피로스팅기 등 겉모습만으로는 용도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다양한 제작물들이 눈길을 끈다. “모두 전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비전화공방에서는 이러한 제품들을 직접 만드는 기술을 익힙니다.” 이재은 비전화공방 매니저의 설명이다.

  ■플러그 없는 정수기, 제습기, 식품건조기 


야자껍질활성탄으로 만든 정수기.

야자껍질활성탄으로 만든 정수기.


   비전화공방은 전기와 화학물질 의존을 최소화해 자립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공간이다. 일본에서 ‘적정기술 발명가’로 불리는 후지무라 야스유키 교수가 시작한 운동이다. 니혼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무라는 2000년부터 일본 도치기현 나스 지역에 비전화공방을 열어 비전화 제작품을 개발·교육하고 있다. 천식을 앓는 아들을 위해 공기청정기를 발명한 게 계기가 돼 ‘어린이의 건강과 환경에 좋은 것’을 만드는 일에 매진하다 비전화공방을 만들었다. 후지무라 교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제안으로 지난 4월 한국에도 비전화공방을 열었다. 


   4월 열린 비전화공방의 ‘시민제작워크숍’에서는 일반 시민들도 참가해 다 같이 힘을 합쳐 태양열 식품건조기를 만들었다. 워크숍에는 후지무라 교수도 참여했다. 먼저 목재로 건조기를 단단하게 받쳐줄 다리를 직각으로 만들고 건조기 몸체를 만든다. 그 다음 단열판에 들어갈 밑판을 만들고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을 뚫는다. 단열판을 넣을 문을 만든 후 투명덮개를 붙이고 여기에 반사판을 붙이면 작업이 끝난다. 단열판에 건조할 식품들을 올려두고 투명덮개로 덮으면 반사판이 태양열을 반사해 식품이 건조되는 원리다. 재단된 나무판을 받았을 때만 해도 막막해하던 시민들은 식품건조기를 얼른 사용해보고 싶다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서울혁신파크 안 공터에 직접 쌓아올린 화덕.

서울혁신파크 안 공터에 직접 쌓아올린 화덕.


   비전화공방에는 현재 다양한 경력을 지닌 20~38세 청년 12명이 비전화 제작자 양성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내년 4월까지 1년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공동생활을 하며 비전화 제작자로 훈련받는다. 이재은 매니저는 “지난 1월 모집공고를 냈는데 10명 선발에 60명이 지원해 놀랐다”며 “서류로 20명을 선발하고 이들 모두 하루 동안 양성과정을 체험하게 했다. 몸을 쓰는 일이 많다보니 실제로 해보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짐작대로 몇 명이 지원을 포기했고 선발인원을 조금 늘려 최종 12명이 뽑혔다. 선발된 사람들은 비전화 기술을 익혀 비전화 제작물들을 직접 만들고 혁신파크 내에 264㎡(80평) 남짓한 땅을 개간해 유기농법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지난 3일 비전화공방을 찾았을 때 양성과정 참여자들은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작물들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텃밭에는 고추, 가지, 토마토, 잎채소, 콩, 감자 등 다양한 작물이 심어져 있다. 밭모도 자라 벌써 알곡이 여물어 있었다. 텃밭에는 담당자 이름이 적힌 팻말이 붙어 있는데 작물마다 재배법이 다르기 때문에 담당을 지정해 해당 작물의 작법을 제대로 익혀보자는 취지다. 텃밭 옆에서는 비전화 제작자들이 직접 만든 태양열 식품건조기에서 고추와 레몬 등 작물이 건조되고 있었다.



   비전화 제작자 양성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홍정현씨(30)는 “아파트에 살고, 버튼 하나로 TV를 켜고, 더우면 에어컨을 켜는 삶이 기본값으로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언제 어디서든 전기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고 식재료가 넘치는 삶이 축복이 아니라 강요된 선택지처럼 여겨졌다. 편리함의 대가는 때로는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으로 또는 소비를 지탱해야 하는 장시간 노동으로 지불됐다. 


