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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시대를 훔친 미술/이진숙

금동원(琴東媛) 2018. 6. 16. 18:59

 

 

시대를 훔친 미술』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이진숙 저  | 민음사

 

  변천사보다 훨씬 더 유구하고, 인간의 진실에 가장 핍진해 있는 회화를, 시대별.어권별로 균형 있게 그러모아 한데 펼쳐 놓고 인간과 세계의 문화를 관찰해 보는 교양서이다. 피렌체 르네상스와 프랑스혁명부터 양차 세계대전, 미국 대공황까지 인간 자취로서의 예술사를 한눈에 살펴본다.

  인간의 그리고자 하는 욕망에 힘입어 굵직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이 차곡차곡 회화에 담겨 왔기에, 몇 장 명화를 주의 깊게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히 격동의 세계사를 짐작할 수 있다. 유미주의와 예술지상주의 이전,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으로서 회화를 감상하고 독해하는 길을 안내하는 이 책은 지엽적인 미술사가 아닌 총체적 세계사를 소개해 줄 것이다.

  러시아 문학과 미술을 전공한 뒤로 주요 일간지에 미술 평론을 게재하고 여러 단체의 교양 강의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미술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전파해 온 평론가 이진숙은 특유의 부담 없고도 담백한 기술로, 세계사의 주요한 기점들을 일군 화가들 회화로 설명해 낸다.

 

  ○작가 소개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루카치의 소설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여행 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에 크게 감명 받아 평생의 업으로 여겨 오던 문학을 등지고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유학 기간 러시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세계 각 국 미술작품을 보면서 각별한 감동을 받았고, 이를 다른 이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귀국 후 청담동 박여숙 화랑에서 5년간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생생한 미술 현장 경험을 쌓았다. 서울산업대 등에서 미술 강의를 하며 월간 『탑클래스』에 우리 시대 미술가들에 관한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현재는 토털 아트 컴퍼니 ‘인터알리아’에서 아트 디렉터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 작품에서 느꼈던 각별한 감동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일을 삶의 과제로 생각하고 다양한 강의와 글쓰기를 통해 ‘아름다움 함께 나누기’를 실천해 오고 있다. 특히 그간 국내 소개가 미진한 러시아 미술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는 아트 에세이 『아름다움에 기대다』가 있다. 작가는 아트 에세이를 쓰는 일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기’를 실천하는 방법이며 던져두었던 문학과 미술을 행복하게 조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 리뷰

  단지 미술사가 아니다, 그림으로 읽는 인간과 세계의 역사다!
  피렌체 르네상스와 프랑스혁명부터 양차 세계대전, 미국 대공황까지 인간 자취로서의 예술사를 한눈에 살펴본다

   역사는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 아니다. 역사 속엔 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실제로’있다. 그 시대의 삶은 어떠한가, 제도 변화는 그들 삶에 어떤 의미인가,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자 했는가에 대한 탐구, 모든 사건의 인간적인 가치와 의미에 대한 탐구는 예술의 몫이다. 예술은 언어를 넘어선 인간적인 실체와 ‘세계의 살’을 다룬다. 역사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므로 섣부르게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술과 관련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사회적 통합을 기원하는 그림은 그려질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반면 분열과 학살의 그림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본문에서

  * 2008년 ‘올해의미술인상’에 빛나는 오늘날 한국 회화계의 젊은 주역 홍경택의 「모놀로그」(2008)표지 그림으로 장식
  * 세계사적·예술사적으로 유의미한 회화 174장 본문 수록, 그중 28장을 가려 연대순으로 부록 「이 책에서 마주할 순간들」에 본문보다 앞서 공개 


  1. 그림, 한 장의 정직한 시대 보고서

   회화라는 매체의 기원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다. 그러나 회화사라고 할 때 우리는 서구의 특정 미술 사조사 정도를 떠올린다. 문자의 변천사보다 훨씬 더 유구하고, 인간의 진실에 가장 핍진해 있는 회화를, 시대별·어권별로 균형 있게 그러모아 한데 펼쳐 놓고 인간과 세계의 문화를 관찰해 보는 교양서 『시대를 훔친 미술』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인간의 그리고자 하는 욕망에 힘입어 굵직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이 차곡차곡 회화에 담겨 왔기에, 몇 장 명화를 주의 깊게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히 격동의 세계사를 짐작할 수 있다. 유미주의와 예술지상주의 이전,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으로서 회화를 감상하고 독해하는 길을 안내하는 『시대를 훔친 미술』은 지엽적인 미술사가 아닌 총체적 세계사를 소개해 줄 것이다.

