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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내가 화가다/ 정일영

금동원(琴東媛) 2019. 6. 19. 20:23

 

 

『내가 화가다 -페미니즘 미술관

  정일영 저  | 아마존의나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도 여성이 화가가 되려면 좁은 문을 통과해야 했다. 여성 화가에겐 수많은 사회적 제약이 따랐고 교육 기회 또한 매우 제한되었다. 좁은 문을 어렵게 통과한 여성 화가들의 작품은 종종 스승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서명되었고, 서명이 없는 다수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 동안 남성 대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미술에서의 페미니즘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졌다. 그러나 500년 넘게 축적된 남성 화가와 그들의 작품 연구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페미니즘 미술 연구가 여전히 시작 단계라고 하지만 검증되고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확인된 사실인 양 적시하거나 거친 주관적 해석을 강요하듯 내놓는 경우들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여성에게 불리하고 부당한 조건들을 감안하더라도 여성 화가의 작품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 가두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든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바라보든 옥석을 가리는 일은 중요하다.

  또 하나, 예술가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다. 작품보다 삶으로, 삶 중에서도 특정한 스캔들 위주로 평가된 여성 화가들이 꽤 많았다. 주로 남성들에 의한 평가 경향이 더욱 그러하다. 한편 남성주의적 관점에서 그려진 여성들에 대해 ‘표현의 자유’와 ‘성적 대상화’라는 상반된 주장이 맞선다. 설령 팽팽한 주장이 평행선을 달린다 해도, 미술사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여성주의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이유로든 관심에서 밀려나 있었고, 그에 따라 여성주의 관점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스 신화와 성서로 대표되는 남성주의적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 속 여성들은 훈계의 대상이었고 관음과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존 버거가 쓴 책 제목 “Way of seeing” 그대로 ‘다른 방식으로 보는 방법’을 제시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다른 방식이란 ‘여성주의 시각’을 의미한다

 

 

 

○목차

 

1부 그리는 여성, 내가 화가다
첫째 장. 프리다 칼로와 케테 콜비츠 | 11

박제된 삶과 예술 | 13
둘째 장. 수잔 발라동과 유디트 레이스테르 | 41
보헤미안 이브의 찬란한 반란 | 43
셋째 장. 마리 로랑생과 19세기 여성 화가들 | 73
여성성에 갇힌 자유주의자 | 75
넷째 장.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선구자들 | 117
내가 화가다 | 119
다섯째 장. 타마라 드 렘피카, 그웬 존, 나혜석 | 151
스캔들, 그리고 새로운 시선 | 153

2부 그려진 여성, 내가 주인공이다
여섯째 장. 그리스 신화 속의 여성들 | 183
여성미의 기준은 남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 185
일곱째 장. 만들어진 팜 파탈 | 223
파멸에 이르는 삶을 운명적으로 타고 난 여자들 | 225
여덟째 장. 찬미와 혐오 | 271
굴절되고 왜곡된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 | 273
아홉째 장. 가정, 가족 그리고 아내 | 307
수많은 뮤즈들의 서글픈 삶 | 309

 

 

 

  ○작가 소개

 

  정일영은 어느 해인가 시간을 버티기 위해 펼쳤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꽂혔다. 이후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바탕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풀뿌리 시민단체 대표를 맡았던게 계기가 되어 서울시 주관 마을 인문 강좌프로그램에서 서양 미술사를 강의를 시작으로, 각종 시민단체,중랑아트센터, 인문 카페 등에서 미술사 강의를 이어왔다. 미술을 통한 독자들과의 인문학 소통을 말년의 양식으로 삼길 소망한다.

 

 

 

  ○책 속으로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사고를 당했다. 첫 번째는 나를 부러뜨린 전차 사고, 두 번째는 바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의 만남이었다.”

  고통과 절망 그리고 예술혼은 칼로를 소개할 때 자주 따라붙는 단어들이다. 때로는 일종의 신화로 과장되기도 하지만 칼로는 그런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바라본 그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엇비슷한 평가들이 그녀의 이름을 오히려 좁은 울타리에 가두어버린 것은 아닐까. 

  --- 「첫째 장. 프리다 칼로와 케테 콜비츠 - 박제된 삶과 예술」 중에서

 


  19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 「Louis David)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평론가들의 찬사가 줄을 이었다, 고전주의의 이상과 기품이 담긴 작품, 탁월한 명암 처리와 절제된 색채, 절묘한 빛 처리 등등 거장에 어울리는 미사여구가 넘쳐났다.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작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도 거들었다.

