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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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여진 꿈 / 허수경

금동원(琴東媛) 2018. 10. 4. 07:58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여진 꿈

 

 

 

포도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언덕을 넘어가다가

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태양이 저 너머로 무한의 순간을 내미는 7월의 저녁이었다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

그리고 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아, 말의 귀에는 여름 들판의 늦은 야생 양귀비꽃이 꽂혀있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녀에게 길을 물었다

여기, 저 검은 숲으로 둘러싼 마을이 있다는데요, 어디인지요?

 

소녀는 양귀비꽃이 꽂혀있는 말의 귀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오래 전에 사라진 마을이에요

마을 학교도 교회도 시청도 시민회관도 여관도 도서관도

아주 오래 사라진 마을이에요

숲도 사라졌고요

 

소녀와 말이 사라지는데 태양이 거느린 새떼가

붉은 바람을 물고 날아올랐다

 

포도나무 사이로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번엔 노인에게 물었다

양귀비꽃을 꽂은 말과 소녀를 아세요?

 

노인은 포도가지를 자르는 전지가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 그 아이가 땅으로 들어간 건 아주 오래된 일이랍니다

말에 밟혀 죽었지요

 

그럼, 검은 숲으로 둘러있다는 마을은요?

아, 내가 사는 마을입니다. 그 마을 여관에다 미리 예약을 해둔

분이지요? 제가 그 여관 주인입니다.

 

양귀비꽃을 단 말, 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란다가 거의 포도넝쿨에 덮힌 여관에서 잠을 잤다

누가 우는지 밤은 길고도 습했고 깨어나니

방에도 포도넝쿨이 들어차서 나갈 수가 없었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2016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혼자가는 먼집, (1992, 문학과 지성사)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 역시 경상대학교 국문학과를 그곳에서 다녔다. 오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박하』 『아틀란티스야, 잘 가』 『모래도시』,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뮌스터에서 살고 있다. 독일에서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허수경 시인은 지난 3일 오후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