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
복거일 저/ 다사헌
소설가, 시인, 사회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복거일이 주변을 돌아보며 일상생활 속에서 느낀 소회를 에세이로 풀어냈다. 그 에세이에는 다루고 있는 사안과 관련되는 국내외 시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복거일의 딸 조이스 진의 그림도 함께 실려 있다.
작가는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샌더슨 밴더빌트의 〈섣달〉이라는 시를 떠올리고, 동시에 봄을 재촉하는 몸짓을 읽어낸다. 시인 마종기가 젊은 시절에 쓴 시를 다시 읽으며, 그런 시집을 여전히 펴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시를 사랑하는 사회라고 저자는 판단한다.
○작가 소개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작가 복거일은 책이 좋아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젊은 날, 넉넉한 보수를 주던 은행을 그만둔 이유도 오롯이 책 읽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작가이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기도 한 작가이다. 작가는 문학 창작 활동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짚어야 할 문제들에 주목하여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불리면서 사회평론가로도 활동해 왔으며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하기도 했다.
복거일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실패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식민지 서울을 살아가는 반도인의 1년을 쫓은 작품인 『비명을 찾아서』로 1987년 데뷔하였다. 이 소설은 2002년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SF 장편소설 『목성잠언집』으로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다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전통 경제이론에 정통 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전파에 앞장 서는 보수내 지식인으로 활동해 왔다. 1998년 한국어 대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영어 공용화' 제안으로 논란이 대상이 되었고 원화 대신 달러를 통화로 채택하자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탈민족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오장원(五丈原)의 가을』,『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장편소설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역사 속의 나그네』,『파란 달 아래』,『캠프 세네카의 기지촌』,『목성잠언집(木星箴言集)』,『그라운드 제로』,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문학평론집『세계환상소설 사전』, 사회평론집『현실과 지향』,『진단과 처방』,『소수를 위한 변명』,『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동화를 위한 계산』,『2002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주의의 시련』, 과학평론집『쓸모 없는 지식을 찾아서』, 산문집『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죽음 앞에서』,『현명하게 세속적인 삶』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역사가 말하게 하라』가 있다.
○작가 한마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한, 소수는 늘 남아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마음을 쓰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수이므로...
○목차
머리말
봄을 부르는 아이들
시를 사랑하는 사회
내 마음 속 풍경
새해의 이야기
헤어짐
예술가의 삶
먼저 간 사람들의 기억
이름 바꾸기
자장가
불황의 시절에
미래의 일자리
편지가 사라진 세상에서
빈 가슴에 안는 이야기들
휴전선에서
황초령 아래 얼어죽은 소녀를 위하여
껌벅거리는 촛불을 지키려고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한 예술
밤에 육유의 시를 읊노라(夜吟陸游)
세월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어버이날이면
일어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시작되었다
사랑의 물길이 다 흐른 뒤
도시의 가을
길었던 한 해를 보내며
꿈은 어떻게 이루는가 그리고 지키는가
한강의 봄
기회주의자의 느긋함
도심의 여름
허름한 지도제작자의 삶
미당의 고택에서
○책 속으로
그러고 보면, 우리의 나날은 ‘큰 것들’로 채워진다. 어려운 나라를 걱정하고, 끊임없이 돌아오는 어음들을 부도내지 않으려고 금융가를 누비고, 느닷없는 조기 퇴직에 대비하느라 마음을 썩이고, 점점 무거워지는 아이들 과외비를 마련하고 ? 그런 큰 일들에 부대끼는 동안에 ‘작은 것들’은 잊혀진다.
생각해보면, 그러나 우리가 어쩌다 하는 작은 것들은 ? 아이들과 나누는 몇 마디, 함께 늙어가는 아내와 차를 마시면서 듣는 옛 노래, 어렵사리 틈을 내어 만난 옛 친구와의 한때 ? 바라볼수록 소중해지는 재산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망각의 세월에서 건진 보얀 순간들이다. 여러 해 뒤 문득 돌아보면, 모습이 흐릿해진 우리 삶에서 어쩌면 그것들이 오히려 또렷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큰 것들이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면, 작은 것들은 그 삶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 시를 사랑하는 사회
사람에겐, 특히 나이 든 사람에겐, 하찮은 기억은 없다. 기억들이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이루므로, 하나의 기억이 사라지면, 그만큼 그의 삶도 정체성도 줄어드는 것이다. 기억의 지평 너머로 기억의 기억만이 아른거릴 때 우리가 느끼는 아쉬움은 잃어버린 자신의 한 부분에 대한 그리움이다.