  “ 빛을 등지고 앉아 그림자와 미스터리에 젖은, 지적이고 수수한 여인의 초상화로, 베르메르를 연상시키는 미묘하고 특이한 빛과 색채를 가진 완벽한 그림이다. 한번 보면 결코 잊히지 않는 그림이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나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작품을 추적한 결과 원작자는 다비드가 아닌 무명의 여성 화가라는 사실이었다. ‘무명의 여성 화가’라니! 3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평가가 180도 바뀌었다. 그림에서 여성이 한 손을 숨긴 이유는 손을 묘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또 전체 구도를 고려한 적절한 인체 비례라는 평가는 그저 형편없는 인체 비례로 폄훼되어 추락했다. 그림은 그대로인 채 화가의 성별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 p.97

  오랜 세월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그림 한 점이 갑자기 빛을 보았다. 무명 화가의 라 피투라(la Pittura) 그림으로만 여겨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자화상의 주인공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 이탈리아)였다. 이 사실을 최초로 밝힌 미술사가 마이클 리비(Michael Levey, 1927~2008)는 “만약 남자의 그림이었다면 정당한 평가가 훨씬 더 빨리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페미니즘 미술사를 개척한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의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그렇다. 미술의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교육 기회가 제한되었고, 화가를 직업으로 삼기에도 많은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 화가들은 주로 가족의 공방에서 허드렛일을 맡거나 남성 화가의 조수를 하며 붓을 잡았다. 특별한 재능으로 훌륭한 그림을 완성한들 최종 서명은 아버지나 남자 스승의 몫이었다. 극소수 운 좋은 여성 화가만이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 p.120

 

 

 

독자 리뷰

 

■정일영, [내가 화가다]: 페미니즘 미술관

violette00 | 2019-06-13

 

 

 

 

  그려지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네,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신비로운 미소 때문이 아니라 바로 주인공이 "웃는 여자" 이기 때문이라고도 들었습니다. 그 당신 초상화들은 거의 남성 중심이기도 했지만 그들조차 표정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표정을 짓는 그것도 "여자"가 주인공이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했단 말에 놀랐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엔 없으니까. 그런데, 여자가 주인공인 것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면, "여자"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또 아주 많은 제약이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미술뿐 아니라 예술계 전반 아니, 사회적 전반에 거쳐 여성들의 활동은 많은 제한과 제약이 있었다는 걸 조금씩 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은 그림 속, 여자와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그린 그림은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력을 떠나, 그들의 그림에서 "관점,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였습니다.

 

 

 

  같은 그림이, 몇백 년이 지나서도 있지만 <아담과 이브>는 변하지 않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림은 어떨까요? 별 차이가 없나요? 아니오, 차이는 명백합니다. 저 사과를 쥔 손 즉, "죄"의 주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렇지만, "이브가 아담에게"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잔 발라동의 그림은 그 사과의 주인이 "함께"로 보여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비겁한 건 아담이었습니다.

 

-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이건, "당신 탓입니다. 그 여자 탓입니다" 일뿐, 그 어디에서도 "내 잘못입니다"라는 없습니다.  아니, 가장 마지막인가요? 네, 아담도 같이 먹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당신이 주신 그 여자 때문" 이니, 그 얼마나 비겁하냐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럼에도, 많은 그림들은 "이브, 혹은 하와의 유혹"으로 귀결을 냅니다. 아니, "여자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은연중, 억압된 여성들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그림들 중에서, 여성은 신체를 다 보입니다. 위의 "아담과 이브"에서 발라동 역시 여성임에도 어째서 여성의 신체는 적나라하게 보이면서 심의 때문에 남성의 그곳은 가렸다고 하니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여성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관음"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렘피카의 그림은, 도발적입니다 좋게 말해서는요.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렇게까지만 말할 수 있을까요? 전 이 그림을 그냥 "그림"으로서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관음"을 아예 대놓고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보고 싶니? 봐! 인 것도 있지만 어쩌면 역이용을 왜 이렇게 대놓고 했지? 싶습니다. 되려, <네 명의 남성 누드>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저 시선 끌기일 뿐이라고요. 물론, 작품의 구도, 색감 이런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입나다. 그랬다면 좀 더 달라졌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그림은 그저 그녀의 소위 "관종"적 성격이기도 했습니다. 스캔들 자체를 즐기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후원자인 부유한 귀족과 결혼했다..에서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동시대, 그러에도 전혀 다른 그웬은 그래서 더 귀하다 여겨졌습니다. 시선을 끌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그림은 여성으로서의 온유한 듯 하나 그 고집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뚝심으로 그웬은 그의 동생의 말처럼 지금, 상당히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나마, 붓을 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또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화가의 명성 때문에 쏟아지는 찬사들 중,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으로 알려져 상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가 아니라 그저 무명의 여인인 화가였단 사실은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에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권한" 그게 제한돼 있어서, 어쩌면 내 이름이 굳이 아니라도 그저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만족했을지도요.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과의 관계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어땠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로댕의 작품은 카미유에게 좋게 말해선 영감을 받았고, 그녀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라는 것도 그저 영화가 아니라 실제 그랬단 사실을 볼 때, 참, "여차"란 이름이 측은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깨만 늘어뜨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반기의 그림들" 도 있습니다.

