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저 | 시각과언어
○작가 소개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 태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 제8대학의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 혹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독일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이론화 하였다. 철학자로는 드물게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최근 인문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각주에 인용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두 차례의 강연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개혁파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의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는 이론과 현실, 문화의 창의적인 결합을 담아 지속적으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SF 소설,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철학과 접목시킨 독특한 문화 비평을 내놓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 『삐딱하게 보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까다로운 주체』, 『신체 없는 기관』, 『혁명이 다가온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HOW TO READ 라캉』, 『죽은 신을 위하여』, 『시차적 관점』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성관계는 없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레닌 재장전』『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공저)등이 있다
○작가의 한 마디:
지금까지 몇몇 사회분석가와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우리 시대에 폭발적으로 치솟은 경제 생산성으로 인해 우리는 80대 20 법칙의 극단적 실례와 마주하게 된다 - 다가오는 세계 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이, 필요로 되는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갈 것이며 따라서 80%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그리하여 잠재적 실업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논리가 극단에 이르면ㅁ 그것을 자기부정으로 이끄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즉 80%의 사람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게 만드는 체제는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쓸모 없는 것이 아닌가?
○책 속으로
죽은 자들은 왜 귀환하는 가? 라캉의 답변은 우리가 대중문화에서 발견했던 것과 동일하다. 그들의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무언가가 그들의 장례식을 망쳐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귀환한다는 것이다. 죽은 자의 귀환은 상징적 의식, 상징화 과정에 있어서의 교란을 나타내는 기호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안티고네]와 [햄릿]에서 끌어낸 기본적인 교훈이다. 두 연극의 플롯은 부당한 장례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살아있는 시체들' - 안티고네와 햄릿의 아버지 유령 - 은 상징적 계산account(이걸 왜 계산이라고 해석했을까? 그보다는 채무관계가 낳을 듯)을 해결하기 위해 귀환한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죽은 자의 귀환이란 육체적인 사망을 뛰어넘어 지속되는 어떤 특정한 상징적 채무를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받는 것이다. ...죽은 자의 귀환은 그들이 전통의 텍스트 안에서 정당한 자기 위치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pp.56-57
금자금 | 2013-06-10
슬라보예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를 읽게 된 계기는 신입생을 위한 권장 도서중 제목이 가장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되었지만 책은 쉬워 보이는 제목과 다르게 어려운 철학책이었다. 이 책은 자크 라캉이라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의 이론을 쉽게 설명하려는 책이다. 그래서 욕망, 무의식 같은 것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영화, 소설 등을 예로 들어 쉽게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철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것을 하나도 모르는 이공계 학생인 나로서는 쉽게 풀어 쓴 것조차 이해하기 버거웠다. 그래서 이 책 하나만 보고 이해하기 힘들어서 지젝과 라캉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먼저 지젝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류블랴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어왔다. 또한 대학시절 공산주의인 유고슬라비아의 영향으로 모든 영화사는 영화를 대학에 보내야했다. 그래서 지젝은 당시 배급된 미국, 유럽 영화의 대부분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삐딱하게 보기’에서 영화나 추리소설, 연극의 예시가 나온 이유가 될 것이다. 지젝은 또한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철학 저서를 발간할 정도로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정신분석학적인 면에서 자크 라캉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의 분석 용어나 개념적 틀을 이용하게 되었고, 결국 라캉의 이론을 풀어쓴 ‘삐딱하게 보기’를 발간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자크 라캉은 프랑스 파리 출신으로 처음엔 철학을 배웠으나 후에 의학, 정신 병리학을 배우게 된다. 또한 라캉은 그동안 정신병자 치료의 목적으로만 이해되던 정신 분석학을 넓은 영역으로 끌어올렸으며, 프로이트의 지도를 받으면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였다. 그러한 라캉의 영향을 크게 받아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에서 욕망에 대한 글을 쓰고 실재에 대하여 쓰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위 두 사람의 성장 과정, 추구하는 이론 등을 알고 나니 책을 읽기도 훨씬 수월했다. 충동, 욕망, 타자에 대한 개념을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욕망이나 타자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도 다뤄본 적이 있었으며 일단 라캉의 이야기를 아니까 처음 읽었을 때의 절망감은 좀 덜했다. 오히려 한 번 더 읽음으로써 흥미마저도 생겼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한번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두 번 세 번 읽고, 그 속에 나오는 여러 이론의 배경 지식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분석적으로 읽으면서 라캉의 철학적 생각이나 정신분석학적인 생각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젝이 어떤 식으로 쉽게 설명하려 하였고, 무엇을 강조했을지 알아봐야한다.
hrgim94 | 2013-06-09
이 책은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에 대한 책이다. 그런데 라캉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 책을 읽는다? 나는 확실히 라캉에 대해서 아는 바라 하나도 없는 채로 읽었다. 내가 아직 어려운 책을 읽을 수준이 되지 않고 무수한 번역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책을 쭉쭉 읽어내기가 참 어려웠다. (솔직히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 채로 이 책의 저자인 지젝에 대해서 읽으면서 재미가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라캉의 이론을 대중문화 작품들을 통해 해석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대중문화 작품들을 라캉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욕망과 충동, 현실과 실재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여러 영화와 추리소설(탐정소설)같은 대중문화 장르들을 넘나들며 우리가 평소에 당연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숨겨진 모습들을 파헤쳐준다. 그 중에서 아킬레스의 패러독스처럼 쾌락은 내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내용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서 지젝은 욕망의 실현은 충족시키고자 하는 게 아니라, 끝없이 쫒아가는 그 과정에 있다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이 내용은 나도 가끔 생각해 본적이 있어서 나름 크게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여기서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인 이야기를 신화적 모티브에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은 처음부터가 불가능한 쾌락에 금기를 덮어씌우는 것으로 작용함으로써 사실상 우리를 교착상태에서 구해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통해 우리는 쾌락의 충족을 지연시킬 핑계거리를 찾게 된다고 하였다.
