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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싯타르타/ 헤르만 헤세

금동원(琴東媛) 2018. 5. 22. 19:04

 

 

싯타르타』

  헤세 저/차경아 역/ 민음사/원서 :Siddhartha

 

 

    (작은 노트) 새해를 맞이하면 매년 그랬듯이 마음에 새겨두는 몇 가지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족들과 이웃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지만, 거창하게 욕심을 내면 모든 존재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더 내어보려고 결심한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 다짐하며 헤르만 헤세의 『싯타르타』를 다시 집어들었다. 내게는 많은 의미와 가르침을 주는 아주 귀한 책이다. 사랑과 자비로움의 본질을 새롭게 마음에 새겨 넣기도하고, 나 아닌 타자를 이해하는 지혜를 안겨주기도 한다. 운명으로 얽힌 나약한 인간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깨달음의 길로 한걸음 내딛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싯다르타를 통해 좀 더 밝고 희망찬 세계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면서... (금동원)

 

 

  ○작가소개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Herman Hesse, 1877~1962)

 

  1895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한 헤세는 첫시집 『낭만적인 노래 Romantische Lieder』(1899)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 Eine Stunde hinter Mitternacht』(1899)을 출판하게 된다. 특히 첫 시집『낭만적인 노래』는 R.M. 릴케의 인정을 받으면서 문단도 그를 주목하게된다.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고 그에게 확고한 문학적 지위를 얻게 해준 것은 최초의 장편소설 『페터카멘친트 Peter Camenzind』(1904)였다.
  1943년 헤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던 『유리알유희 Das Glasperlenspiel』는 1931년에 시작되어 1943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는데, 이 긴 성립시기는 나치시대와 일치한다. 히틀러로 상징되는 문화의 침체와 정신의 품위상실, 야만과 원시의 시대에 작가 헤세는 정신적인 봉사와 문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유리알 유희속에 세운다. 이 밖에 단편집·시집·우화집·여행기·평론·수상(隨想)·서한집 등 다수의 간행물이 있다.

  주인공이 불교적인 절대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싯다르타 Siddhartha』(1922) 또한 헤세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이 작품으로서 불교적 가르침과 사상의 복음서라기보다는 헤세 자신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깨달음을 갈망하면서 가장 밑바닥의 자아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속세의 쾌락과 정신적 오만을 초극하고 완성자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독자리뷰]

  ■ 사랑에 빠진 싯다르타의 뼈아픈 깨달음

  한겨레 | 정여울 문학평론가 |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여 누구도 함부로 조언을 해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한번 괴로움에 빠지기 시작하면 남들보다 훨씬 오래, 깊게 앓는다. 주변에는 누구도 그보다 나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충고를 해줄 사람도 없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이 바로 그렇다. 부모는 물론 최고의 벗 고빈다도, 심지어 당대 최고의 성인(聖人)이었던 고타마 싯다르타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싯다르타와 동명이인인 이 남자 주인공은 마침내 부모조차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떠난다.   수행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온갖 명상과 단식을 계속하지만, 어떤 수행으로도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이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풀어낼 수 없었다. 무려 28일 동안 단식을 해보기도 하고, 온갖 신비체험에도 몸을 던져보지만, 인생은 그저 끝나지 않는 고통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는 마침내 환속하여 속세에 뛰어든다. 장안 최고의 기생 카말라를 찾아가 온갖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최고의 장사꾼에게 돈 버는 솜씨를 배우기도 하며, 도박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핍을 아무리 채우고 또 채워도 위대한 깨달음의 길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을 못 이겨 마침내 강가로 도망쳐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 순간 내면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울림이 퍼져 나온다. 그것은 바로 ‘옴’이라는 소리였다. 세속의 싯다르타가 자살하려 할 때, 무의식의 싯다르타는 불현듯 ‘옴’이라는 신비의 소리를 타전하여 그를 구원해낸다. ‘옴’은 완전한 것, 완성을 뜻한다. 하지만 이 극적인 깨달음 이후에 싯다르타에게 또 한 번의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카말라가 싯다르타의 아이를 낳은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들이 태어나자 ‘라후라’(방해자)가 태어났다며 괴로워했다지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아들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헤세의 싯다르타에게 아들은 깨달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가 안다고 믿었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지구에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처럼, 사랑은 늘 바라보지만 알 수 없었던 세상의 숨은 이면이었다. 호의호식하며 자라난 아들은 아버지의 초라한 삶을 거부하고 뛰쳐나가 버린다. 싯다르타는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 쫓아가지만, 아들은 마치 잡상인을 대하듯 아버지를 내쳐버린다. 사랑 앞에선 발가벗은 거지가 되는 것만 같은 참혹한 아픔을 싯다르타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사랑 앞에서는 아무리 뼈아픈 굴욕도 참을 수밖에 없는 자기 영혼의 본래 생김새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찢어발기는 아들을 통해, 참담한 기시감을 느낀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아버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깨닫는다. 출가하여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아직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의 슬픈 얼굴을 강물을 통해 바라본다. 그는 결코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을 통해, 전심전력으로 사랑해도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세상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던 싯다르타가 몰랐던 단 하나, 그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면 세상 모든 것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깨달음이었다. 사랑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싯다르타, 오직 자신만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싯다르타가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하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 순간, 깨달음은 비로소 완성된다. 나 아닌 존재를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게 바로 가장 나다운 나라는 사실은, 내 존재를 갈기갈기 찢는 고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독자리뷰]

