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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금동원(琴東媛) 2021. 11. 8. 22:48

 

 

《아주 사적인, 긴 만남》

- 마종기, 루시드폴/ 문학동네

 

 

만난 적 없는 낯선 존재에서  마음을 나누는 벗이 되기까지
""진심의 대화""로 남은 대서양 횡단 편지 54통"

○"저자 마종기는 1939년 1월생. 시인. 의사.
1959년 의대 본과 1학년 재학중 『현대문학』에 「해부학교실」 「나도 꽃으로 서서」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에 출간한 첫 시집 『조용한 개선』으로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고 그후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혜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도미 후,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공동시집 『평균율』 『평균율 2』를 펴냈다. 다른 시집으로 『두번째 겨울』 『변경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그 나라 하늘빛』『이슬의 눈』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늘의 맨살』, 산문집으로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우리 얼마나 함께』, 뮤지션 루시드폴과의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을 출간했다.

○저자 루시드폴(조윤석)은 1975년 3월생. 음악인. 화학자.
1998년 인디밴드 ‘미선이’의 첫 앨범 ‘Drifting’으로 데뷔, ‘lucid fall’ ‘오, 사랑’ ‘국경의 밤’ ‘레미제라블’ ‘아름다운 날들’ ‘꽃은 말이 없다.’ 등 6장의 정규 앨범을 냈고, 2009년 미국 화학회지JACS에 논문 「Micelles for delivery of nitric oxide」를 발표했다. 가사집 『물고기 마음』과 소설집 『무국적 요리』, 번역서 『부다페스트』, 시인 마종기와의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을 출간했다."

 

○책 속으로

 

part 1 시인의 숲, 소년의 바다
눈이 많이 내리던 12월의 첫날이었습니다.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로 스물두 시간의 비행을 거쳐 도착한 스톡홀름의 첫날 밤엔 피곤함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우리말과 멀어질 듯한 두려움에 무작정 구겨넣었던 시집들 중에, 처음 펼친 시집이 바로 선생님의 『이슬의 눈』이었지요. 한국을 떠나기 몇 달 전쯤, 작은 클럽에서 공연이 끝난 뒤 어느 착하고 소심한 팬이 저에게 직접 건네주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았던 시집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한국에서는 그 시집을 펼쳐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_루시드폴(p.22 첫번째 편지)

조군의 첫 메일을 보니 외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마음 풍경이 새삼 황량하게 그려져 있네요. 그래요. 환경이야 달랐지만 나의 처지 역시 비슷했지요. 나는 1966년 6월 중순에 미국에 도착했어요. 물론 그때는 직항 비행기가 없어 하와이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왔습니다. 아시아 사람이라고는 거의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미국 오하이오 주의 중소도시인 데이턴Dayton이라는 곳이었어요.(……)아마 조군보다는 조금 더 힘들지 않았나싶네요. 그날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 큰 병원에서 나는 밤새 여섯 환자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_마종기(p.30 두번째 편지)

part 2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
서둘러 윤석군의 ‘국경의 밤’ 앨범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첫 결과는 ‘어리둥절함’이었습니다. 내가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아니면 이게 세대 차이라는 것일까. 그러다가 지인이 ‘아주 좋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던 생각이 나서 다시 듣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아, 이 노래들은 혹 대화를 나누려는 외로운 영혼의 숨소리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_마종기(p.112 열일곱번째 편지)

선생님께서 제 음반을 들으시고 적어주신 글들에 감사하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음악은 대중음악이라 선생님께서 즐겨 들으시는 고전 음악이나 국악과 많이 달라서 당황하셨다는 말씀도 이해가 갑니다. 음악이나 시를 ‘배우는 것’에 대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어땠는지 돌이켜보았습니다. 저도 음악을 배우거나 악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고, 하다못해 대학 시절 ‘화성학’이나 ‘대위법’ 같은 강의도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_루시드폴(p.116)

part 3 별과 디펜스
윤석군이 귀국을 하면 그간에 공부한 과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그 전문직을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과학과 예술의 두 가지 길을 병행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는 하지만 한평생을 걸어볼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묘한 보완 작용을 할 것입니다. 내가 만일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시인의 길을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_마종기(p.222 서른여섯번째 편지)

