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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산책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금동원(琴東媛) 2015. 7. 10. 20:25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ㆍ바우만 “사랑은 매일 창조하고 조정하는 끊임없는 노동”
ㆍ카니아 “행복은 갈등·문제를 풀어가는 그 과정 속에 있어”

“인간의 유대가 점점 깨지기 쉽게 박해지고 있다. 연인들은 예전처럼 충실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당신과 내가 어울려 파트너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만족을 느낄 때까지다. 그 기분이 떠나면, 같이 있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지난해 ‘문명, 그 길을 묻다’ 연재 당시 인터뷰에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들려주었던 말이다. 인스턴트 사랑이다. 우정도, 사회적 신의도 다르지 않다. 오늘 우리는 헤어짐이 두려워 사랑을 포기한다. 혼자 남겨짐이 무서워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 일단 서약하면 끝낼 수 없던 무쇠솥 같은 무게를 버텨야 하는 옛 방식이 관계를 시작하는 데 더 두려운 장애가 될 법한데도, 오히려 가벼이 끓고 마는 현대의 사랑이 더 머뭇거리게 만든다. 보험 없는 차를 몰아야 하는 상황처럼 상처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가?





지난 1월 영국 리즈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다시 만났다. 집으로 들어서자 그는 한국 독자들을 위해 다른 한 명의 인터뷰이까지 초대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연인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다. 그 둘은 현대 소비시대, 디지털 문명의 사랑 방식에 대해 최근 이탈리아어로 팸플릿을 출판했다. 89세의 나이지만 그의 목소리와 몸짓에는 여전히 청년 같은 기백이 넘쳤고 눈동자는 형형했다. 83세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에게서는 겸손과 우아함이 배어 나왔다. 그녀가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이고 폴란드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고 나서는 그 푸근함에 더 큰 감동이 일렁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랑은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작업, 끊임없는 노동, 서로 배우는 동시에 가르치는 것”이라며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의 관계맺기를 강조했다. | 안선영 재미 사진작가

 

▲ 연결 원하지만 독립 바라는 커플들은 ‘온라인 사랑’만 나눠
객체이자 주체인 당신과 나 사이엔 반드시 갈등이 있지만
그 관계가 나를 고독·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 “상대와 사랑하는 나를 홀로 상상하는 것이 편해도
올바른 시각 잃을 수 있어
함께 사는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워”


안희경(이하 안) = 오늘은 21세기 사랑에 대해서 묻고자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하 바우만) = 장거리 연애에 대해 글을 썼더랬죠. 같은 집에서 살지 않는 커플들, 현대의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남편은 캘리포니아에, 부인은 뉴욕에 살며 둘 다 일하지요. 한 나라에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는 경우도 많죠. 인터넷이 있어 육체적 근접성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정신적인 단란함이 육체와 독립될 수 있습니다. 수백만㎞ 떨어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고, 한국이라면 더운 여름에 봤다가 추운 겨울에 보듯 몇 달 만에 함께해도 견딜 만합니다. 커플들의 일상은 스카이프로 연결돼 있어요. 하루에도 여러번 서로에게 말을 걸죠. 이미 세상엔 새로운 관계 맺기가 등장했습니다.

안 = 20~30대의 경우 장거리 연애, 일명 롱디 커플들이 많습니다. 기러기 부부도 여기에 속하고요. 세계화 속에서 지구를 돌며 먹고살 길을 찾습니다. 한국도 100명 중 3명이 외국인 체류자라고 해요.

