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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그 여자는 화가 난다(Hun er verd)

금동원(琴東媛) 2022. 7. 9. 16:04

 

《그 여자는 화가 난다》 -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고백

-마야 리 랑그바드 저/손화수 역 | 난다 |

 

 

◎책 소개

 

“여자는 한국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덴마크에서 자랐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분노……
갖은 ‘차별’의 경험을 여과 없이 고백하는 절규의 라임이자 펀치라인!

 덴마크 시인 마야 리 랑그바드의 시집이자 국가 간 입양에 대한 수기 『그 여자는 화가 난다―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고백』을 난다에서 선보인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하여 선보이는 마야 리 랑그바드의 작품이다. 덴마크로 입양된 한국계 입양인인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 간 입양의 허상과 이를 용인하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았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2014년 덴마크에서 출간되었을 당시 국가 간 입양을 처음으로 비판하고 나선 책으로서 덴마크뿐만 아니라 스웨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를 읽고 해외에서 아동을 입양하기로 했던 결정을 재고하거나 철회했다는 가정들의 소식이 여럿 들려올 만큼, 마야 리 랑그바드의 책은 덴마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태껏 그의 입양국인 덴마크에서만 이루어진 증언이 이제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생국인 한국의 독자들에도 도달할 예정이다.

 작중 화자이자 저자 본인이기도 한 “여자”는 국가 간 입양이 아이와 친가족, 양가족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며, 입양되지 못했다면 “배고픔에 허덕이는 삶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레즈비언인 그가 덴마크로 입양된 것은 “행운”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나 국가 간 입양을 주선하는 입양기관과 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권력 구조에 대해 알아갈수록 “여자”는 국가 간 입양을 이상화하는 일반적 사고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그 과정에서 “여자”가 체험하는 분노를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여자”는 국가 간 입양이 비서구권 국가의 아이들을 상품화해 서구의 부유한 가정으로 “수출”되는 것과 다름없다고 증언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가정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모국 밖으로 유통시켜, 부모가 되고 싶은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여자는 자신의 양부모가 원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물론 입양기관이 양부모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입양아를 상품화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여자는 홈플러스에서 프랑스산, 이탈리아산, 스페인산, 포르투갈산, 호주산, 아르헨티나산, 칠레산, 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산 중 어떤 와인을 선택할까 고민하는 행위와 입양 행위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276~277쪽)

 “여자”는 “입양은 친밀감과 애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입양이라는 조치를 취하기에 앞서 “아이들이 친부모 밑에서 자랄 수 있도록 적절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힌 헤이그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한국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며, 한국이 이룬 급속한 경제 발전의 약점과 한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의 분노는 “국가 간 입양”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범사회적 통찰을 제공한다. 즉 “여자”의 “화”는 단순히 국가 간 입양 산업만이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경제적 구조와 세계적인 불평등을 겨냥한다. 마야 리 랑그바드의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바로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읽혀야 한다(김 수 라스무센).

 

 

◎작가 소개

 

코펜하겐에 거주하는 작가이자 번역가이다. 1980년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덴마크로 입양되었으며, 2003년 덴마크창작문학아카데미(Danish Academy of Creative Writing)를 졸업하고 2006년에 『덴마크인 홀게르씨를 찾아라』라는 개념시 모음집을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이 시집으로 그는 독자들의 큰 성원과 함께 덴마크에서 가장 권위 있는 데뷔문학상인 보딜-외르겐뭉크크리스텐센 데뷔문학상을 받았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서울에 거주하며 출생지를 찾고 피를 나눈 가족과 재회했다. 이후 국가 간 입양에 비판적인 입양인 커뮤니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며 『그 여자는 화가 난다?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고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마야 리 랑그바드는 현재까지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저서를 다수 출간했다. 그의 문학은 국가 간 입양, 국가적 정체성, 인종차별과 혈연관계, 음식과 질병, 그리고 문학 집필 등 여러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탐구하는 데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덴마크소설문학상을 수상하고 덴마크예술재단으로부터 3년간의 집필활동 보조금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각예술가 쥬노 김Jeuno JE Kim, 한국학 교수 카린 야콥센Karin Jakobsen과 협력하여 김혜순 시인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Death』을 번역하였다. 이외에도 작가는 덴마크, 스웨덴, 한국의 다양한 예술인들과 함께 비디오예술, 행위예술, 연극, 영화, 음악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역 :  손화수(Hwasue S. Warberg)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어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대학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1998년 노르웨이로 이주한 후 크빈헤라드 코뮤네 예술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현재는 스타인셰르 코뮤네 예술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2002년부터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문학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노르웨이번역인협회 회원(MNO)이 되었고, 2012년과 2014년에 노르웨이문학번역원(NORLA)에서 수여하는 번역가상을 받았다