   그러나 플러그만 꽂으면 바로 전기가 연결되고 다양한 농산품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비전화 기술을 익히고 농사를 배우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없을까. 홍씨는 “지금 청년들이 불안하고 초조해하는데 물론 나 또한 그러한 청년 중 하나”라면서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선택지를 알아보고 내가 좋은 일, 그리고 내 미래 세대에게도 좋은 일을 찾아 선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민영씨(33)도 덧붙였다. “귀농해서 유유자적 살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도시라는 주어진 제약 조건에서 수동적 소비가 아닌 능동적 소비를 하고 조금이라도 가치를 키울 수 있는 그 힘을 키우는 거라고 봐요.” 


   비전화공방의 목표는 단순히 전기를 아껴 전기료를 줄이는 게 아니다. 신수영씨(34·가명)의 정의에 따르면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확인하고 스스로 이를 조절해 쓰는 방법들을 고민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적정기술’과 ‘적당함’을 찾아가는 길”이다. 의식적으로 에너지의 흐름을 살피고 신경 쓰면서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신씨는 320ℓ짜리 작은 냉장고를 샀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불편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막상 살아보니 적당한 용량이었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많이 사 냉장고에 쌓아두지 않게 되면서 오히려 공간을 넉넉하게 사용하고 있다. 


  ■우리 목표는 단순한 전기료 절약이 아니다 


   비전화 제작자 양성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소비와 노동을 강요하는 삶이 주는 피로도에 지쳐 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는 노동을 재촉했고 노동은 다시 소비를 재촉했다. 김경미씨(30)는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해 남들이 말하는 좋은 학교에 입학했고 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도 다녀봤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 사회적 인정을 바라는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며 살아왔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4년간의 회사생활을 접고 여행을 다니다가 인도에서 요가를 배운 후 한국에 돌아와 요가강사로 일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피곤했던 삶인 거 같아요. 비교해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계속 들어야 하고…. 이게 좋대, 이게 핫하대, 이게 신상이래, 이런 말들 속에 살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밤새 술을 마시거나 했던 것 같아요.” 김씨의 말이다. 격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계속 소비를 했고,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극적인 것으로 메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노동하고 소비하는 연결고리가 깨진 것 같아요. 소비 말고 생산하는 삶에 대한 고민이 생겼어요.” 


  일은 열정이라는 명분 아래 삶의 건강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음악을 전공한 오수정씨(35)는 음향엔지니어로 7년 동안 일했다. 관련 분야에서 전문가였고 자신도 좋아하는 작업이었지만 어느 순간 기계가 돼 일하고 있었다. “창문도 없고 밤낮도 없는 공간에서 무슨 계절인지 날씨인지도 모른 채 밤을 새우고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일을 반복했어요. 그러다 크게 한번 쓰러졌는데 이후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참고 살았는데 더 이상 참으면 큰일 나겠다 싶었어요.”


  이들은 노동과 소비만이 악순환했던 삶에서 다른 방식의 순환을 실험 중이다. 에너지를 덜 소비하고, 스스로 몸을 써 비전화 기계를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자립하는 삶’을 꿈꾸는 중이다. 그러나 1년의 과정을 마치고 무엇을 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했다. 하반기에는 한 달에 이틀만 일하고 30만원을 벌어 그 돈으로만 생활해보는 ‘스몰 비즈니스’를 준비할 계획이다. 노동과 소비의 악순환에서 벗어난 삶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모색해보기 위해서다. 남수정씨(24)는 “지출을 줄이면 일을 덜 해도 되고, 일을 덜 하면 시간이 나니까 자립력을 기를 수 있고, 자립도가 높아지면 자급력이 올라가고 또 그만큼 지출이 줄어든다”면서 “이러한 선순환을 통해서 자립력을 높이고 지출을 줄여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수정씨는 “흔히 자립한다고 하면 혼자 나와 사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인터넷쇼핑에 의존하는 삶을 자립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며 “이 1년을 ‘좋은 경험’으로만 그치게 하지 않고 삶의 전환점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민영씨는 “1년의 과정이 끝난 후 어떻게 살 거냐고 묻는다면 아직 확신은 없다”면서 “그러나 적어도 나름 확신하고 있는 것은 이전과 이후의 삶이 같지는 않을 거란 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