--- 내 마음속 풍경
현명하고 용감한 세헤라자데처럼,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고 살아간다. 날마다 열심히 살고 그 하루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과 남에게 들려줌으로써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올해는 힘든 해가 되리라고 모두 얘기한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은 ‘조심스러운 낙관’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룬 것들에 바탕을 두고서 또렷하고 건강한 한 해의 이야기를 써나가야 한다.
--- 새해의 이야기
그러나 평범한 예술가들은 높은 평가나 명성은 그만두고라도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 ‘승자 독식(winner-take-all)’ 현상은 예술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다.
그래서 예술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아주 작은 가능성에 자신의 평생을 거는 위험한 내기라 할 수 있다. 예술적 재능을 일찍 알아보기는 어렵고, 재능이 있더라도 걸작을 쓴다는 보장이 없고, 걸작을 써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평판을 얻은 예술가들도 흔히 가난한 삶을 꾸린다. 예술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이런 사정을 깨달아야 한다.
--- 예술가의 삶
삶은 이어진다. 삶은 40억 년 동안 이어진 사업이다. 그 아득한 세월에 몇 십억 세대의 우리 조상들이 모두 자식을 낳을 때까지 살았으므로,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은 늘 내 가슴을 감탄으로 채운다.
그렇다, 삶은 이어진다. 아무리 재앙의 골짜기가 깊어 보여도, 삶은 그 골짜기를 지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어려운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멀리 보아야 한다.
이 불황의 시절에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고 아이들을 키우리라는 사실이다. 삶은 이어진다.
--- 불황의 시절에
우리의 목숨은 너무 짧고 우리의 꿈은 너무 여리다. 인류 자체도 영속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꿈이 더욱 소중한 것이리라. 꿈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설령 그 꿈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예 없었던 것과는 다르다.
--- 꿈은 어떻게 이루는가 그리고 지키는가
세상엔 세월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세월에 부대끼면서 스스로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똑똑해도 젊은이들은 깨닫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삶이 하도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 그렇다. ‘피아노의 신동’이나 ‘바둑의 신동’과 같은 칭찬을 듣는 청소년들은 많지만, ‘삶의 신동’은 나올 수 없다. 피아노의 연주나 바둑의 계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삶 자체에 비기면, 아주 작고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그래서 삶의 지혜들은 대부분 모두 스스로 겪으면서 배우게 된다.
--- 세월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흘긋 돌아본다. 소녀들은 컵라면을 다 먹고 무엇이 우스운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물오른 버들가지처럼 보얀 소녀들 - 저 소녀들의 앞날이 그들의 환한 웃음처럼 밝기를. 저 소녀들이 오래 살기를, 적어도 여기 휠체어에 앉은 노인만큼 오래 살기를. 그때엔 의술이 발전해서 걸음에 탄력이 있을 만큼 건강하기를. 그리고 저 노인에겐 봄철이 여러 번 찾아와서 한강의 흐르는 물을 거듭 바라볼 수 있기를.
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속으로 축복의 말을 건넨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다, 축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없지만, 축복할 줄 아는 사람에겐 축복이 전혀 힘들지 않는다는 것은. 문득 손을 들어 무심히 지나가는 갈매기에게 인사를 해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축복을.
--- 한강의 봄
예술적 사회참여로서 하는 연극 활동이므로, 나는 자유주의 이념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널리 선양하는 작품들을 만든다. 그 동안 북한은 예술 작품들을 통한 선동선전(agitprop)에 주력해왔고 우리 사회 안에서도 좌파 세력들이 북한을 대신해서 대한민국을 흔드는 활동을 효과적으로 해왔다. 나는 대한민국을 위한 선동선전 활동으로 연극을 하는 셈이다. 더러 ‘예술가가 선동선전에 몰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물음도 받지만, 나라가 위급하면 예술가도 자신의 작품들을 나라를 지키는 도구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믿는다.