바우만 = 그 속에서 서로는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상대를 변화시킬까요?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에 대해 전에 내가 말했던가요? 우엘벡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디스토피아에 대해 썼습니다. 이는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으로 아주 끔찍한 미래를 말하는데, <어느 섬의 가능성>이라는 책에 나오죠. ‘우리가 지금의 경향대로 더 나아간다면 어디에 도달할까?’ 그 결과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아주 많은 커플들이 반만 결합된 채로 살 거라는 거예요.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체가 함께하고 싶어 하면서도 독립적이기를 바라기 때문인데, 미국 영화에 자주 나오는 표현 있잖아요. “난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 이 말은 좀 떨어져 있으라는 거죠. 날 좀 놔두라는. 바로 우리 시대의 이념입니다. 오늘날 의존성은 추접스러운 말이 됐어요. 아직도 사용되는 사랑의 약속과는 앞뒤가 다르죠.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그대를 의지하겠습니다’, 결혼 서약 말이에요.

안 = 저도 미국에서 결혼할 때 주례를 따라 외쳤던 구절입니다.

바우만 = 우엘벡은 이제 사랑이 응답하는 곳은 전과 다르다고 해요. 사람들은 온 종일 서로 연결되기를 원하지만, 몸이 있는 곳은 일종의 자기만의 요새 속입니다. 연결은 인터넷으로만 하죠. 각자 홀로 살아요. 다른 인간을 보지 않고 요새 안에서 가시철조망을 두르고 온라인으로만 사랑합니다.

안 = 삭제 버튼 하나에 사라질 사랑이네요. 그 속에서 또 다른 관계를 산책할 수도 있고요. 사실 온몸을 내놓고 목소리를 들려주며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감정이 들킬까봐, 거부당할까봐 막을 칩니다. ‘썸’ 타는 시대, 소극적이죠. 우리의 사랑은 누가 조정하는 걸까요?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이하 야신스카 카니아) = 얼마 전에 지그문트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글을 보여주더군요. 한 젊은이가 교황에게 건넨 질문입니다. “교황님 저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답은 이래요. “그 누구도 사랑하는 법을 모르죠. 우리 각자가 매일 배워나가는 겁니다.”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래요. 배우는 겁니다. 물론 느닷없이 빠져들 때도 있어요. 그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일죠. 그리고 관계를 이어가겠다고 결심합니다. 동시에 거기에는 관계가 갖는 물리적·심리적·사회적 갈등이 생겨나고요. 우리는 이 갈등을 매일 풀어야 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말다툼하고 싸우고 그래요. 왜냐하면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사랑의 주체입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의 대상(객체)이 되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은 객체이자 또한 그 자신의 주체이거든요.

안 = 사랑의 대상이 의지를 갖는 주체이기에 갈등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건가요?

바우만 = 알렉산드라는 데카르트의 주체와 객체에 대한 구분을 말하고 있어요. 데카르트에 의하면, 객체는 수동적이고 내가 규정지은 대상입니다. 내가 그 대상에 모양과 의미를 부여했고 이는 내 의지의 수신자이죠. 그리고 알렉산드라가 말했듯이 사랑하는 관계에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삭제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니까요. 두 주체가 만나면, 꼭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에요. 주체는 각각 굴러오는 바퀴가 되고 두 바퀴는 충돌할 수밖에 없죠. 갈등 없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건 미련하다는 생각이 일어날 만도 한데, 우리는 어떤가요? 사랑에 빠지면 자신들의 사랑에는 끊임없는 축복이 내릴 거라고 기대하죠. 나는 내 공간을 가지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객체)을 만난 거라고 여깁니다.

안 = 나에게만은 그런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사랑에 빠진 거라고 자부심을 갖죠.

바우만 =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첫번째 말다툼이 있고 나면, 그냥들 멀어집니다. ‘자 이제 다른 누군가와 다시 시작하자! 내가 여기서는 얻지 못했던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서 출발!’ 바로 오늘날 파트너십이 깨지기 쉽고 잘 부서지는 이유예요. 사람들은 진실에 머무르려 하지 않아요. 진실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은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은 지속적인 작업이죠. 끊임없는 노동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당신 앞에는 사랑하기 위해 다시 창조하고 다시 규정하고 다시 조정해야 하는 24시간이 놓여져요.