선생님께선 저에게 과학과 음악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셨지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지금 무언가를 놓치면서 사는 건 아닐까, 그중 하나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깊어집니다. 고국에서 친구, 가족, 사랑하는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절실해졌습니다. 그리고 동료들과의 음악 연주, 협연, 술자리, 나의 음악적 발전, 이런 모든 것들을 더이상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어쩌면 고향에서의 휴식이 제 생각을 바꾸어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마무리하고 떠나고 싶습니다. _루시드폴(p.236 서른아홉번째 편지)

part 4 손끝에는…… 봄
저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음악도 마음껏 하고, 고국의 음식도 마음껏 먹고, 우리나라 말로 말하고 싸우고 울고 웃으며 살기 위해 돌아갑니다. 지금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하고 슬픈 소식들이 더 많습니다. 지금껏 멀리서 듣고 보아온 소식들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저는 너무 바쁘고 또 멀리에만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 소식 한가운데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거리에서, 투표함 앞에서, 식당에서, 술집에서, 집 안에서, 운동장 안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겠지요. 그때그때 느끼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생각하는 것들을 노래로 만들고 부르겠지요. _루시드폴(p.279 마흔여섯번째 편지)

이제 고국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음식을 먹고…… 윤석군의 메일을 읽으며 나는 천천히 목이 메어왔습니다. 축하의 의미고 또 한편으로는 미련한 내 아쉬움 때문이었겠지요. 모쪼록 못내 사랑하는 고국에서 무엇이든 마음 두고 있는 것을, 매일의 생활을 사랑하고 즐기세요.(……)윤석군의 메일에서 좋은 음악인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지는 않고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해야겠다’는 말에 찬성입니다. 단지 그 공부가 윤석군이 전공한 생명공학 계통이라면요. 그러나 넓은 의미로 우리가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책도 많이 읽고 다른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알아보는 것, 그것도 광의의 공부라고 한다면 그것을 게을리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모든 예술은 결국 상통한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더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_마종기(p.281 마흔일곱번째 편지)

선생님의 말씀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요.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이 제 음악과 노래의 힘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마음속으로 누군가가 네가 사는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knowing’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알아가는 것, 깨달아가는 것,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배운다기보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내 내부의 앎. 이것이 저를 밀어가는 힘이자 목표라고 여겼어요. _루시드폴 (p.285 마흔여덟번째 편지)

---본문

 

○출판사 리뷰

7년 전 대서양을 건넌 한 통의 편지에서 시인과 뮤지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다
2007년 8월 24일 지금으로부터 7년 전, 한 통의 편지가 대서양을 건넜다. ‘선생님은 아마도 저를 모르시겠지요’라며 머뭇머뭇 인사를 건네던 스위스 로잔발 편지는, 곧 미국 플로리다의 한 시인에게 닿는다. 그리고 시인은 일주일 뒤, 만나본 적 없고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던 이 편지의 주인공에게 자신의 시 「첫날밤」을 적어 화답했다. ‘그랬었다, 내가 처음 외국에 도착했던/ 삼십 년 전 밤에도 비가 왔었다./ 사정없는 외국의 폭우가 무서워/ 젊은 서글픔들이 오금도 펴보지 못하고/ 어두운 진창 속에 던져 버려졌었다.’ 50년 가까이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살아야 했던 시인 마종기가, 역시 낯선 땅에서 생명공학과 음악 사이를 오가며 홀로 분투하던 뮤지션 루시드폴에게 보낸 첫 편지였다.
그후 2년간 두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럽고 소박한 대화가 흘렀다. 때로 서로에게만 들리는 독백으로, 처절한 흐느낌으로, 때로 서로를 향한 끝 모를 지지와 응원의 손짓으로 읽히는 대화는 54통의 편지로 남았고,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이후에도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으며 만남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지난 봄부터 1년간 다시 집중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흐르기 시작한 대화의 물길은 여전히 맑고 세찼으며 시간의 더께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무척 그리워하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마음을 나눌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사람들

그간의 근황을 풀어놓으며 마종기 시인은 루시드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에게 루시드폴은 무척 얘기를 해보고 싶었던, 그리워하던 스타일의 사람이었다고. 어릴 때부터 시를 써온 의사 시인에게, 대부분의 친구는 한쪽의 사람이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거나 의사이거나. 그것이 섞여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같이 드물기만 했다. 그러다 공학, 과학 공부를 한 이가 예술에 대한 주장이 있는, 간단히 얘기하면 르네상스맨 같은 사람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루시드폴 역시 오랜 시간 홀로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지었다. 음악을 이야기하고, 함께할 누군가를 원했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주변에는 음악적으로 이방인들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섬처럼 이국의 자기 방에서 매일 밤 그리움과 고독을 기타줄에 옮겼다. 심적으로 극한에 내몰릴 때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마종기 시인의 시집이었다. 그는 시인의 시를 읽고 노래 가사를 지었고, 그의 시집을 붙들고 혼자라는 ‘고립’의 시간을 넘어섰다. 홀로 묵묵히 만든 노래들로 루시드폴은 점차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시인의 마음도 움직였다.

