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시인의 詩를 읽다

「마지막/ 시차적응」/ 마종기

금동원(琴東媛) 2021. 2. 9. 17:32

마지막/ 시차적응

 

 

마종기

 

 

  하루 종일 비행해서 지구의 반대쪽에 도착하고 두어 달 조용하고 울적하게 기다려준 집 앞에 선다. 도마뱀들이 소리없이 바쁘고 수천 개의 붉은 부겐빌레아 꽃이 초여름 볕에 졸고 있다. 낮은 그렇게 갔다. 밤이 되어도 열세 시간의 시차 사이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들었다. <봄> <9월> <잠이 들 무렵>을 연달아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온몸이 그냥 더워왔다. 자라투스트라의 말만 믿고 감동했던 작곡가의 외침은 목이 쉬고 마지막에서야 고백하는 따뜻한 안식의 노래. 안나 네트랩코의 목소리가 피곤한 가구까지 덮어버린다. 안나와 만나는 밤은 깊고도 넓다.

 

  그래서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말해도 변명이라고 비웃겠지만 그 사이로 세월은 흘렀고 나도 흘렀다. 팔순 나이에는 다른 이들의 말과 삶이 밝고 싱그럽고 매혹적이다. 서울서 들고 온 잡지를 펼친다. 어려운 시나 소설을 넘기고 나니 18세기의 장 자크 루소가 철학적, 문학적 실패를 확인하며 쓴 생애 마지막 글이 앉아 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라나, 더 이상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없는 나, 그런데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무엇인가고 묻는다. 첫번째 산책부터 열번째 산책까지 간다.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사라질 것인가. 표정이 불확실한 단어들이 살피는 자의 독백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에는 도대체 몇 개의 마지막이 있을까. 마지막이 왜 무게를 가지는가. 18세기에는 산책을 하다 마지막 글을 만났고 20세기 초에는 곡진한 마지막 노래를 들었다. 바람 불어대는 21세기에 나는 단지 녹슨 잠을 구걸할 뿐이다. 길게 보면 시차에 적응한다는 것은 지상의 내 자리를 찾는다는 말인가. 지친 몸으로 찾아 가는 변경된 주소는 서초구의 우면당 옆집에서 들었던 가야금의 진한 농현이나 김경아의 피리 솜씨를 따라갔던 곳이었나. 어느 만남에서야 헝클어진 내가 모든 시차를 극복하고 진정한 현장이 될 수 있을까. 믿기지는 않지만 언제쯤 우리는 편견까지 넘어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정신을 차리고 정진하여 며칠 후 이 밤낮에 적응한 뒤에 다시 정성과 애원을 모으면 몇 년의 시차도 극복할 수 있을까. 좀 길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 생전의 불효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내 마지막에도 세상은 쉬지 않고 흘러갈 것이고 나는 움직이지 않고 길어지는 시차만 보고 있겠지. 스쳐가는 모든 영혼을 쫓아가 잡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저기 지나가는 마지막 시차들, 오래된 초인의 시대도 가고 편한 벌판의 지열만 우리를 끝까지 위로해주네. 내 몸은 그간 어디에 있었지? 허술한 모든 변명이여, 멍에여, 질긴 마지막은 그때서야 끝나고 어지럼증 하나없이 환한 생명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구나.

 

 

  -《천사의 탄식》, (문학과 지성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