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저/ 이영의 역 | 민음사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솔제니친의 대표작!
한 개인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지배권력의 허상을 폭로한 소설
작가 솔제니친이 직접 경험했던 노동수용소 생활의 하루 일상을 세련되고 절제된 필치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평범하고 가련한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인물을 통해 지배권력에 의해 죄없이 고통당하는 힘없는 약자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보여 준다. 그러한 약자들을 대변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고 그러한 예술이야말로 예술의 궁극적 목적임을 역설한다.
솔제니친은 이 작품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다양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인간 군상들은 수용소 내부의 부패되고 모순된 소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지만, 스탈린 시대의 사회 축소판으로서 더욱더 폭넓은 의미의 확장을 통해 부패된 정치권력과 사회적 생활상, 모순되고 획일적이고 비인도적인 사회 제도, 종교 문제, 인간 본성의 문제까지도 시사하고 있다.
○작가 소개
'러시아의 양심'이라 불리는 러시아의 저항작가. 카프카스 산맥의 작은 휴양지 키스로보츠크에서 태어난 솔제니친은 홀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했다. 로스로프대학교에서 물리와 수학을 공부하고 모스크바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다. 1940년 결혼하고 이듬해 대학을 졸업한 그는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군에 입대해 포병장교가 되었다. 그러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재자 스탈린을 '콧수염 남자'로 빗대 말한 것이 탄로나 1945년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가 '반혁명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것은 27세 때였다.
1956년부터는 러시아 랴잔시 중학교 수학교사로 일했으며,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데뷔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구상하였다. 이후 1962년에 이 단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70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 대위로 근무하던 중 투옥돼 10년간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그린 『수용소의 군도』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소련의 정치제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과 몇몇 동료 반체제작가들에 대한 소련 당국의 냉대를 끊임없이 비판하였다.
1974년에는 반역죄로 소련에서 추방 당했으며, 이후 미국 버몬트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소련연방 붕괴 후인 1994년, 20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조국 러시아의 부활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7년 6월 러시아는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상인 국가공로상을 수여하였다. 2008년 8월 3일 향년 8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책 속으로
저 사람들이 슈호프를 가르키면서, 저 녀석은 출소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그다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슈호프 자신은 어쩐지 그다지 믿어지지 않는다. 슈호프가 직접 본 일로, 옛날 전쟁중에 형기가 끝난 죄수들을 모두 , 그러니까 1949년까지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붙잡아뒀다. 게다가 더욱 심한 것은, 누군가 삼 년을 언도 받았는데, 형기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오 년으로 추가형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법률이란 것은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 십년을 다 살고 난 다음에, 옜다 이 녀석아, 한 십 년 더 살아라 하게 될지, 아니면 유형살이를 보낼지 누가 알겠는가.--- p.82
슈호프는 소용소에 들어온 이후로 전에 고향 마을에 있을 때 배불리 먹던 일을 자주 회상하고는 한다. 프라이팬에 구운 감자를 몇 개씩이나 먹어치우던 일이며, 야채를 넣어 끓인 죽을 냄비째 먹던 일, 그리고 식량 사정이 좋았던 옛날에는 제법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먹었던 때도 있었고, 게다가 배가 터지도록 우유를 마셔대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렇게 먹어대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를 해본다. 음식은 그 맛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어야 제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이 빵조각을 먹듯이 먹어야 하는 법이다. 입 안에 조금씩 넣고, 혀 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침이 묻어나도록 한 다음에 씹는다. 그러면, 아직 설익은 빵이라도 얼마나 향기로운지 모른다.--- p.60
배가 따뜻한 놈들이 한데서 떠는 사람의 심정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혹한이 온 몸을 움츠리게 한다.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가 슈호프를 엄습해서 기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기온은 영하 이십칠도였고, 슈호프는 열이 삼십 칠 점 이도였다. 자, 이젠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가.
--- p.31
그런 다음, 그는 때묻은 얇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어느새 침대 사이의 통로엔 점호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옆 반 반원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pp.207-208
○출판사 리뷰
■우리는 고작 몇 개의 하루만을 살다갈 뿐이다.