이들의 편지가 평범한 대화이면서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

서로 다른 대륙의 이쪽과 저쪽에서, 자주 혼자였고 마음을 나눌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세상의 수많은 관계를 떠올려보게 한다. 그 관계들에는 저마다 부르는 이름이 있다. 친구, 선후배, 지인 혹은 연인……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부르는 이름이 어떠하든 마음을 깊숙한 곳까지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또 그와 오랜 시간 함께 가는 것은 그 두 사람 모두 온맘을 기울이는 진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편지를 주고받으며 루시드폴은 시인의 방대한 숲으로 조심스럽게 걸어들어갔고, 마종기 시인은 뮤지션의 낯선 바다로 힘껏 노를 저어갔다. 처음 상대의 낯선 땅에 발을 내디딘 이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고독과 그리움’이라는 공통분모였지만, 둘의 만남을 깊고 오래 지속시킨 힘은 쉬지 않고 노를 저었던, 내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이들의 ‘진심’에 있을 것이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두 사람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이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흔치 않은 편지로 읽히는 이유이다.

서로를 진심으로 부르고 화답하는,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메아리 소리

‘세상이 어두워질 때/ 기억조차 없을 때/ 두려움에 떨릴 때/ 눈물이 날 부를 때/ 누구 하나 보이지 않을 때/ 내 심장 소리 하나 따라/ 걸어가자 걸어가자’(루시드폴의 노래 〈걸어가자〉) 루시드폴이 공학도의 삶을 내려놓고 음악인의 길을 걷는 동안, 시인은 여전히 아름다운 시를 짓고 새 시집을 발표하는 것 외에도, 의학과 문학, 과학과 예술 사이에 가교를 만들고, 통섭이란 개념을 세우는 데에 힘쓰고 있었다.
온몸으로 삶을 밀어나가는 젊은 뮤지션에게 노시인은, 거센 풍랑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있다. 뮤지션은 타국의 시인에게 고국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로, 또 경계에서 살아온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한 우정과 존경으로 답한다. 이 두 사람이 나눈 편지의 숱한 행간에는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메아리 소리가 있다. 마음의 문턱을 낮추고, 배려하고 양보하며 서로를 진심으로 부르고 화답하는 관계의 메아리다. 삶이 계속되는 한, 끊이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메아리가 이렇게 다시 40통의 편지로 모였다. 이 편지들은 삶의 갈림길에서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마냥 혼자인 듯 생각이 들 때, ‘거기 누구 없냐’고 목소리를 힘껏 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세상 그 어딘가에는 분명 그 소리를 듣고 화답할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당신의 마종기, 당신의 루시드폴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마종기, 루시드폴/ 문학동네

 

○책 속으로

 

part 1 서울의 봄
모처럼 선생님께 긴 편지를 보내려니 마음이 설렙니다. 2009년 이맘때였던가요. 인사동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간 저는 두 장의 앨범을 냈고, 세 번의 이사를 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썼고, 많은 공연을 했습니다. 이젠 정말이지 한국 땅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전업 뮤지션이 되었지요.(……)요즘 저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만큼 운좋은 일도 없을 텐데, 저는 참 행운이지요. 올해엔 선생님 스케줄과 제 공연 일정이 맞아서 또 기쁩니다. 선생님께 공연을 보여드리는 것도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요. 2년 만인가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오래된 것만은 확실한데…… _루시드폴(p.9, 14 첫번째 편지)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 잘 받았어요. 그간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요즈음은 서울서 장기 연주 공연에 바쁘다니 모두 반가운 소식들입니다. 윤석군 말대로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09년 봄 이후 내가 고국에 있을 때는 자주 만나왔지요. 그러다가 작년에는 내가 서울에 두 달 체류하는 동안 정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네요. 아마도 그 큰 이유는 내 사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_마종기(p.17 두번째 편지)

part 2 결정되지 않은 노래
올봄 공연 때부터 무언가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어요. 조금 간간이 말하자면, 시를 ‘쓰기’보다 ‘부르고’ 싶어졌다고 할까요. 아니, 시가 아니어도 상관없지요. 시일 수도, 시가 아닐 수도 있겠고, 그냥 나의 모어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졌지요. _루시드폴(p.135 열아홉번째 편지)