야신스카 카니아 = 사랑하는 법을 매일 배우는 거죠.

바우만 = 객체와 주체가 섞여 있기에, 당신은 배우는 동시에 가르치는 겁니다.

안 = 몇 년 전 남편과 크게 다퉜죠. 그는 누구인가 참구해봤습니다. 묻고 물을수록 실체가 없더군요. 그는 과거에 내 판단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의 합이었습니다. 제가 만든 개념이죠. 그걸 알고 나서 관계가 달라지긴 했어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또 매일을 새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로잡힙니다.

바우만 = 만약에 알렉산드라가 없다면 여기에는 당신과 나만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방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섯 명입니다. 우리 둘이 아니에요.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관점,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 관점. 두 사람이죠. 그 다음, 당신에 대한 나의 관점, 나에 대한 당신의 관점. 네 명입니다. 또 나에 대한 당신의 사고에 대한 나의 관점과 당신에 대한 나의 사고에 대한 당신 관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여섯 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기가 어렵죠. 딱히 어리석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그래요. 우리는 상상을 하면서 상대에게 말하거든요. 사랑은,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는 애무와 비교될 수 있어요. 애무는 당신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어루만지는 거죠. 그런데 애무와 폭력의 경계는 매우 미미하다는 거예요. 얄팍하죠. 당신은 무심코 상대를 아프게 할지도 몰라요. 상대 몸의 자연적인 곡선을 따르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좇다가 그럽니다. 법정으로 가게 되면 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애무가 아닙니다. 판사가 무엇이 실제 사랑의 표현인지, 무엇이 폭력적 표현인지 구분하려 할 때 난처해집니다. 이는 두 관계 사이의 영역이 얇디얇기 때문이죠. 당신은 그를 사랑합니다.

야신스카 카니아 = 또 당신은 아이들을 사랑하죠.

안 = 네 그럼요. 아이들 사랑이 많은 걸 품죠(웃음).

바우만 = 이 의미는 당신이 그의 안녕을 원하고 그가 자기 삶 속에서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거죠. 어떤 조건이 되면 행복할지 생각하며 애씁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해지는 조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질지 몰라요. 그럼 당신의 사랑은 폭력이 되죠. 그가 바라지 않는 것을 강요하게 되니까. 우리들은 이런 상황에서 잘 분리되지 못합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안 = 두 분만의 레시피가 있나요?

바우만 = 글쎄요. 알렉산드라와 나는 깊이 사랑해요. 하지만 우리도 다툽니다.

야신스카 카니아 = 지그문트는 내게 요리해 주는 걸 정말 좋아해요. 훌륭한 요리사입니다. 난 그 요리를 칭찬하고요. 처음에 지그문트는 폴란드식 정찬을 차렸어요. 코스별로 수프와 샐러드, 메인요리, 디저트까지. 배불리 먹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도 자꾸 권해요. 내가 더 못 먹겠다고 하면 그는 행복하지 않아 보여요. “음식이 맛이 없나? 싫은가 보다”라고 말하는데, 슬픈 표정을 보게 되죠.

안 = 함께하신 지 3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러세요?

야신스카 카니아 = 매일요. 가끔은 그도 받아들여요. 그런데 그가 행복하지 않아 보이면 내가 또 행복하지 않거든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살찌는 건데, 지그문트는 자기가 준비한 저녁을 거부한다고 여기는 것 같더라고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상대의 의견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일이 쉽지 않은 거죠. 그만큼 우리는 늘 다시 협상해야만 하는 거예요.

바우만 = 그렇지. 그 부분이 매우 고약하지. 늘 다시 협상해야 한다는 거.

야신스카 카니아 = 지금 7㎏이 늘었답니다. 살쪄도 나를 좋아할까 상관하는 건 아니에요. 상관한다 해도 괜찮고요. 그냥 내가 거북해서죠.