 

 

◎책 속으로

 

여자는 자신이 수입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자신이 수출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어린이를 입양 보내는 국가는 물론 입양기관도 국가 간 입양을 통해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여자는 입양기관이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일을 우선적으로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물론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이 입양 보낼 아이들을 먼저 찾아나선다는 사실은 참을 수가 없다.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태생적 문화와 부모에게서 무작정 분리하기보다 그 부모와 가정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먼저 찾아보아야 한다. [……] 여자는 오늘날 ‘아이들을 위해 부모를 찾아주는 일’보다 ‘부모들을 위해 아이를 찾아주는 일’이 더 우선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바로 그 때문에 소위 ‘어린이 수집가’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던가. 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이 입양을 보내려는 부모들보다 훨씬 많지 않았더라면, 입양기관이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부모들에게 아이를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큰돈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자는 입양 보내기를 원하는 부모보다 입양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pp.18~19

 

여자는 자신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 p.90

 

여자는 입양인들의 삶이 성공적이라 간주하는 일반적 사고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입양인들을 동정 어린 눈으로 보는 일반적 시각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입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자에게 동정과 연민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여자가 입양되었기 때문에 부족함 없는 삶을 산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여자가 입양되었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여자가 입양되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 p.178

 

여자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자신이 한국계 입양인인 동시에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 화가 난다. 한국계 입양인이나 레즈비언 둘 중의 하나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것일까. 여자는 자신이 한국계 입양인이나 레즈비언 둘 중의 하나였다면 삶이 더 쉬웠을 것이라 믿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정말 그럴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여자는 자신이 레즈비언이기에 덴마크로 입양된 것이 행운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p.203

 

여자는 자신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그렇지 않다면 친부모와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여자가 이틀 연속 잠만 잤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자는 식사를 한 후 바로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누워 잤고, 한 차례 음식을 먹었던 것과 화장실에 갔던 것을 제외하고선 이틀 후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통역을 맡았던 경희는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 그 자리에 올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여자와 친부모는 침묵 속에서 삼계탕만 먹었다.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분위기는 꽤 편안했다. 그럼에도 여자는 집에 돌아온 직후 말할 수 없는 피로감을 느꼈다. 여자가 왜 그렇게 피곤했는지는 아직도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원인 모를 피곤함은 여자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몸속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 p.243

 
 
◎출판사 리뷰
 

산업으로서의 국가 간 입양, 그 민낯을 드러내다

 

 친부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놓기 전에 그들이 아이를 기를 수 있게끔 지원해야 한다는, 당연해야 할 명제가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왜 입양기관은 미혼모에게 경제적 지원에 앞서 국가 간 입양을 제안하는 것일까. “여자”는 그 원인을 “국가 간 입양이 공급과 수요를 바탕으로 산업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여자는 오늘날 ‘아이들을 위해 부모를 찾아주는 일’보다 ‘부모들을 위해 아이를 찾아주는 일’이 더 우선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바로 그 때문에 소위 ‘어린이 수집가’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던가. 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이 입양을 보내려는 부모들보다 훨씬 많지 않았더라면, 입양기관이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부모들에게 아이를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큰돈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자는 입양 보내기를 원하는 부모보다 입양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19쪽)

 

 그는 “입양기관이 국내입양보다 국가 간 입양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며, “한국의 입양기관이 미국이나 유럽으로의 입양을 성사시킬 경우, 한국 정부에서 기준으로 제시하는 금액보다 훨씬 더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국가 간 입양을 입양기관에서 권장하고 있음에 분노한다. 이익추구적인 국가 간 입양의 본질을 숨기고 미화하려는 입양기관들의 노력은 언어의 사용에서부터 나타난다. “여자”는 입양인들의 출신국을 ‘기부국’이라 칭하고 자신들이 그들에게 ‘가정을 제공’한다고 말하는 입양기관의 위증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국가 간 입양이 이루어질 때 “얼마나 많은 돈이 연루되는지 안다면 아이를 기부한다거나 제공한다는 등의 말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들의 언어를 피하기 위해, “국제입양” 또는 “해외입양”이라는 단어 대신 “국가 간 입양”이라는 말을 쓴다. “정치인들과 입양기관들이 사용하는 ‘국제입양’이라는 말에 비해 ‘국가 간 입양’이라는 말은 더 비판적으로 들”리며, “이 표현이 정치인들과 입양기관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국내입양보다 국가 간 입양이 더 많은 돈을 가져다주기에, 입양기관은 출산 후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도 못한 미혼모들에게 국가 간 입양에 동의하는 서명을 요구한다. 단지 ‘양부모와의 관계에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친부모에게 아이의 행방을 제공하지 않고, 입양 기록조차 제대로 남겨두지도 않는다. 친부모가 살아 있는 아이보다 고아인 아이가 입양이 수월하기에 ‘고아 호적’을 만들어 부모가 없는 아이로 만들고, 나이가 어릴수록 입양이 수월하기에 생년월일을 사실과 다르게 기재한다. 이러한 행정적 조치로 아이와 친부모 간의 연이 영원히 끊어진다거나, 평생 제 나이와 발달 과정에 맞는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은 뒷전이다. “여자”는 이러한 국가 간 입양 사례들에 화를 낸다. 그리고 국가 간 입양은 "과거의 식민주의적 잔재"에 불과하며, 서구 사람들에게 아동을 공급하기 위해 비서구 국가 여성의 “자녀를 직접 기를 수 있는 권리”를 착취하고 약탈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발한다. 이러한 “여자”의 고발은 국가와 인종, 사회적 계급 간의 힘의 불균형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낱낱이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향한