도서1팀 김성광(comma99@yes24.com)
인간이 평균 80세까지 살 수 있다면, 우리는 80년치의 하루들을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니까 인생은 무려 3만여 개의 하루로 구성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산수와는 거리를 두고 싶다. 우리는 고작 몇 개의 하루만을 살다 갈 뿐이다. 오늘에 대응하는 날짜가 지나가는 것을, 새로운 하루가 다가오는 것으로 여겨선 곤란하다. 알다시피 우리의 매일은 대부분 비슷한 일들로 채워지는 ‘늘 똑 같은 하루’다. 루틴의 변경을 동반하는 새로운 하루는 진정으로 가끔씩 찾아온다. 입학, 졸업, 취업, 결혼, 출산 등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하루로 넘어가는, 일생에 몇 번 없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작 몇 개의 하루만을 살다 갈 뿐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2차 대전 중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남자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이하 슈호프)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슈호프는 반역죄를 ‘명목’으로 10년 간 수감되었는데, 작가 솔제니친 역시 반정부활동을 ‘명목’으로 8년 간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했으니 그의 자전적인 경험인 셈이다. 8년이니, 10년이니 하는 기간은 개인의 일생에서 어마어마한 시간이지만, 솔제니친은 단 하루의 이야기로 소설을 마쳤다. 그 안에서 그가 겪었던 것은 단 하나의 하루, 한 가지 패턴의 무한한 반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슈호프가 겪는 하루는 쉽지 않아 보인다. 얼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추위 속에서 노동해야 하고, 죽 한 그릇 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오늘은 어느 작업장에 배치될 지, 영창에 가게 되는 일은 없을 지 전전긍긍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수용소의 평범한, 늘상 반복되는 하루다. 심지어 소설의 마지막에 슈호프는 잠자리에 들어서 “오늘 하루는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하루를 반복하고 있느냐에 따라, 행복과 행운의 기준도 달라진다.
이 정도가 운이 좋은 하루라면, 수용소가 어떤 곳인가는 빤한 것이다. 사람들을 그런 수용소로 보내고 있는 체제가 어떤 것인지는 더욱 빤한 것이다. 솔제니친이 슈호프의 어느 평범한 날을 그린 것은 많은 결과를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서구 사회는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솔제니친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겼고, 소련은 그를 ‘반소작가’로 분류하며 작품활동을 금지했다. 사람들은 (솔제니친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소비에트를 ‘수용소의 삶’과 유사한 이미지로 기억한다. 어떤 하루는 세상의 진로를 슬쩍 바꿔 버린다.
인간이 단지 몇 개의 하루를 살아갈 뿐이라면, 어떤 하루를 반복하고 있느냐가 행복과 행운에 대한 감각을 결정한다면, 역사의 진행각도를 살짝 뒤틀 수도 있는 하루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차대한 사안은 바로 ‘하루’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에 슈호프와 같은 불행한 하루가 끼어들어 오지 않고,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납득할 수 없는 하루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밀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열악한 하루를 차례차례 지워나가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전이라는 명예의 전당은 지워져야 할 하루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소설들에게 반드시 한 자리를 내주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여전히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밀어나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소설이며, 납득할 수 없는 하루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고전의 자리에 오래도록 눌러 앉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짱가/ http;// blog.yes24.com
수용소 생활을 증언하는 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테렌스 데프레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독일 나치하의 유대인 수용소, 그리고 소련의 정치범 강제 수용소 안에서의 비인간적이고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책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문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 편의 다큐를 보는 듯한 시선을 가진 책이다. 갈등과 사건이 중심이 되는 여느 소설과는 달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수용소의 하루를 제 3자의 시선으로 담담히 따라간다.
감옥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인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까지. 그렇게 나누어 보면 주인공 슈프레는 착한 사람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괜찮은 사람 정도는 되겠다. 그토록 엄혹한 환경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놓지 않으려는 슈프레와 같은 사람도 있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하여 남의 것까지 어떻게든 착취하려는 인간도 있다.
수용소라는 공간은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인 조건마저도 박탈당한 공간이다. 먹고 입고 자는 일차적인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다. 특히, 인간의 욕구 중에 가장 먼저 채워져야 할 욕구를 식욕이라고 한다면, 수용소에서의 하루 생활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먹는 것을 최대한 확보하는 일이다. 이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생존이나 안전욕구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공감력은 들어설 틈이 없다. 소련의 강제 수용소보다 더 사정이 안 좋았던 독일의 아유슈비츠와 같은 곳에서는 먹고 자는 것, 씻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눈 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런 공간에서는 인간의 가장 악독하고 잔인한 특성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본성의 맨 살이 가장 신랄하게 드러난다. 어떻게든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며, 조금이라도 더 차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조그만 빵 한 조각 앞에서 아무 관심거리가 아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런 참혹한 환경에서조차 인간적인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이기적인 본성만이 아니다. 때로는 동료의 보급품을 맡아줘야 하고, 반장을 위해서 건더기가 좀 더 들어있는 국을 전해줘야 한다. 자신들의 정보를 팔아먹은 나쁜 놈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한다. 최악의 환경에서라도 상황이 허락하는 한 인간적인 가치, 사회적인 본성을 놓지 않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라고 이 모든 책들은 증언하고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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