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 릴케 시 여행』
R.M.릴케 /정현종 옮김 | 문학판
릴케의 시를 우리말로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의 시뿐 아니라 그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통찰한 사람의 번역본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시 내면의 깊숙한 교감과 시 바깥의 무한한 자유로움, 시 고유의 섬세한 리듬을 아는 번역가 정현종 시인은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릴케 시 여행』에서 원작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번역과 함께 시론에 가까운 자신만의 깊이 있는 해설과 감상을 쉽고 단정한 문장으로 붙여 이제까지 어렵게만 느꼈던 시인의 시를 독자가 보다 친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기도하는 시간을 위한 책
나는 세상에서 무척 외롭지만, 매 순간을 신성하게 할 만큼
외롭지는 않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너무 작지만
영리하고 드러나지 않게
당신 앞에 꼭 무슨 물건처럼 놓여 있을 만큼
그렇게 작지는 못합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다만 내 의지와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그게 행종을 향해 움직일 때,
그리고 침묵 속에서, 때로 시간이 좀체 흐르지 않아
뭔가 가까이 오고 있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아는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있겠어요.
나는 당신의 온몸을 위한 거울이고 싶으며,
또한 당신의 무겁고 흔들리는 영상을 지탱하지
못할 만큼 눈멀거나 늙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드러나고 싶습니다.
나는 드러나지 않은 채 어디 있고 싶지 않아요,
내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나는 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서 내 사물의 파악이
참된 것이기 바랍니다. 나는 자신을,
아주 오랫동안 가까이서 본 그림처럼
그리고 싶으며,
내가 마침내 이해한 말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매일 쓰는 주전자처럼,
험한 폭풍우를 뚫고
안전하게 나를 데려가는
배처럼
○출판사 서평
한국 현대시에 언어의 미학과 사유의 우주를 펼쳐 보인 정현종 시인의 릴케 시 육필 감상하자.
“얼마나 깊고 높고 드넓은 울림을 갖고 있는가!
릴케의 영혼이야말로 천사이다” - 시인 정현종
치열한 고독과 명상. 신비의 시인, 릴케
‘꽃’의 시인 김춘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는 20세기의 인상적 시인이자 독일의 뛰어난 서정 시인이다. 릴케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를 내면적으로 들여다보고 삶을 극복하는 하나의 예술이 된다. 철학적인 반성과 내적 세계의 감성을 마치 형상을 그려주는 듯한 아름다운 언어 안에 잡아둠으로써 릴케의 시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으며, 실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상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적 공간을 창조한다. 고독한 개인만이 심오한 사물의 법칙 아래 놓인다고 생각했던 릴케는 ‘사물시’의 세계를 개척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시를 회의하고 모색하면서 말년에는 명작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와 「두이노의 비가」를 완성시켰다. 이처럼 세계 시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릴케의 시가 이번에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으로 《문학판》에서 처음으로 간행된다. 네루다와 로르카 시의 번역가로 유명한 정현종 시인이 릴케의 시 한 편 한 편을 심혈을 기울여 우리말로 옮기고 감상을 덧붙인 번역본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릴케 시 여행』은 릴케 시의 진수를 완상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사물의 신비를 일깨우고 세계를 팽창시키는 힘
숨 쉬라: 너 보이지 않는 시여! 완성하라
우리 자신의 본질과 우주의
교환을. 너 평형추여
거기서 내가 운율적으로 생겨나는.
단 하나의 파도―움직임, 그게
점차 바다가 된 것이 나인;
너, 우리의 모든 바다 중에 제일 포용적이니―
공간에서 자라난 따뜻함.
공간의 얼마나 많은 영역이 이미
내 속에 있는가. 내 헤매는 아들 같은
바람이 있다.
공기여, 너는 내가 흡수되었던 장소들로 가득 찬 나를 아는가?
너는 부드러운 나무껍질,
둥?, 그리고 내 말들의 잎이니.