  러시아 문학과 미술을 전공한 뒤로 주요 일간지에 미술 평론을 게재하고 여러 단체의 교양 강의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미술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전파해 온 성실한 평론가 이진숙은 특유의 부담 없고도 담백한 기술로, 세계사의 주요한 기점들을 일군의 화가들 회화로 설명해 낸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아테네 학당」(1510)에서는 화려한 피렌체 르네상스를,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쟁의 참화」(1815) 연작을 통해서 나폴레옹전쟁과 그 참상을,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2)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열기와 생명력을, 얼마 전 영화 「미스터 터너」(2014)로 재조명된 바 있는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1840)을 통해서 무도한 악습 노예무역을,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의 「제4계급」(1901)에서는 차티스트운동으로부터 촉발된 전 지구적 노동운동의 본격화를,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1930)으로는 아메리칸드림의 붕괴와 대공황을 직관적이고도 흥미롭게 밝혀 말한다


  ★디에고 리베라의 「멕시코의 역사」(1935)
  그가 대통령궁에 그린 거대한 벽화 「멕시코의 역사」에는 멕시코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담겨 있다. 중앙에는 멕시코혁명의 주역인 사파타가 TIERRA Y LIBERTAD(토지와 자유)라는 멕시코혁명의 슬로건이 쓰인 붉은색 깃발을 들고 등장한다. 그 아래에는 멕시코 독립 영웅인 미겔 이달고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흰색 깃발을 들고 있다. 흰옷을 입은 농민군들은 이 영웅들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멕시코의 상징인 독수리가 선인장을 밟고 선 채 뱀을 부리로 물고 있다. 멕시코의 구원과 인디오의 전통, 새로운 국가의 출현을 상징한 것이다. 이외에도 혁명으로 제거된 독재자 디아스와 그를 둘러싼 외국인 자본가들과 기업형 농장주들의 모습도 보인다. 리베라는 혁명의 과정을 포괄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 속에 사파타를 지지했던 저항군의 우두머리 판초 비야와 사파타 살해의 교사자까지 모두 그려 넣었다. -『시대를 훔친 미술』 459~462쪽

   디에고 리베라의 「멕시코의 역사」(1935)에 대한 풀이다. 감상적인 형용사나 추상적인 수식보다는 그림의 요소에 대한 세세하고도 객관적인 설명이 해당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혁명의 과정을 포괄적으로 보여 주”려고 했던 디에고 리베라를 모범으로 삼은 듯 이 책은 작품 생성의 배경과 실제 결과물의 총체적인 상(相)을 한눈에 보여 준다. 물론 비단 리베라뿐 아니라 모든 회화는 종적 시간성을 지닌 역사를 수평적인 단면 위에 입체적으로 세우는 매체다. 회화는 혁명의 전 과정, 아니 역사의 총체를 포괄적으로 다루기에 그 감상은 한 점 공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진 인간 역사의 유구한 선을 따라가는 놀라운 체험이 된다. 위 인용된 단락의 다음 문단에서 이진숙은 화가가 “혼혈로 태어난 메스티소가 인종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할 미래적 존재라고 보았다.”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림 탄생의 배경은 물론 예술가의 철학적 세계관과 장래의 전망까지도 아울러 설명한다. “사회적 통합을 기원하는 그림은 그려질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반면 분열과 학살의 그림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라는 저자의 문장은 역사(회화사)를 배우는 것이 그저 단순 사실의 습득에만 그치지 않고, 하나의 건전한 세계관, 즉 긍정의 문화와 공동체의 결속감을 다지는 토대가 되어 준다는 역설이다.