    싯다르타의 음성으로 듣는 운명

    stellina | 2002-04-10

 

  내가 싯다르타를 처음 만났을 때는 7월말, 대학에 들어와 첨 맞는 여름방학에 땡볕더위가 서서히 위세를 드러낼 무렵이었다. 오후 무렵의 기분좋은 나른함에 침대에 엎드려,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골라들었던 책을 꺼내든 것이 바로 만남의 시작이었다. 더욱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고타마 싯다르타의 생을 그렸으려니 생각했던 것이 이 책에 대한 기대의 전부였다. 새로운 세계를 접할 때의 호기심이랄까. 얇은 은빛 베일이 드리워진 세계.. 어머니의 태중에서 이미 기독교인으로 정해진 내 운명에,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분명 기분좋은 자극외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책의 첫장을 열었을때 계속되는 쉼표로 연결되는 헤세의 만연체적 묘사에 대한 불평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내가 생각한 싯다르타와 동명이인일뿐이라는 실망에도 불구하고, 난 한여름의 복판에서 숨가쁘게 책장을 넘겨갔다.

  얼마나 깊은 한숨이 폐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는가. 운명의 굴레에서 헤어나려는 한 인간의 몸짓에 난 얼마나 절망했었는가.. 바라문의 아들인 싯다르타가 자신의 알을 깨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헤세의 또다른 주인공인 데미안이나 나르치스,골드문트가 주는 자아찾기와는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던지고, 극한을 맛보고 또한 파멸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크게 네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각 부분마다 커다란 하나의 파멸과 깨달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바라문의 생활을 뿌리치고 나와 사문에 들어간 후 고타마를 통해 얻는 깨달음의 과정이고, 두 번째는 카말라를 통해 속세의 삶을 배우지만 덧없는 윤회의 소용돌이에 절망하는 부분, 세 번째는 카말라를 떠나와 바주데바와 함께 살면서 새로운 평화를 얻게 되지만, 혈육에 대한 애착이라는 그가 버리지 못한 마지막 기질 때문에 아픔을 겪게 되는 부분이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어둠과 아픔을 딛고 모든 진리는 우리의 생 속에,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에, 우리의 모습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파멸과 깨달음의 반복속에서 비로소 싯다르타는 자신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어린애같은 인간이 된다. 사유와 통찰이 아닌, 감각과 충동, 생의 욕구로 충일한 뭇 인간들의 삶을, 카말라의 정원을 나오면서 얻었던 비관적 인식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과 의미를 지니며, 그 상태로 완전함을 깨닫는 능동적 인식을 통해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내뱉었던 한숨과 눈물은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의 삶이 보여주는 극한의 허무 때문이었다. '진리'와 '생'에 대한 인간의 목마름과 구도의 길은 애초에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하나의 휘브리스(hybris)인가. 끝없이 운명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 생의 목적과 의미를 목도하면서 단순한 슬픔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서러운 울분을 내뱉게 만들었다. 그리고 똑같은 삶이 다시 되풀이된다 하여도, 결국 서있는 그 시점에서 그는, 또 나는 또 다시 지금과 동일한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 생의 굴레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 조차 이미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책을 덮은 후 나를 다시 바쁘게 만들었던 건 이 작품이 던지는 '생의 긍정' 때문이었다.

  모든 필연적인 것은 유용하며, 그 필연적인 것을 견디겠다는 운명애의 고백, '영원한 이고통이여,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는 니체의 생의 의지, 그 커다란 에너지가 싯다르타의 좌절과 고통으로 얼룩진 생을 통해 충일하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간의 모든 벽을 허무는 사랑에 대한 반 고흐의 순결한 믿음이, 죽어가는 것들마저도 곱게 끌어안는 동주 형님의 고운 의지가 잔잔하게 가슴을 두들겼기 때문이다. 인간, 생, 사랑...너무나 흔하고 쉽게 말해져 오히려 서러운 당위.. 이 책을 덮는 순간, 독자는 순간에 삶의 모든 것을 던지는 뜨거움으로, 그리고 끝없이 죽음과 생성을 반복하는 치열한 운명의 고리속에서 오히려 이것들을 곱게 끌어안고 갈수 있는 긍정에의 의지로, 어둠을 끌어안고 솟아오르는 밝음에의 의지로 충일함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