 

 

 

 

  이 그림이 어떻습니까? 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별것인 그림입니다.

당시 여자로서 "그림을 그리는 나"를 그려낸 젠탈스키와 앙구이슬라의 그림은 <"여자"를 그리는 남자>와, 그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성이 주체가 돼, 훨씬 위쪽에 배치된 그녀, 앙구이슬라가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은 바로 화가인 "나" 자신,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처럼,  <내가 화가다> 인 셈입니다.  그때까지 "주체"가 남성인 것에서 여성으로 옮겨오는, 그러한 그림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림 몇 점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꾸준한 반기는 한 번쯤 부러트릴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읽다 보면, 도대체 천하의 난봉꾼인 저 제우스가 신 중의 신이란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피해자를 낳았습니다. 그저 신화는 신화일 뿐, 일 수도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째서 헤라는 가해자인 제우스보다 피해자인 "그녀"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싶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제껏의 잠재되어 온 억눌린 여성성이란 것이겠죠. 요새는 그래도 많이 깨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가해자에게도 늘 탓은 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은 씁쓸했습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그 세 여신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누구인가?를 왜 인간인 파리스에게 물었는가를 궁금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신화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파리스의 심판 이야기에는 인간 남자가 여신들보다 서열상 더 위에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 파리스의 심판은 단순히 서열상 상하관계를 넘어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본문 207p

 

  아, 싶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나간 것은 아닐까 신들 중 그 누구도 세 명의 편을 들기 곤란하니 중립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아마, "여자"가 아닌 "남성"은 결국 여자는 남성에게 어필해야 한다,라는 것 같았습니다. 신화의 곳곳, 이런 코드가 숨겨져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브와 판도라>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호기심을 주체치 못한 것 그리고 최초의 여자란 사실. 판도라의 상자는 실상,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 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그림 속 항아리는 해골입니다. 참 묘합니다. 어쩌면, 여성의 죽음일까요?

 

  이브 이전의 여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릴리스라고 합니다.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고도 하며 그녀를 이브를 꼬드긴 뱀이었다, 라고 하는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해야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 팜 파탈>의 기원을 만들기 쉬워져서 일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악녀" 라고 말하는 그리고 사람들의 파멸로 이끄는 여인인 팜파탈_ 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정숙한 여인 또한요.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남성의 잘못이 훨씬 큼에도 두각은 여성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춘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지금은 바뀌고 있을까요? 아직도 실은 가부장적인 세계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그러할 것이고요 다만, 아주 조금씩은 바뀌겠죠. 그 "조금씩"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시대에서 지금은 어엿이 그림을 그리지만 왜 "여류"가 붙는지..라고 묻지만, 전 부정적으로 생각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면, 여자니까요.  그 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려고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니란 것쯤 알지만 그 부정을 긍정으로 바꿀 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 표지의 그림이 불만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이 표지의 그림은 너무 이쁘기도 합니다. 결국 남성들의 눈을 사로잡자일까? "내가 화가다" 보단, 이게 이뻐서? 라는 생가도 했습니다만, 이 표지의그림이 무명의 여성화가의 작품성을 인정 받았기에, 라는 긍정의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네, 조금씩만 진일보 해도 좋겠습니다.

  (출처: Yes24 독서 서평단 리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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