또 인상적 이였던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진땀 흘리면서 읽던 도중에 셜록 홈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탐정소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을 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내용은 셜록 홈즈를 좋아하던 나를 정말 반갑게 느끼도록 했었던 내용이었다. 글쓴이인 슬라보예 지젝은 탐정소설은 사실주의 소설의 최종적인 몰락과 탐정소설의 출현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정신분석가와 탐정을 비슷한 존재로 설명한다. 이에 대해 더 나아가 프로이드의 꿈(사고, 프로이드는 꿈과 사고를 같다고 주장하였다.) 해석 방법에 대해서도 어렵지만 흥미롭게 전개하였다. 결국 꿈을 해석하는 방법은 탐정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시대로 돌아가는 것고 연결시킨 ‘낯설게 하기’ 부분도 있었다. 여기서는 국가기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끊임없이 우리의 뇌리를 떠도는 기호들에 대해, 이런 것들의 인위적인 성격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징환(신호)들을 오히려 컨텍스트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는 징후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를 정치적인 영역으로 연결시킨 분석이 흥미로웠다. 군중심리 혹은 집단광기처럼 하나의 징후(예를 들면 스스로 유대인을 때려잡는 몽둥이가 된다든가)에 매달리기도 하고, 트라우마를 안겨준 무언가에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는 효과를 얻기도 한다. 환경운동가들이 구호화한 '체르노빌'이라는 은유에 이르면 '징후와의 동일화'는 전복의 수단이 된다.
그 외에도 ‘환상의 윤리학’이라는 내용의 글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라캉에게서 이어받은 이 같은 '환상의 윤리학'을 통해 우리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윤리학(인간의 자연권/보편적 이성)의 와해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도 정치적 실천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중요한 문제라고 나오고 있다. 지젝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안에서 주체는 오직 민족주의의 이름을 걸고서만 나타나게 돼있으며, 민족주의는 신화를 통해 집단적 쾌락을 조직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언급은 물론 지젝이 민족주의의 폭력적 분출을 겪고 있는 동구권의 지식인이라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할 것이라고 한다. 지젝은 서구의 형식적 민주주의 내에서 환경보호론자나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며, 일단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형성된 '생활의 패러다임' 내에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기획은 반드시 형식적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를 파 들어가게 돼있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나름대로 크게 설득력은 있지만, '라캉만이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말하는 지젝에게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고 난 뒤에도 라캉은 여전히 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젝을 따라 대중문화를 보는 동안 새로운 관점으로 본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점에서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또한 삐딱하게 보는 것이 묘한 쾌감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도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아직은 모두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몇 번은 더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삐딱하게 보기
getm | 2011-06-23
문화의 시선은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 훨씬 부드러운 기제가 되어주고 있다. 중요하지만 무겁지 않고, 동떨어진 사회의 담론이기 보다는 하나의 개인이 사회를 통해/향해 살아가는 양상 속에서 제 의미를 파악하고, 욕망의 방향을 분석해가는 데 문화 분석의 제 뜻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지향하는 방향은 인간의,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구체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우리가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할 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위치가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이해는, 바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이해로 이어진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여전히 비평가나 평론가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욕망에 대해서라면 라캉의 분석틀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유효하다는 생각이 널리 수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라캉의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생각을 기점으로 욕망을 분석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문화분석이 욕망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라고 하는 창조적 힘을 긍정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에 보다 접근해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슬라보예 지젝의 대중문화 분석은 욕망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그 속에서 명석한 결론을 얻어낸 존재만이 세상을 변혁적이고 윤리적인 틀로 이해할 힘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보다 정통적이고 성숙한 이론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고가 가능하다.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는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반항적이다. 한마디로 삐딱하게 보자는 얘기 아닌가? 왜? 간단히 말해 세상이 비틀려 있으니까.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곧이 곧대로 보이는대로만 보려면 결코 보이지 않고 간과될만한 것이 삐딱한 시선으로 갸우뚱 함으로써 겨우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가시화되기 때문에, 삐딱하게 보는 일은 사실은 제대로 보기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그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적 틀거리 [인과관계]가 세계를 파악하는 유일무이한 잣대라고 한다면, 근간에는 [결과가 중요한가, 과정도 중요하지]라는 사고도 드물지 않게 수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지젝은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결과론적 사고방식에는 얻고자하는 결과가 전제되어 있는데, 그렇게 무언가가 미리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환상]이라는 지적이다.
사실 애초부터 답이란 없다. 있을 수가 없다.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에 우리의 사회가 길들여져 있고, 우리가 물들어 있을 뿐. 그저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모호하다. 그래서 애써 답이 있다, 뭔가가 있다, 라고 환상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 또는 위험한 것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 뭔가 세계가 연속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버리면 편안해지지 못하게 되는 두려움,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체계적이고 일관적이다, 라고 환상하고 왜곡하게끔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거짓 욕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젝의 통찰력있는 일갈을 통해 깨닫건데, 진정 저항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시선이자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면, 그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시선으로 포장된 환상의 세계을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일이 아니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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