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하지 않는 사랑』- 릴케의 가장 아름다운 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재혁 역 | 고려대학교출판부
삶과 위대한 작업 사이에는 해묵은 적대감이 자리잡는다.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예술을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 서로간에 얽매거나 얽매이지 않을 때만이 영혼의 교접이 가능하다. 장미 가사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는 늘 이런 모순과 방황 속에서 살았다. 완성을 향해 불안스레 헤매는 시인에게 말은 본래의 존재를 넘어서게 하는 마법적인 소환이며 문학은 인간을 위한 지속적인 구원의 가능성이다. 인생은 꽃핌이며 죽음은 열매다. 죽음은 생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생의 궁극적인 완성이다. 그는 외친다. 대지여 보이지 않음이여 변용이 아니라면 무엇이 너의 절박한 사명이랴
○ 시집 속으로
사랑은 네게로 어떻게 왔는가
사랑이 네게로 어떻게 왔는가
햇살처럼 왔는가, 꽃눈발처럼 왔는가,
기도처럼 왔는가? 말하렴;
하늘에서 행복이 반짝이며 내려와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피어나는 나의 영혼에 매달렸다...
-『꿈의 왕관을 쓰고Traumgeko'nt』(1896) 에서
인생이란
인생이란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그냥 내버려두면 축제가 될 터이니.
길을 걸어가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날려오는
꽃잎들의 선물을 받아 들이듯이
하루하루가 네게 그렇게 되도록 하라.
꽃잎들을 모아 간직해두는 일 따위에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 머리카락 속으로 기꺼이 날아 들어온
꽃잎들을 아이는 살며시 떼어내고,
사랑스런 젊은 시절을 향해
더욱 새로운 꽃잎을 달라 두 손을 내민다.
-『 나의 축제를 위하여Mir zur Feier』의 제2판(1909)에서
나의 꽃들은 얼마나 너를 향해 소리쳤던가
나의 꿈들은 얼마나 너를 향해 소리쳤던가.
그토록 힘겹게 서로의 마음을 돌린
지금 나의 영혼을 해치려 드는 것은
이 가련하고도 두려운 외로움이다.
돛의 배를 불룩하게 해줄 희망은 없고,
다만 활기 없는 나의 의지가
숨가쁜 두려움 속에 엿듣는
이 넓고 하얀 정적만이 있을 뿐.
-강림절 Advent(1897)에서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이 시간이면 나의 감각은 깊어지니까요,
마치 오래된 편지에서 느끼는 것처럼
이때 나는 지나온 나날의 삶의 모습을
저만치 전설처럼 아득하게 바라봅니다.
어두운 시간은 내게 알려줍니다, 또 다른 삶에 이르는
시간을 넘어선 드넓은 공간이 내게 있음을.
그리고 어쩌다 나는 한 그루 나무와 같습니다,
묘지 위에 자라나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며
죽어간 소년이 슬픔과 노래 속에서 잃었던
(그의 주변에는 따스한 나무 뿌리가 얽혀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어 주는 그 나무와 같습니다.
-『기도시집 Das Stunden-Buch』- 제 1부 수도사 생활의 서」 에서
저기 한 그루 나무가 솟았다
저기 한 그루 나무가 솟았다. 오 순수한 승화여!
오 오르페우스가 노래한다! 오 귓속의 우람한 나무여!
그리고 모든 것은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과 눈짓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고요의 짐승들이 동굴과 둥지를 박차고
맑게 풀어진 숲 밖으로 몰려나왔다;
그들이 저희끼리 그토록 잠잠했던 것은
꾀를 부리거나 불안해서가 아니라,
다만 듣기 위해서였다. 포효, 지저귐, 음매는
그들의 마음속에선 하찮아 보였다. 그리고 거기
이것들을 받아들일 오두막 한 채도 없던 곳,
가장 어두운 욕망으로부터의 은신처,
입구의 기둥들이 흔들리는 그곳에
그대는 그들을 위한 경청의 신전을 세웠다.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Die Sonette an Orpheus』(1922)에서
수많은 먼 곳의 말없는 친구여
수많은 먼 곳의 말없는 친구여, 느껴 보라,
너의 숨결이 지금도 공간을 늘리고 있음을.
어두운 종루 그 들보 안쪽에서
네 자신을 울리게 하라. 너를 파먹어 들어가는 것이
그 영양분으로 강한 것으로 자라나리라.
언제나 변용 속으로 들어가고 나와라.
너의 가장 쓰린 경험이 무엇이던가?
마셔서 맛이 쓰다면, 네 자신이 술이 되어라.
이 넘침으로 가득 찬 밤에
네 마음의 십자로에서 마법의 힘이 되어라,
네 마음들의 야릇한 만남의 의미가 되어라.
그리고 지상의 것들이 너를 잊었다면,
조용한 대지에게 말하라: 나는 흐른다고.
빠른 물결에게 말하라: 나는 존재 한다고.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2)에서
○작가 소개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릴케의 어머니는 릴케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르네Rene라 짓고, 여섯 살까지 딸처럼 키웠다. 열한 살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배경이 되는 육군고등사관학교로 옮기나 결국 자퇴한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고서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릴케는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한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나 결혼한다. 1902년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는다. 클라라와 헤어진 릴케는 로마에 머무르며『말테의 수기』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1911년에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호엔로에 후작 부인의 호의로 두이노 성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곳에서 바로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릴케 만년의 대작이며 10년이 걸려 완성할『두이노 비가』의 집필을 시작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릴케는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그는 폴 발레리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낸다. 발레리의 작품을 독어로 번역하고 또 직접 프랑스어로 시를 쓰던 시인은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죽는다
○역자
김재혁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릴케 연구자로서 시인 및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버지의 도장』(시집)(문광부 우수교양도서), 『바보여 시인이여』,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시집), 『릴케의 예술과 종교성』, 『릴케의 작가정신과 예술적 변용』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릴케 전집 1-기도시집 외』, 『릴케전집2-두이노의 비가 외』, 『릴케 : 영혼의 모험가』, 『노래의 책』, 『로만체로』, 『넙치 1,2』, 『푸른 꽃』, 『겨울 나그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소유하지 않는 사랑』, 『골렘』, 『사랑의 도피』, 『세계의 동화』, 『민들레꽃의 살해』, 『환상동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말테의 수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변신』, 『회상록』 외 다수가 있다. 독일에서 『Rilkes Welt』(공저)를 출간했으며, 오규원의 시집 『사랑의 감옥』을 독일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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