-----기회주의자의 느긋함
○출판사 리뷰
“이 불황의 시절에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고 아이들을 키우리라는 사실이다. 삶은 이어진다.”
간암 투병 중인 복거일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 있는 에세이
소설가, 시인, 사회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복거일이 주변을 돌아보며 일상생활 속에서 느낀 소회를 에세이로 풀어냈다. 2년 전 간암 판정을 받은 저자는 오로지 글을 계속 쓰기 위해 항암 치료도 거부한 채 주변에 발병 사실도 숨겨 왔다. 이번 에세이에는 다루는 사안과 관련되는 국내외 시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복거일의 딸 조이스 진의 차분하고 담담한 그림도 함께 실려 있다. 암 투병 중인 늙은 시인이 쓴 글들에 친딸이 그에 걸맞은 그림을 그린 에세이집인 것이다.
작가는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샌더슨 밴더빌트의 〈섣달〉이라는 시를 떠올리고, 동시에 봄을 재촉하는 몸짓을 읽어낸다. 시인 마종기가 젊은 시절에 쓴 시를 다시 읽으며, 그런 시집을 여전히 펴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시를 사랑하는 사회라고 저자는 판단한다. 나이가 들수록 먼저 노년을 산 사람들의 얘기가 절실해 진다면서 영국 시인 에드워드 토머스의 〈노인〉을 인용하는데, 이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가을에 낙엽이 깔린 풍경에서는 에밀리 디킨스의 〈168번 시〉가 제격이다. 저자는 가을의 쓸쓸함에서 ‘헤어짐’을 연상하고, “헤어짐은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이고/ 지옥을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의 울림에 대해 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재우는 모습은 가장 정겨운 풍경이면서 진화론적으로도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라면서 시인 오든의 〈자장가〉를 인용한다.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건에 대해서 저자는 김광섭의 〈시인〉을 인용한다. “예술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아주 작은 가능성에 자신의 평생을 거는 위험한 내기”라는 것이다. ‘도로명 주소’의 사용에 대해서는 당나라 시인 유정기의 〈동작대(銅雀臺)〉를 인용하며, 고유한 이름들이 너무 쉽게 바뀌는 세태를 꼬집는다.
6.25 전쟁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이 날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 대해선 그 전쟁을 다룬 예술 작품을 감상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나이 든 세대들을 겨냥한 작품들을 만들자는 것이다. 나이 든 세대들의 반응이 좋으면 일단 작품들은 상업적 바탕을 지니게 되고, 젊은 세대들도 차츰 관심을 보이고 감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낡은 군용 헬기를 몰다가 추락해서 조종사가 숨진 사건을 신문에서 접하고 저자는 “속에서 쓰린 무엇이 울컥 치민다.” 40여 년 전 항공관측 장교로 근무하면서 관측기에 탔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울러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했을 때, 낡고 고장 난 무기들이 많아서 제대로 응사한 야포들이 적었다는 사실도 떠올린다. 저자는 나오는 한숨을 되삼키고 서가에서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의 시집을 뽑아 들어 〈밤에 병서를 읽노라(夜讀兵書)〉를 조용히 읊는다. ‘외로운 등불이 밝히는 서릿발 선 저녁 / 외진 산속에서 병서를 읽노라. / 평생 지녀온 만리에 뻗친 꿈은 / 창 잡고 임금님 앞에서 말 달리는 것이었네. / 싸움에서 죽는 것은 선비로선 당연한 바니 / 거듭 아내와 자식들을 간수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노라.’
제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첩이 된 여인들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에 저자가 눈을 뜬 것은 철이 들고서도 한참 뒤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질시와 경멸 속에 꾸려나가는 그들의 어렵고 불안하고 괴로운 삶에 생각이 미친 것은 더 나이 먹어서라고 고백한다. 그러고는 그런 여인들에 대한 따스한 눈길을 미당 서정주의 〈영산홍(映山紅)〉에서 발견한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山)이 어리고// 산(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小室宅)// 소실댁(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山) 넘어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이 시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풍경은 미당의 고향 호남의 그것인데, 목청은 영락없는 경주 사람 목월(木月)의 그것이다. 그래서 이 슬프고도 낭랑한 시를 낭송하면, 나는 느낀다, 내 입가에 배는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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