 

  2. 새로운 회화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적 명작의 향연

   앞서 밝혔듯, 이 책은 지엽적인 미술 사조를 설명하거나 예술가들의 바이오그래피를 설명하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화사 거장들의 데뷔작, 대표작을 막론하고 소개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화들의 아우라는 결코 숨길 수 없다. 붓과 물감의 회화사를 주도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유럽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지역까지 포괄하는 응달의 미술 작품들은 저자의 애정 위에서 선명히 빛을 발한다.

  극단적인 명암 대조법 ‘키아로스쿠로’를 사용하여 평평하고 단조로운 회화에 마치 연극 무대에서나 볼 법한 극적 분위기를 부여한 미켈란젤로 카라바조의 「성 바울의 회심」(1601), 마치 환영을 보는 듯한 눈속임 그림 ‘트롱프뢰유’로 종교적 신성을 극대화한 안드레아 포초의 「성 이그나티우스에게 바치는 경배」(1694)는 책의 펼침면에 담긴 것만으로도 독자의 눈을 황홀케 한다. 근대로 넘어오면 이 황홀감은 당혹감으로 모습을 바꾼다. 르네상스 이후 성문법처럼 지켜져 오던 전통적 그리기 관행을 폐기하고 ‘지금, 여기’현대인의 일상을 예찬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 의미론적 중요도를 지니지 않은 인물들의 우연적인 행보를 포착한 귀스타브 카 유보트의 「비 오는 날의 파리」(1877), 즉흥적인 시각을 초점화한 인상주의의 대표 작가 클로드 모네의 「아르장퇴유 근처의 양귀비 들판」(1873)이 이룩한 주제적.구도적.시각적 혁명을 통해 저자는 모더니티의 전복 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나아가 『시대를 훔친 미술』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쿠즈마 페트로프보트킨의 러시아 상징주의 작품, 엘 리시츠키의 포스터, 19 세기 후반 성행했던 한국 민화와 같은 미학적으로 독보적인 화풍을 설명하는가 하면, 야수파 앙리 마티스와 입체파 파블로 피카소, 절대주의파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분석을 통해 회화사적 ‘친부 살해’의 양 상을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으로 묘파해 나간다.


 ★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1907)
  스페인의 사창가 아비뇽에 있는 창녀들을 그린 이 그림은 현실에는 비너스는 없고 창녀만이 있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주제적으로 계승한다. 여기 아비뇽의 처녀들은 대부분 ‘누워 있는 비너스’를 가장 에로틱한 경지로 끌어올린 앵그르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시에 이 자세들은 세잔이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에서 반복해서 그린 도상들이기도 하다.(……)“반 고흐에게 일본 판화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프리카가 있다.”라는 피카소 자신의 말처럼 그 역시 비유럽적 전통을 그림 속에 끌어들였다. 옆면 몸에 정면 눈이 그려진 왼편 첫 번째 아가씨는 이집트 부조를 참고한 것이었다. 또 오른편 두 아가씨의 얼굴들은 저 유명한 아프리카의 마스크였다. -『시대를 훔친 미술』 397쪽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또는 괴물로 보였다.”라는 칸바일러의 문장을 인용하며 친부 살해의 가장 적절한 예로서만 극적으로 포장되어 온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사실은 마네의 주제, 앵그르와 세잔의 도상, 아프리카 마스크와 이집트의 부조라는 ‘전통들’을 계승했다는 이 책의 설명은 흥미롭다. 후대의 진정한 일격, 유의미한 저항은 전(前)세대(지역을 가리지 않고)에 대한 경의와 참조를 전제한다는 심오한 통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회화라는 유기체들은 각자의 생명력을 자랑하듯 뿜어내는 것 같지만, 그들 사이의 긴장과 상호작용이 하나의 큰 물줄기를 형성해 간다. 기술의 발전을 통한 문화적 변천이라거나, 특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사조의 탄생이라는 설명만으로 회화를 풍부하게 감상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대를 훔친 미술』 속 그림들은 서로를 모방하고, 동행하고, 전복하고, 살해하면서 회화의 일대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3. 예민한 화가의 초상, ‘모던’을 포착하다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링컨의 말은 한 사람의 얼굴에 그이의 생애와 세계관, 넓게는 시대상이 담겨 있음을 설명하는 데도 유효하다. 예술가가 교묘한 장기를 지닌 장인이기 이전에, 한 시대를 살았던 사회의 구성원이자 시대를 고찰했던 기록자임을 감안하면, 예술가가 그린 초상화들은 레지스 드브레의 말처럼 ‘세계의 살’을 다룬 중요한 증표임이 확실하다. 『시대를 훔친 미술』에는 ‘시대를 훔친 얼굴들’역시 여럿 산다. 우생학과 인종론이 판치던 19 세기 말, 전시 대상으로 전락했던 남아프리카 여인 ‘호텐토트의 비너스’세라 바트만의 초상화, 삼일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1919 년 한국에 방문했던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려 낸 「과부」, 광란의 1920 년대 미국에서 정신적 빈곤을 끌어안은 채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고군분투하는 여성을 신즉물주의풍으로 묘사한 오토 딕스의 「저널리스트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화」(1926)는 감상자로 하여금 이 얼굴들에게서 시대적 과오와 연대적 책임을 통감하게 한다.

