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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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이모저모

간발 /황인숙

금동원(琴東媛) 2018. 1. 24. 23:15

간발

 

황인숙

 

 

앞자리에 흘린 지갑을 싣고

막 떠나간 택시

오늘따라 지갑이 두둑도 했지

 

애가 타네, 애가 타

당첨 번호에서 하나씩

많거나 적은 내 로또의 숫자들

 

간발의 차이 중요하여라

시가 되는지 안되는지도 간발의 차이

간발의 차이로 말이 많아지고, 할 말이 없어지고

 

떠올렸던 시상이 간발 차이로 날아가고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길을 놓치고 날짜를 놓치고 사람을 놓치고

 

간발의 차이로 슬픔을 놓치고

슬픔을 표할 타이밍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네

바늘에 찔린 풍성처럼 뺨을 푸들거리며

 

놓친 건 죄다 간발의 차이인 것 같지

누군가 써버린 지 오래

탐스런 비유도 간발로 놓친 것 같지

 

간발의 차이에 놓치기만 했을까

잡기도 했겠지, 생기기도 했겠지

간발의 차이로 내 목숨 태어나고

 

숱한 간발의 차이로 지금 내가 이러고 있겠지

간발의 차이로

손수건을 적시고, 팬티를 적시고

 

 

- 『2018년 제 63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2017,현대문학)


 

 

 「간발」

  ○심사평

  젊음의 에너지가 밀고 나가는 실험적이고 활기찬 목소리들 가운데에서 황인숙의 시가 눈에 띈 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적 접근 방법을 의도적으로 시도하거나 독특한 시를 만들려고 애쓰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좋은 시는 스스로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진다. ‘시인이라는, 혹은 시를 쓰고 있다는 의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사물을 보는 눈은 더 순수하고 명석하고 자유로워진다’는 김수영의 말을 황인숙의 시는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시 아닌 것들, 일상의 잡스러운 것들이 혼재된 곳에 촉수가 닿아 있는 황인숙의 시는 시라고 하기엔 너무나 일상적이고 일상이라고 하기엔 시라는 관습과 명칭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 어떤 떨림과 울림을 자신도 모르게 감지하게 한다. 그것은 몸에 체득되어 굳이 시가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제가 나와야 할 순간을 알고 있는 말일 것이다.
  ―김기택(시인 · 경희사이버대 교수)

  그의 시에 어리는 이 사소하고, 때로 비애롭지만 선량하고 따뜻하고 깊은 것! 이것은 감상이나 부작위 들과는 전혀 다르다. 연륜이 보태진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만도 아닌 듯하다. 시고 떫고 달고 쓴 나날들 속에서 남모르는 단련의 시간이 있고야 혹 자신도 모르게 이르게 되는 어떤 것일까.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자기 추궁의 치열함이며 한국어의 표현 능력을 넓혀가는 모험들로부터도 작지 않은 감명을 받았으나, 이 허술한 듯 수다로워진 황인숙 시의 위로와 온기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독보적이었다. 인간사에 ‘경지’란 말을 써야 할 적절할 자리가 있다면, 오늘의 황인숙 시가 바로 그러한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김사인(시인 · 동덕여대 교수)

 

 


  ○수상소감

  많은 문학상이 한 인물을 기려 그 이름을 붙였는데, [현대문학상]은 『현대문학』이라는 한 문예지의 권위에 의지해서 제정됐다. 문학의 중심이 월간지에서 계간지로 옮겨 가 월간지의 위세가 약해진 이후에도 월간 『현대문학』은 권위를 잃지 않고 꾸준히 제자리를 지켜왔다. 해방 이후 한국 문학의 역사는 『현대문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현대문학상] 수상자답게, 내 시에 현대성을 부여하려 앞으로 더 애를 쓰겠다. 현대성이란 새로움에 대한 활기찬 천착이리라.
  문학상이라는 게 결코 인격을 보고 주는 건 아니지만, 받으면 인격에 다소라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비뚤어지려던 마음이 순하고 선해지는 것이다. 문득 인생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 느껴져서이리라.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심사를 보신 분들이시여, 다른 젊고 재기 넘치는 후보작들도 많았을 텐데, 뽑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로 우정은 진실보다 강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