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나의 소식

금동원 시인<역사속으로>

금동원(琴東媛) 2009. 6. 6. 12:00


역사 속으로

금동원
 

고향 조국이 그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마음이 
어찌 정지용 시인뿐이었으랴 
압천을 마주하고 격정과 복받침의 시를 
토해낼 수밖에 없는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고 
저 아득한 구드레 나루터를 떠났던 
백제의 혼과 얼이 깃든 숨결을 따라 길을 떠난다 

시공을 지나온 역사의 넋에 말을 건네는 순간 
대패를 밀던 목수의 우렁찬 기합소리 
흙으로 깨달음을 빚어낸 도공의 물레 돌리는 소리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붓을 옮기던 
담징의 벽화에 스며있는 얼룩진 땀 냄새가
오롯이 살아있는 법륭사에서 
뜨거운 서러움이 내 영혼 속을 아리게 파고든다 

까마득한 기억 한 켠의 낯익음들이여 
바로 몇 천 년의 세월을 건너 
내 가슴에 파고들며 들리던 그 한마디 
*구다라 나이데스! 

잘린 귀로 쌓아 올린 귀 무덤의 한 서린 울림이 
달래고 달래고 달래보아도 
눈물을 품은 채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며 
교토의 한 구석을 지키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일본속 백제의 진가 추구 
 
  금동원 시인은 일본속 우리 민족사의 발자취를 두루 현지 탐방하면서 이 기행시로서 독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 있다. 백제가 망했던 아픔보다도 오히려 이역땅 고대 일본을 문화 예술적으로 계발(啓發)한 선도자로서 역사의 뜨거운 숨결을 각성시킨다. 백제왕도였던 부여땅 ‘구드래’나루터에서 생긴 ‘백제’의 이름은 일본땅에 건너가서 ‘구다라’(百濟)가 되었다. 그 구다라 사람들은 나라(奈良)땅에다 법륭사(호류지) 금당을 세웠고, 백제에서 보내준 ‘구다라관음’(현재 일본 최고의 국보)을 모시고 백제 불교를 국교(國敎)로 삼았다. 벼농사며 대장깐, 베틀이며 기와굽기, 왕인박사의 문자 문화까지 모두 구다라(백제)로부터 미개했던 일본땅으로 전해졌다. “구다라나이”란 무엇인가. 좋은 것은 모두 구다라에서 왔다는 일본인들의 백제 찬양의 말이다. 구체적인 발자취는 녹나무 불상인 백제과음이 구다라의 빼어난 불교 미술품이기에 저마다 “구다라에서 건너온 훌륭한 관음불상이다”라는 계속되는 찬사 속에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백제 것만이 최고다”라는 “구다라나이”의 대명사가 되고만 것. 오늘날 항간에서 외제 명품을 따지듯 “이것은 백제 물건이 아니다”(これはくだらのものでない)라는 백제 찬양은 일본 역사의 진한 숨결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뒷날,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갔던 잔악한 발자취도 일본 교토(京都) 땅 한복판에 있다. 이른바 ‘귀무덤’이란다. 


 (2010년 4/13일 독서신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