안 = 두 분 사랑의 타협이 7㎏이라는 물리적인 숫자로 드러났네요(웃음).

바우만 = 사랑에는 반드시 새로 부과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무엇이 벌어질지 결코 몰라요. 그래도 사랑이라는 관계는 당신에게 고독, 외로움, 버려져 있다는 감정을 뛰어넘도록 허락하잖아요. 사랑은 두 주체의 만남이고, ‘객체가 되는 시간’까지 받아들이는 조건이 따릅니다. 다들 스스로 통치하고 싶어하는데, 그럼 사랑은 불가능해집니다.

안 = 나의 의지를 비워낸다면 갈등이 없어질까요? 많은 잠언들은 무조건적 사랑, 상대를 품으라고 하잖아요.

야신스카 카니아 = 글쎄요. 어떤 수위,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수위까지는 되겠죠. 그런데 내가 주체성을 잃는다면, 그건 상대도 잃게 되는 거예요. 지그문트는 우리 둘이 함께 행복하도록 저녁을 준비하는 거니까 그는 나의 의지를 이해해야 하고, 나도 그에게 내 의지를 설명해야 하는 거죠.

지그문트 바우만과 연인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폴란드 사회학자). 영국 리즈와 폴란드 바르샤바에 각각 따로 살던 이들은 최근 함께 살기로 결정했고, 디지털 문명 시대의 사랑 방식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안 =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신혼부부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 같아요. 두 분 사이가 궁금해집니다.

야신스카 카니아 = 젊어서부터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결혼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했고요. 제 남편이 죽고 지그문트의 부인도 세상을 떴습니다. 지그문트는 슬픔 속에 있었죠. 저도 매우 불행했고 외로웠습니다. 제 남편도 매우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남편이 가고 4년 동안 우울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내 발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 와중에 지그문트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갑자기 온 세상이….

바우만 = (끼어들며 외침) 케미스트리! 화학반응이 나온 거지(웃음).

야신스카 카니아 = 그래요. 케미예요. 지그문트는 영국에 있고 나는 바르샤바에 살면서, 콘퍼런스에서 만나거나 e메일로 마음을 주고받았어요. 우리도 장거리 사랑입니다. 나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삶에 만족했기에 혼자 글 쓰면서 살아갈 수 있었지만, 깊이 끌렸기 때문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함께 살기로. 사랑은 정신으로 나누는 것뿐 아니라 때때로 떨어져 있는 거리를 깨야만 하죠. 홀로 있으면서 상대를 상상하는 것과 사랑하고 있는 나를 또 상상 속에 그려내는 것이 편할지라도, 이는 바른 시각을 잃을 수 있거든요. 함께 사는 사랑은 고통스럽죠. 그렇지만 아름다운 경험이에요.

바우만 = 러시아 속담이 있어요. ‘늑대가 두렵다면, 결코 숲에 가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사랑의 복잡성을 두렵다 여긴다면, 결코 사랑에 빠질 일은 없는 거죠. 당신이 사랑을 한다면, 그럼 늑대 소굴까지 가게 되거든요. 그리고 그 소굴에는 아름다운 숲이 펼쳐져 있답니다. 이는 당신 선택이에요.

안 = 늑대 때문에 실망인데요. 그래도 좀 더 잘 맞는 상대를 선택했더라면 헤어짐의 아픔은 벗어나지 않을까요? 이별하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할 공식이 있을까요?