근원적인 분노가 가진 힘

 

 덴마크의 신문 『인포메이션』지는 서평을 통해 “『그 여자는 화가 난다』에서의 분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분노”라고 말한 바 있다. 작중 “여자”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그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이때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다. 그의 분노는 생산적인 힘이자 창조와 변화의 원천이다. 이는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인 충동이며, 비판적 사고의 한 형태이다. 분노는 “여자”로 하여금 데카르트적 회의론자처럼 끊임없이 이전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긍정과 부정,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나아가도록 한다(김 수 라스무센).

 

 “여자는 분노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분노하는 자신을 탓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가 분노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여자와 같은 상황에서 여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236쪽)

 

 “여자”의 분노는 모순적이며 자기비판적이다. 분노의 확실한 대상을 찾기 위한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회의 일반적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들을 향했다가, 다음 문장에서는 그들에게 화를 내는 “여자” 자신을 향한다. “여자”를 화나게 한 이들 역시 사회가 요구하는 사고방식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여자”는 “자신을 탓하는 자기 자신”에게 분노한다. 다시 방향을 잡은 여자의 화는 처음과 같이 개개인을 향하기보다 “일반적 사고” 그 자체를,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조장한 사회구조를 향한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을 통해 “여자”의 분노는 한층 객관적이고 분명해진다. 그에 따라 마야 리 랑그바드의 시 역시 점점 더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하고, 분노의 참된 대상에 가까워진다.

 

 “여자는 병원비 때문에 아이를 입양시켰던 미숙에게 화가 난다. 아이를 입양시키지 않으면 미숙이 병원비를 지불할 수 없다는 현실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 여자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시키면 병원비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제안을 공공연하게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입양 서류에 서명을 하는 미혼모들에게 아동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여자는 한국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입양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173쪽)

 

 “여자”는 분노를 통해 사회적 현상에서 그 근원의 문제를 읽어낸다. 미혼모에 대한 화는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입양을 권유한 입양기관에 대한 화로, 그리고 마침내는 이러한 입양기관의 만행에 제동을 걸 만한 법적 조항의 부재를 향한다. 미혼모의 아이들이 상품화되는 현상은 미혼모 개인의 잘못도, 입양기관의 잘못도 아니라 바로 이를 용인한 제도적 문제에 서 연유했음을 “여자”는 한 흐름에 간파한다. 국가 간 입양에 대한 “여자”의 분노는 따라서 그와 관련된 총체적인 사회 문제, 즉 미혼모들에 대한 정책의 부진함, 성교육의 미비, 인종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국제사회의 불평등, 서구적인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까지 이어진다.

 

 하나의 장시에 가까운 이 작품은 충동적이고 단순한 분노가 범사회적이고 근원적인 분노로 승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자는 화가 난다”라는 도입구는 이러한 연상과정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시는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혈연주의, 순결주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을 비참의 고통에 몰아넣었는지”(김혜순)에 대한 증언이자 고백(vidnesbyrd)이기도 하다. 저자가 총 137개의 주석을 달아가며 세심히 고증한 내용은 흡사 학술 자료와도 비슷하다. 상세하고 빈틈없는 자료 조사는 그의 분노가 지극히 사실기반적이고 정당하다는 것을, 감정에만 기대는 호소가 아니라 이성의 계몽을 촉구하는 타당한 주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종과 성별, 퀴어와 장애의 차별을 넘어-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서 다성악으로 터지는 목소리

 

 작중 “여자”에게 있어 친가족과의 만남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한국의 가족과 만난 “여자”는 한국에서 입양인으로, 동성애자로, 한국인처럼 보이는 덴마크인, 혹은 덴마크어밖에 모르는 한국인으로, 가부장적인 한국의 가족구성원으로 “살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하는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동안 자국민들이 보지 못했던 한국 문화의 맹점을 향해 세련되고 통렬한 비판을 던진다.