이번 편지를 보니 눈에 확 뜨이는 곳이 있네요. ‘시를 쓰기보다 시를 노래 부르고 싶다’는 말. 내가 알기로도 사실 시란 것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지요. 옛날 유럽 쪽에서 부자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연극하던 광대 비슷한 연예인들이 노래를 부르다가 그 가사가 눈에 뜨이기 시작했고 그 운문 낭독이 인기가 생기니까 노래 못하는 상류 계급이 가사를 만들어 읽는, 그러니까 시를 읽게 되었다고 해요. 한국의 시도 거의 같은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학자들이 많지요. 떠들면서 춤추는 것에서부터 춤 안 추고 노래만 하는, 그러다가 가사만 만들기 시작해서 시문학이 되었다고들 하지요. 요는 시의 모태는 노래고 운문이어서 곡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노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윤석군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새로운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모양새로 보입니다. _마종기(p.139 스무번째 편지)

part 3 꿈의 다른 표징
저는 아버지와 저 둘이서 차례를 모십니다. 아버지도 남자 형제가 없고 저도 그렇지요. 요즘 아버지는 지방을 쓰실 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 위치를 바꿔 쓰시기도 하고, 글자를 틀리기도 하십니다. 예전엔 그럴 때마다 이것저것 제가 참견도 하고 말씀도 드렸는데, 요즈음엔 그러지를 못하겠어요. 맞고 틀린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가족과의 관계가 그렇지요. 어제 서울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불현듯 선생님의 시들이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운 아들」 「손녀를 안고」「동생을 위한 조시」 같은 유독 가족과 관련된 시들이었지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도 그렇고요. 눈을 감고 곰곰이 시를 더듬어보는데, 아 내가 선생님의 시 중 가족에 대한 시를 유독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_루시드폴(p.228, 스물아홉번째 편지)

나는 때때로 고아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려는 사람은 때때로
고아처럼 외로워야만 한답니다. 오죽하면 작곡가 베토벤은 외로움이 자신의 종교라고까지 고백했겠습니까. 미국의 의사 시인으로 미국 현대시의 문을 연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외로움을 자주 느끼지 않는 자는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고아처럼 느끼게 하는 이 비 오는 우중충한 시간을 아파하면서도 고마워하고, 고국을 멀리 떠나 살고 있는 내 신세를 힘들어하면서도 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_마종기(p240 서른번째 편지)

part 4 아직 바람은 거칠어도
외로움은 시인이 꼭 먹어야만 하는 약이고 아무리 쓰고 떫어도 먹어야만 사는 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예 팔자라고 생각하고 외로움과 차라리 친해져서 형제같이 되는 게 좋다고요. 그리고 외로움의 아픔과 눈물은 자주 시인이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랬지요. 기타줄은 한 줄씩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줄이 다 함께 붙어 있으면 줄들은 혹 외롭지 않을지 몰라도 더이상 소리를 내고 음악을 만들 수가 없다, 떨어져 있으니까 소리가 난다. 아마도 모든 예술이 다 그럴 것입니다. _마종기(p.292 서른여섯번째 편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 적당한 거리가 주는 외로움에는 긴장감이 있어서 오히려 더 관계를 가깝게 해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떨어져 있지만 완전히 떨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이어져 있음을 갈구하면서도 떨어져 있고 싶어하지요. 한 존재의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유배겠지요. 사람들은 어쩌면 영원히 그런 연결의 긴장감을 잃어버리게 하는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_루시드폴(p.298 서른일곱번째 편지)

요즘 저는 모든 생물에게는 적당한 영토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사람도 그렇다 싶었습니다. 심지어 음악도 그렇지요. 적절한 공백은 그것만으로도 음악적이니까요. 적절한 부대낌이 주는 활기와 즐거움을 넘어서면 괴롭고 밑돌면 외롭지요. (……) 누구나 두 가지 성향을 다 가지고 있겠지만 저는 후자에 속하는 인간형에 더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의 최소한의 교류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늘 어딘가로 스스로를 격리시키려 애써왔는지도 모르겠어요. _루시드폴(p.299~300 서른일곱번째 편지)

모쪼록 오늘의 인기에 연연해하지 말고 초조해하지 말고 팬과 청중을 따뜻하게 위무하고 보듬어주는 가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그 청중 안에 있지는 못하겠지만 언젠가 윤석군이 나이들어 백발을 날리며 청중에게 정성을 다해 노래를 들려주는 광경을 상상해봅니다. 나이든 노래를 듣는 루시드폴의 청중은 깊은 위안과 즐거움을 누리겠지요. 바로 그때서야 드디어 루시드폴은 가수가 됩니다. 훌륭한 가수, 자신도 만족하는, 세월 속에서 잘 익은 가수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윤석군을 믿습니다. _마종기(p.323~324 마흔번째 편지)

비록 나는 평생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확실하게 헤아릴 수 있는 것에만 의지해 살아온 의사였지만 누구에게라도 언제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마도 내가 어쩔 수 없이 삶과 죽음의 가교에 서서 오래 살아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요. 그중 하나는 주위의 착한 이웃을 위해 정성을 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도 늘 엄격해야겠지만, 그래서 강직한 사람도 되어야겠지만 그보다는 착하고 힘없는 것에 더 마음을 주고 그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시간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_마종기(p.324~325 마흔번째 편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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