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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산책

'광장'의 최인훈 작가 별세

금동원(琴東媛) 2018. 7. 24. 09:57

 

 

 

 

  어제(23일) 세상을 떠난 최인훈 작가를 추모하며 문학과지성사 공동창립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병익은 "작가로서 영향력이 컸지만, 문학권력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도 않고 오직 글만 쓰고 문학으로만 말한 분이다. 정말 예술가였다"고 말했습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린 빈소에서 만난 김 평론가는 고인을 "유명 작가라면 사회적·세속적 지위를 욕망하기 마련인데, 그분은 그런 데 전혀 욕심이 없었고 오로지 글 읽기·쓰기에만 전념했다.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다른 사회활동이나 대외적인 활동을 전혀 안 했다. 타고난 작가이기도 하고 모든 걸 수렴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어디에 매이지 않는 자유지식인이었다"고 돌아봤습니다.

  또 "그분이 감으로써 그분이 살던 시대도 함께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거다. 한 시대가 가고 있다는 설움이랄까 그런 걸 느낀다. 어차피 시대는 변하니까 그분을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사표를 삼을망정 따라 할 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광장'을 통해서 분단 현실을 제기하기도 하고, '회색인'을 통해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기도 하고 환상의 충돌로 내면적인 번뇌를 드러내기도 했으며, 서간 형식 등 비전통적·실험적인 수법으로 현실을 표현했다. 특히 '광장'을 기존의 한문 혼용 문체에서 한글 전용 문체로 바꿨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한때 동료 교수로 지낸 정현종 시인은 빈소에 들리는 목탁 소리를 듣고 "고인도 승려 같은 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학교에 같이 있을 때 한 번은 같이 소풍을 갔다. 경기도 어디를 갔는데,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시냇물에 들어갔다. 그분이 평생 맨발로 시냇물에 들어온 적이 처음이라고 해서 놀랐다. 대단히 지적인 작가이면서 아주 아이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고 추억했습니다.

  빈소를 찾은 후배 작가 이인성은 "최인훈 선생님은 근대를 넘어서 동시대 현대소설이라는 것의 문을 처음 열어주신 분인 것 같다. 한국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다. 선생님 이전과 이후는 소설 쓰기 자체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주로 '광장'을 많이 얘기하는데, 나는 '회색인'이나 '서유기'를 읽으면서 쇼크받고 영감도 받았다. 이런 작품들에 대해서는 난해하다는 이유로 조명이 많이 안 된 듯한데, 전체적으로 한번 재조명이 되고 독자들이 읽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숙명여대 교수인 최시한 작가 역시 "흔히 김승옥이 우리나라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매우 지적인 상상력을 보여준 분이 최인훈 선생님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환상적이기까지 한 모던한 상상력을 잘 보여줬다"며 "나는 대학에서 문학개론 시간에 늘 '웃음소리'를 갖고 수업을 한다. 너무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작가로서 많이 읽고 깊이 사색해야 한다는 걸 아주 분명히 보여준 분이기도 하다"고 애도를 표했습니다.

최인훈 작가 빈소에 놓인 대표작/ 사진=연합뉴스

 

 

  서울예대 제자 강영숙 작가는 "예술론을 주로 가르치시면서 늘 엄격하고 어려운 분이셨는데, 2015년 제자들이 팔순 행사를 열었을 때 인간적으로 대해주셔서 참 좋았다. 손을 잡아주시면서 글쓰는 일을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잘 쓰라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걸 쓰라고 하셨다. 그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거라 생각 못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역시 제자였던 윤성희 작가도 "선생님께서 소설 강독 수업을 종종 했는데, 언어에 엄격하셨던 기억이 있다. 사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울예대의 중심이셨고, 발자취를 잘 남겨주셔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되는 분이셨다"고 떠올렸다.

  최근 고인이 오랫동안 몸담은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시작한 젊은 작가 정용준은 "수능 세대로서 선생님 작품 '광장'을 교과서로 접하고 공부한 입장이다. 작가가 되면서 후배로서 더욱 뵙고 싶었고, 학교(서울예대)에 선생님이 쓰시던 방(연구실)이 아직 그대로 보존돼 있어서 종종 그곳에 가서 머물기도 했다. 언젠가 가까이 뵐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떠나셔서 애석하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최인훈 작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좋은 작가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들이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최인훈 선생은 작가로서 축복받은 사람에 속하고, 어떤 부분은 타고나기도 했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태어나고 남한에서 살게 된 것은 주어진 운명이지만,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한 선택은 자기가 한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빈소에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영화감독 이창동이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습니다.대중적으로 유명한 공지영 작가도 트위터에 "분단을 그보다 더 지적이고 섬세하게 지적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책갈피를 넘기며 생각들이 떡갈나무 이파리들처럼 펄럭이게 했던 선배님 고이 잠드소서. 남은 후배들이 통일의 문학을 할 수 있게 빌어주소서"라고 애도 메시지를 올렸습니다.