 

 “여자는 남편에게 여자의 존재를 끝까지 비밀로 간직하려는 언니들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언니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친부모의 태도에 화가 난다. 여자는 언니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자라 말하는 친모에게 화가 난다. 친모는 언니가 네 명이나 되기 때문에 언니들보다 여자 한 명이 희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여자는 친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는 여자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친가족에게 화가 난다.” (82~83쪽)

 

 단지 그들이 먼저 “여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그들을 찾았던 것”이라는 이유로 친가족으로부터 존재가 부정당한 경험은 “여자”로 하여금 디아스포라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되찾는” 것은 “단순히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살거나 친부모를 찾”음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친부모와 언어 및 문화를 상실하고 겪는 자연스러운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심리적 해방감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의 도입부에 실린 ‘인명 갤러리’는 이러한 경험이 단지 “여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입양인을 비롯하여 갖은 ‘차별’ 속에서 정체성을 지키려 애쓰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 공유된 경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여자”의 시점에서 발화되고 있는 이 글은 그들이 쓰는 역사적 기록이며 문학적인 증언이다(김 수 라스무센). 김혜순 시인이 말하듯, 이는 인종과 성별, 퀴어와 장애를 아우르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서 들을 수 있는 다성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디아스포라 주체들의 내면에 갇혀 있던 화가 사회의 문제적 결함을 향할 때 이 화는 자기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생산적인 힘을 발휘한다. “여자”가 말하는 “입양인으로서의 근본적인 슬픔”은 다만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가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가정으로 입양되는 경제적 권력 구조가 지배하는 세상의 희생양”으로서 겪는 슬픔이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세습되어온 일반적 사고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건설적인 분노이며, 약자가 더이상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동력이다. 이 책을 내려놓는 순간 분노 대신 희망이라는 감정이 샘솟는다면(『엑스프레센』지), 그것은 이 다성의 화음이 지닌 잠재성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여자는 가슴속에 솟구치는 울분을 진작에 치유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여자의 양모는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1년 전에 틱낫한을 만났다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라 덧붙였다. 여자가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인지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마음을 열었던 것은 바로 지금이니까.”_322쪽

 
 

◎추천평

 

한국인들이여, 자 이제, 우리의 진실을 마주할 준비를 하라. 우리가 전 세계에 버린 아이들이 돌아왔다. 지식인, 시인, 예술가, 노마드 소수자, 저항하는 주체가 되어 모국어도 없이 마이크를 들고 돌아왔다. 한국인들이여,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혈연주의, 순결주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을 비참의 고통에 몰아넣었는지 바라보라. 이산된 자아와 역사 없는 이방인이 된 그들의 비명을 똑똑히 들어보라. 그리고 감내하라. 입양 보낸 그들의 목구멍에서 쏟아지는 분노에 찬 비트를. 그 비트에 얹은 세상에서 제일 긴 여자 힙합 아티스트의 래핑을.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서 다성악으로 터지는 그 목소리를. 그리하여 우리는 통곡하라. 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불길에 온몸을 데이면서.

 

나는 마야의 낭독을 서울에서 한 번, 코펜하겐에서 한 번 들었다. 그리고 마야의 낭독을 들으며 울음과 웃음이 섞인 이상한 목소리로 화답하는 두 나라의 청중을 보았다. 나는 출생국과 입양국, 두 공동체의 비밀과 거짓말을 들킨 사람들의 미묘한 수치가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우리가 신봉하는 순결한 신부와 정상적인 가족은 원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순결이 어디 있고, 정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왜 없는 것을 신봉하여 우리가 낳은 아이를 키우지 않았는가. 왜 장애아, 여자아이, 혼혈아, 비혼모의 아이들을 우선 팔아먹었는가. 그 아이들이 자신마저 미워하게끔 했는가. 그 아이들이 자신마저 믿을 수 없게끔 했는가. 정신병자로 만들고 자살하게 만들었는가. 그러고서도 지금의 한국이 국민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가족주의 휘하에서 아이를 유기하는 폭력을 적극 지원하는 국가를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두었는가. 한국인들이여, 마야가 창조한, 이 영원히 돌고 다시 돌아오는 고백과 절규의 라임과 펀치라인을 들어보라! 우리는 이 노래를 세이렌의 음성처럼 뱃전에 몸을 묶고 들어야 한다.

- 김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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