  인간의 모든 문화 영역이 그렇듯 회화에서도 “근대 문화의 주체인 ‘개인’은 이토록 고통스럽게 등장했다.”예술가는 때로 자기 자신을 그림의 소재이자 주제로 삼았다. 타인이 그린 렘브란트가 아니라, 렘브란트가 그린 렘브란트이기에 의미가 있는 초상이 있다. “어떻게 표현하고 기록하든 렘브란트의 유일한 관찰 대상은 바로 ‘나’다.(……)고독한 근대적 자아의 틀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렘브란트가 앓았던 그 고독과 불안이라는 병을 우리 역시 앓는다.”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국제적 소요와 국내 정세, 새 시대로의 이행 과정 속에서 화가는 자기에 함몰되거나 천착했다. 이는 외부를 보지 않았으나 외부(근대)에 대한 인식이었다. 예술가의 자의식이 담긴 자화상들의 구슬프고도 절절한 사연에 이 책은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한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군인 자화상」(1915)에는 붓을 들고 있어야 할 오른팔이 뭉툭 잘려 나간 화가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예술가가 군복을 입은 채 불구가 된 모습 자체가 ‘예술 적대적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에곤 실레의 「가족」(1918)은 스페인 독감의 희생자가 되기 이전의 짧고 덧없는 희망과 평화를 갈무리한다. 이 외에도 멕시코의 민족성과 혼혈 문제를 부각한 프리다 칼로의 자화 상(1929), 공포의 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전체의 민족적 아픔이라고 할 만한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여권을 들고 있는 나의 초상」(1943)등도 책에 소개되어 있다.

  ★左: 에드바르 뭉크, 「스페인 독감을 앓을 당시의 자화상」(1919)
  ★右: 에드바르 뭉크, 「스페인 독감을 앓고 난 후의 자화상」(1919)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도 스페인 독감을 앓았다. 어머니와 어린 누이의 죽음으 로 어린 시절부터 옆구리에 죽음 을 끼고 살았던 뭉크는 스페인 독감을 이겨 냈다. 혹독한 병을 앓을 때 뭉크는 「스페인 독감을 앓을 당시의 자화 상」을 그렸다. 병중의 그는 침대 옆 의자에 가운을 입고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다. 죽음의 침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극도 로 수척해진 모습으 로 입을 벌린 채 관람객을 향한 그의 얼굴은 젊은 시절 그렸던 「절규」를 연상시킨다. 그는 죽음의 골짜기를 또 한 번 통과했다. 「스페인 독감을 앓고 난 후의 자화 상」에서는 좀 더 결단력 있어 보이는 자신을 그렸다. 빛이 들어오는 창쪽으로 그는 다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십 대 중반을 넘어선 뭉크는 병을 앓은 뒤 그는 급격하게 나이 든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병을 이겨 낸 자 부심과 새로운 결의,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병의 흔적을 모두 끌어안은 채 뭉크는 우리를 바라본다. -.『시대를 훔친 미술』 427~428쪽 