-「2부 Ⅰ」전문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릴케 시 여행』에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릴케의 시 <가을날>을 비롯해, 평소 정현종 시인이 좋아하고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릴케 시 20편이 담겨 있다. 대개 시인의 눈과 가슴으로 감탄하고 감동한 시편들이다. 또한 시 여행을 하는 데 있어 좀 더 깊이 있고, 분명한 안내자 역할을 맡고 있는 해설은 시인의 50년 시력 인생의 농축된 정수라 할 만하다. 정현종 시인은 오래전 처음 릴케의 작품을 읽었을 때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숨결이 돌풍처럼 불어왔노라고 그 감동을 소회한다. 그리고 그 감동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정현종 시인은 “숨을 통해 우주나 만물과 내통하며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정현종 시인에게 숨이란 생명, 우주, 자연, 공기, 바람 같은 말들과 동의어이다. 시 쓰기는 곧 숨쉬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릴케의 시에서 한 우주가 숨결로 축소되는 것을 느낀다. 작은 숨결이 우주를 삼켜버리는 신비로운 감동, 그것을 정현종 시인은 희귀한 돌풍이라고 표현한다.
‘오렌지를 춤추라’(ⅩⅤ)는 한 구절 속에서도 정현종 시인은 오렌지의 맛과 향과 빛깔과 그것들이 열려 있는 공간이 그야말로 즙처럼 응축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 언어의 즙은 시인이 온몸으로 짜낸 것이다. 춤춘다는 표현은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춤춘 적이 있고, 사과를 좋아하는 나머지 아침마다 사과를 춤춘다고 한다. 릴케라는 대시인 앞에서 정현종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하며 겸손하다. 그는 릴케의 시를 감탄하고 찬양하는 중에 자신의 여린 마음을 드러낸다. 릴케의 시들을 보고 있는데 정현종 시인의 시가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은 릴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기꺼이 독자들을 안내한다. 독자들은 낯설고 광활한 신비로움과 더불어 릴케의 시가 한없이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는 듯한 경이로운 경험을 맛보게 될 것이다.
정현종 시인에 따르면 릴케는 모든 비범한 시인이 그렇듯이, 대부분 범상하게 넘기는 일이나 대상으로부터 충격과 영감을 받는다. 그는 듣는 시인이다. 듣되 비범하게 깊이 듣는다. 그 깊이는 광활하다. 그리하여 사물은 그의 귀 속에서 경이로운 탄생을 한다. 릴케는 오감으로 느낀 것을 즉시 내면화하는 시인이다. 그의 교감은 깊고 한없이 광활하다. 그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사물의 신비는 살아나고 세계는 무한을 향해 열린다. 릴케에게 세계는 바깥이 아닌 것이다. 릴케는 ‘전체’가 ‘새로운 것’보다 무한히 더 새롭다고 말한다. 마음이 늘 무한을 듣고 보는 영혼, 매인 데 없이 자유로운 영혼, 그러므로 항상 새로움 속에 있는 영혼, ‘우주적인 나’의 깊이로부터 스스로 생명력을 얻는 영혼…… 시적인 영혼. 정현종 시인이 말하는 이 영혼이 바로 릴케이다.
고독한 영혼이 탄생시킨 위대한 내면의 세계
정현종 시인은 신이 이 세상(바깥세상)을 창조했다면 릴케는 내면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한껏 제약이 없는 이 영혼의 작품을 읽으면 울림의 끝없는 여운 속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교감을 나눌 만한 내면의 풍요로움이 없는 황량한 시대야말로 영혼 없는 시대가 아닐까? 릴케의 시는 고독이 필요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황량하고 적막한 황무지에서는 사과나무가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메마른 텃밭을 잘 가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외면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내면의 텃밭을 가꾸어 나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슬픔, 열망, 아름다움에 대해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느낌을 우리는 망설임 없이 가꾸어 나가야 한다. 즉시 내면화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필요성에 의해 솟아오른 감정들은 그것이 어둠의 공간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영혼과 천사는 얼마나 비현실적인 단어인가. 그러나 우리는 안다. 행복이란 감정은 영혼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고, 천사처럼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를 늘 꿈꾸게 만드는 것임을. 릴케는 천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실재의 보다 높은 차원에 대한 인지를 보장”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의 보다 높은 차원에 대해서 정현종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 말은 인간의 삶과 예술에 관해 우리가 그동안 해 온 규정들, 그 제한들을 뿌리부터 흔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과 느낌의 궁핍에서 헤어날 수 있는 계기를 벽력같이 제공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무한 쪽으로 열리게 만든다. 그러한 기미와 눈짓을 느끼는 영혼이야말로 스스로 천사이다. 얼마나 깊고 높고 드넓은 울림을 갖고 있는가? 시인은 모름지기 그러한 울림의 끊이지 않는 메아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릴케의 시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계속 살아서 움직이며 우리의 내면을 꿈틀거리게 한다. 릴케는 영혼 없는 시대에 행복의 내면을 찾게 하는 놀라운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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