 

  고인과 오랫동안 교유한 문학평론가 김주연 숙명여대 명예교수와 문학평론가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등은 추모사를 낭독했다. 김 교수는 “당신은 분단 한국의 뜨거운 상징이 되었던 ‘광장’이라는 문학공간을 창작하시고 중립국으로 들어가셨다. 주인공 이명준은 바다로 침잠하였다. 많은 독자들이 정치적으로 이 일을 해석해 왔지만 저는 그 자리가 당신이 선택한 문학의 나라라고 읽고 있다. 문학의 나라는 중립국이며 작가의 자리는 바다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많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의 자리, 작가의 자리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방 교수는 “‘광장’에서 선생은 극과 극의 대립과 나뉨이 없는 세상, 먼 중성의 세계를 꿈꾸었다”고 고인의 문학세계를 반추했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분단 작가' 최인훈 '하늘 광장'으로 떠났다

  23일 별세… '광장' 작가

 

  최 작가는 올 들어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그는 23일 오전 10시 46분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고 유족이 이날 전했다.향년 84세. 최 작가는 분단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남한과 북한을 제 3의 눈으로 비판한 소설 ‘광장’(1960)을 썼다. 분단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 최 작가는 분단 종식을 끝내 목격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최 작가는 1934년 두만강변 국경 도시인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자수성가한 목재상 부부의 4남 2녀 중 맏이였다. 해방 후 들어선 공산 정권은 최 작가 집안을 부르주아지로 몰아 위협했다. 최 작가의 가족은 고향을 버리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주했다. 원산 시절 풍경이 그의 소설 ‘회색인’과 ‘하늘의 다리’ ‘우상의 집’에 녹아 있다. 원산고등학교 재학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최 작가는 다시 한 번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1950년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원산항에서 해군함정 LST를 타고 내려왔다. 부산 피란민 수용소에 잠시 머물다 인척이 있는 전남 목포에 정착했다. 영원한 실향민이자 유목민이라는 최 작가의 정체성은 시대가 만든 것이었다.

 

 

  최 작가는 목포고를 졸업하고 1952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법학도 최인훈은 행복하지 않았다. 분단 한국의 현실을 고민하다, 마지막 학기 등록을 포기했다. 1957년 육군에 입대해 6년간 통역 장교로 복무했다. 끝내 제적된 그의 학력은 내내 ‘대학 중퇴’였다. 지난해 서울대 법학과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입학한지 65년 만이었다. 그는 당시 “기대하지 못했던 현실과 만났다”는 소감을 남겼다.

 

  최 작가는 1959년 24세 군인 신분으로 소설가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자유문학’에 투고한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이었다. 이듬해 월간지 ‘새벽’ 11월호에 문제작 ‘광장’을 발표했다. 대전 병기창에서 백지에 손으로 쓴 소설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분단 시대의 상징적 지식인으로, 남과 북에서 체제에 절망하고 사랑에 환멸을 겪는다. 포로로 남도 북도 아닌 제3국 인도 행을 택하고 배에 오르지만 이내 바다에 몸을 던진다. 밀실만 있고 광장은 없는 자본주의도, 광장은 있고 밀실은 없는 사회주의도 답이 아니라는 세계관으로 맺은 결말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광장’ 중)

 

  최 작가가 ‘광장’을 쓴 건 4∙19 혁명으로 자유와 진보의 공기가 흐르기 시작할 때였다.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최 작가는 당시 소설 서문에 그렇게 썼다. 2010년 1월 한국일보 인터뷰에선 “4∙19의 충격이 내 지적인 타성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광장’을 탄생시켰다. 여기엔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월남한 피난민이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고 했다.

 

  '광장’은 최 작가에게 ‘전후 최대의 작가’라는 이름을 안겼다. 그리고 한국문학을 영원히 바꾸었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가 대중이 확보한 자유의 공간에서 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혁명공간의 시간이 짧았다고 하여도 덧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인훈을 포함해서 그 뒤의 수많은 한글세대 작가들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황석영 작가가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에 실은 평이다.

 

  최 작가는 ‘광장’을 여덟 번이나 고집스럽게 고쳐 썼다. “4∙19 직후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 무언가를 증언한다는 생각으로 숨가쁘게 썼다. 정신력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한 글자라도 좋은 모습으로 후대의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다”면서. 그 사이 내용, 형식이 바뀌었고, 분량도 늘어났다. ‘광장’은 개정판본이 9개나 존재하며, 1996년 통쇄 100쇄를 찍은, 한국현대소설사의 기록적 작품이다.

 

  최 작가는 1977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다. 은퇴한 뒤에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은둔한 문인으로 살았다. 소설 ‘회색인’ ‘서유기’ ‘화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웃음소리’ ‘총독의 소리’ 등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남겼다. 한국일보 희곡상, 박경리 문학상, 동인문학상, 서울시문학상, 이산문학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서울극평가그룹상 등을 받았고, 1999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원영희씨와 고전음악 평론가인 아들 윤구, 딸 윤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됐고, 영결식은 25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강당에서 열린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김병익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장지는 경기 고양시 자하연 일산 공원묘원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