 위 인용문의 마지막 줄 “그는 살아남았다. 병을 이겨 낸 자 부심과 새로운 결의,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병의 흔적을 모두 끌어안은 채 뭉크는 우리를 바라본다.”는 시대적 희생이나 아픔을 뛰어넘은 예술가의 사명감과 초인적인 붓의 의지를 표현한다. 예술은 우리 감상자들 일상의 지근거리에 있지만 한편으로 암울한 세계의 비전에 낙담하지 않고 붓으로 생의 의지와 현실 개선의 염원을 그려 나가는 예술가의 생애 앞에서 우리는 절로 숙연해진다.

 


  4. 길 잃은 현대인, 미술 속에서 삶의 행로를 모색하다

   ★니콜라스 마에, 「당근 껍질을 까는 여인과 곁에 선 아이」(1655)
  꼬마 아가씨의 저 진지한 눈빛이 없다면 이 장면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림 속 꼬마 아가씨는 거기서 어떤 ‘가치’(의미)를 찾은 게 분명하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의미 없던 일이 유의미한 일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가치 있던 일들이 무가치해지기도 한다. 인간의 행동 양식은 늘 비슷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고 다수가 그 행동을 반복할 때, 비로소 역사는 바뀐다. 만조 때 바다에 나가면 밀물이 밀어닥치는 것만이 보인다. 반대로 간조 때는 썰물이 되어 모든 게 빠져나가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러나 밀물과 썰물은 늘 변함없이 반복되는 바다의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또 길게 보면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 밀물과 썰물은 결국 지형을 바꾸고 만다.
하루하루를 사는 동시대인들에게는 비슷비슷한 행동의 반복으로 보이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결국은 변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역사는 인류가 ‘의미’를 찾고, ‘의미’를 살고, 그 ‘의미’의 핵심을 후대에 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대를 훔친 미술』 21~23쪽 


   유명하지 않은 네덜란드 풍속화가의 위 작품에는 거창한 사건도 대단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평범하고도 평범한 장면이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평범함을 다룬 예술이 평범한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지난한 일상과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모든 회화는 그려진 것에 대한 예찬이다.”라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오랜 시간 무수한 예술을 낳아 왔다. 예술이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을 다룰 때, 예술이 예술이 아닌 삶을 소재로 삼을 때, 우리는 예술에 서 오락을 넘어선 성찰을 얻고 인생 행로를 수정하기도 한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1993)
   1993 년 독일이 통일되고 나서 전쟁 희생자를 위한 기념관 노이에바헤가 재개관하면서 케테 콜비츠가 남긴 작은 조각품이 확대되어 설치되었다. 슬픔이라는 뜻의 피에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조각품의 정식 제목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로, 강력한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1938년 작품이다. 전후 독일 정부는 여러 차례 나치즘을 낳았던 과거를 반성했다. 독일에서 대량 학살이 가능했던 것은 나치의 공포 정치와 이에 대한 국민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 1985년 5월 8일, 종전 40주년을 맞이하여 서독 대통령 바 이체커는 중요한 연설을 한다. (……) “과거에 대해 눈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다. 비인간적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에 노출될 소지가 많다.” 독일인의 성숙한 역사 인식을 보여 주는 말이다.” -『시대를 훔친 미술』 541~543쪽

   우리가 예술을,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이진숙은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인류의 오래된 꿈을 확인하고 그 꿈을 이어 가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진부하지만 선뜻 실천하기 어려운 이 묵직한 여정의 첫걸음에 『시대를 훔친 미술』은 분명 친근한 셰르파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