야신스카 카니아 = 이는 ‘새로운 시작의 이데올로기’, 소비사회 속에서 반복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당신은 상점에 가요. 대상을 고릅니다. 그걸 집으로 가져오죠. 그런데 행복은 가져오지 못해요.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죠. 그럼 어떻게 하나요? 또 상점에 갑니다. 만약 거기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고, 그런데 그가 뭔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한다면, 당신은 집어치울 겁니다. 또 다른 파트너를 찾습니다. 70억 인구가 사는 세상을 둘러봅니다. 그래요, 참으로 많은 선택이 있는 큰 상점이에요. 내 경험에서 보면요. 문제를 피해가면서는 그리 많은 행복을 만날 수 없더라고요. 행복은 문제를 풀어가는 그 안에 있어요. 갈등이 많아도 상대방이 없는 그런 재난보다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 좋든 싫든 그와 함께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 수많은 항복, 수없는 타협, 그리고 꽤 많은 요구를 내려 놓아야만 하죠. 인생은 편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이데올로기, 현대의 슬로건은 ‘세상은 매우 불편하고 사람 살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우리는 이를 편안하고 편리하게 뭐든 만들어 낼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신화예요. 설화, 거짓 술책, 관념주의자들의 재잘거림이죠.

안 =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삼포세대’라고 해요. 직장 잡기도 어렵고 비정규 직 일자리가 많기에 연애·결혼·출산을 포기 하는 거죠. 불안한 시절이라 스펙쌓기에 열중하고 성향도 보수화되고 있습니다.

야신스카 카니아 = 지그문트의 손자 중에도 20~30대는 같은 어려움을 겪어요. 직장 구하기 어려우니 결혼을 할 수 없는 거죠. 젊은 세대들은 옛 세대들이 싸웠던 경험을 이해하기보다는 거부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부모들이 누리는 같은 수위의 안전을 바라죠. 그들은 누구에게 대항해야 하는지 몰라요. 하지만 찾아야 합니다. 목표를 발견하고 옛 세대들이 한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이치에 맞는 대항을 해야 합니다.

바우만 = 우리는 개인화된 사회에 살고 있어요. 문제는 사회에서 만들어졌지만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에게 함께 싸워야 한다고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안 = 지독한 경쟁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렸습니다.

바우만 = 갈등은 항상 다른 형식으로 찾아와요. 늘 역사 속에 버티고 있죠.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그 힘을 깨지 않고는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기성세대 역시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여러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모두를 일으켜 세울 하나의 공식을 발굴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요. 위대한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인데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죠. 그가 사회과학자들한테 경고했어요. 욕망을 이론화하지 말라고. 욕망은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이에요. 그 안에는 어떠한 논리도 없다는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인간의 욕망들과 함께하는 혼돈 속에서 스스로가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는 겁니다. 우리만의 의미를 창조하세요. 혼돈과 갈등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아요. 또 다른 혼돈과 갈등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함께하고 싶은 이를 향해서도, 대항하는 상대를 향해서도 바우만과 야신스카 카니아가 부탁한 사랑을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다시 창조하고 조정해내려는 노력 말이다. 이는 연애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기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기술이다. 고통의 호소에 억압으로 답하는 시절, 이들의 조언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작동되길 바란다.

▲ 바우만과 야신스카 카니아
‘근대화의 그늘’ 해부한 학자·폴란드 초대 대통령 딸… 연인 사이


지그문트 바우만(89)은 현대성을 묘파한 대표적 사회학자다.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했다. 1954년부터 바르샤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으로 국적을 박탈당한 채 이스라엘로 간다. 텔아비브대학교에서 가르치다 시온주의의 공격성과 팔레스타인의 참상에 절망을 느껴 영국으로 이주, 1971년부터 리즈대학교에 재직했다. 1992년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상을, 1998년 아도르노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지금 유럽의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스투리아스상을 받았다. 1989년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출간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00년대에는 현대사회의 유동성(액체성)과 인간의 조건을 분석하는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로 폭넓은 주목을 받았다.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83)는 폴란드 사회학자다. 1956년부터 바르샤바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스톡홀름대와 스탠퍼드대·인디애나주립대 등의 사회적 연구를 이끌었다.

저서로는 <현대 서구 사회학 사고: 사회학적 이론 구성>(1975), <현대 사회학적 이론>(2006)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초대 폴란드 대통령인 볼레스라프 비에루트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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