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의 습관
나희덕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사 안심이 된다.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고, 단단한 껍질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려본다.
지난 가을 내 머리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던
도토리들도 종지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흔들어보니 희미한 종소리가 난다.
마른 찔레 열매는 아직 붉다.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며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
그들을 장사지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때 이른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
바람이 잘 드는 양지볕에
향기로운 육신을 거꾸로 매달아
피와 살을 증발시키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던,
또는 고통의 설탕에 절인 과육을
불 위에 올려놓고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달아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건조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누군가 내게 꽃을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
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일 뿐이라고,
오늘 아침 방에 들어서는 순간
후욱 끼치던 마른 꽃 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
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적 없는 입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사라진 손바닥』,(2004, 문학과 지성사)
○196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임화예술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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