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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금동원(琴東媛) 2022. 9. 22. 00:16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조용호/ 민음사

 

◎책 소개

뜨겁지만 희미한 ‘기억’과 선명하지만 차가운 ‘기록’

그 사이 어디쯤에서 ‘의문사’로 휘발된 삶과 실종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떠나는

그리움의 긴 여로, 그리움이라는 긴 여로

조용호 장편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등의 작품을 통해 사랑에 실패하고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주인공들의 정처 없는 마음을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 온 작가 조용호는 색 바랜 사랑과 흔적으로 남은 사랑을 그리면서도 사라진 것들의 회생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유하는 그의 소설은 정처 없되 한 번도 가라앉은 적이 없으니, 상실과 그리움의 추진체는 그에게 사랑의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떠다니네』 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소설이자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이후 12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작가는 이 소설이 될 이야기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어진 뒤 평생 동안 그 사람을 그리워하다 그리움을 빼놓고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한 남자의 이야기. 조용호가 가장 잘 쓰는 마음이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용호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는 조용호는 이전의 낭만적 열정을 지닌 조용호인 동시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세계와 조우하는 조용호다. 그리움과 상실이라는, 조용호 문학의 원형과도 같은 질료들이 현대사의 그리움과 상실로 자리를 넓힌 탓이다. 1980년대라는 시대가 낳은 비극은 어느 순간 문 닫힌 비극처럼 낡음 속에 갇혔다. 조용호의 이번 소설은 야학연합회 사건을 중심으로 닫힌 문을 열고 그 시대를 다시,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미시사나 거시사로 규정되지 않는 이야기는 문학적 시선이 무엇인지 확인시켜 준다. 개인과 국가, 현실과 환상, 사랑과 이별, 상실과 회복이 한데 뒤섞인 채 다만 잃어버린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주인공은 그동안의 부유함을 만회하려는 듯 거침없이 행동한다. 만날 수 있다면 간다. 실망하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길을 나선다. 물 위를 떠다니던 작가 조용호는 이제 길 위를 걷는다.

야학연합회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역사에 대한 연장된 시선을 제공하는 소설로 읽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이후 삶도 죽음도 의문에 부쳐진 한 사람에 집중해 읽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흥미로운 추적기가 될 것이며, 사라진 사람을 성실하게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 자신의 그리움에 최선을 다하는 이야기로 읽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그리움에 대한 실존적 성찰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의 세계로 수렴한다. 그리워하는 일에 대한 낙관이다. 포기하지 않는 그리움이야말로 완성된 사랑이다.

 

◎작가 소개

전북 정읍의 좌두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에서 대학을 마쳤다. 대학 시절 전공은 '문학'이 아니라 '신문학'이었다. 졸업 후 연행패에서 잠시 노래꾼으로 살다가 세계일보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서울대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1998년 《세계의 문학》에 단편소설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기타여, 네가 말해 다오』와 소설집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산문집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꽃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시인에게 길을 묻다』가 있다. 2006년 무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책 속으로

모든 것은 서서히 바스라진다. 한때는 절절하고 애틋했던 기억조차 모두 사라진다. 스러져 가다가, 한 번 사로잡혔던 사람이나 기억은 깊은 망각 속에서도 가끔 유령처럼 솟구쳐 울렁일 때가 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독자적인 생명체가 되어 저 홀로 희미한 빛줄기 속을 부유한다.

--- p.7

세월이 흐를수록 하원은 가슴속에 깊이 뿌리내린 내 몸의 일부와 같은 존재로 육화됐다. 일상에서는 잊혀져 갔지만 눈을 감으면 불현듯 떠오르는, 술을 마시면 안개 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연꽃 같은 존재로, 때로는 명치 끝을 아프게 누르는 육신의 멍울 같은 존재로 오래 남았다.

--- p.82

나에게 소설 쓰기는 유령의 삶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허구를 현실로 만드는 그런 행위였다. 하원이 사라진 자리가 만든 오래된 상실감에 그 여자가 덧들인 생채기는 오래전부터 꿈꾸던 소설 쓰기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로 작동했다. 홀로 읽고 홀로 썼다.

--- p.89

그 시절 죽음의 문턱까지 오가던 검은 건물의 기억조차 꿈이었을까. 젊은 그 시절은 없었던 걸까. 그녀도 환상이었을까. 사진 속 검은 건물은 밝은 가로의 불빛과 대조되어 몽환처럼 보였다. 지나온 30년의 흔적이 저런 빛깔인 걸까.

--- p.106

난간을 잘 더듬어 배에 오르십시오. 파도에 흔들릴 수 있으니 꼭 잡으시고 물보라가 일더라도 동요하지 마세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모습대로 모두 다를 겁니다. 풍경의 정답은 없습니다. 거짓도 없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모두 여러분의 진실입니다.

--- p.165

출판사 리뷰

■ 사라진 하원을 찾아서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에는 1980년대 야학연합회 사건이 자리한다. 사건의 경험자인 ‘나’는 당시 실종된 인물인 하원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30년이 지나도록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이제 ‘나’ 자신이 되어 버렸다. 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진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고 있을 때조차 ‘나’를 붙들고 있는 건 하원과 함께 보낸 기억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원의 젊은 시절과 꼭 닮은 여인을 만난 ‘나’는 그녀와 함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하원의 실종 사건을 추적한다. 그녀가 실종된 시점으로부터 30년, 조사 시점으로부터는 20년이 지난 지금, 단서라고는 없는 이 무모한 추적의 길에서 하원을, 혹은 하원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 기록과 기억 사이, 그리고 기억의 연대

한 사람의 시작과 끝에는 삶에 대한 기록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람은 출생신고를 통해 사회에 나타나고 사망신고를 통해 사회로부터 사라진다. 그런데 기록이 그 증명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의문사라는 상태는 사람의 존재를 휘발시킨다. 살아 있지만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지만 죽지 않은 상태. 하원은 의문사로 ‘처리’되었지만 ‘나’는 그의 삶과 죽음을 좀처럼 ‘완료’하지 못한다. 의문사로 일축된 한 사람을 기억하는 개인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을까. 한 사람의 기억이 할 수 없는 일을 별로 없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기억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잠든 기억들을 깨우기 위한 여행에 나선다. 필요하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만한 선택도 불사하면서. 하원에 대한 세상의 기억을 깨울 수만 있다면 오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 ‘푸른 눈’으로 보고 싶은 것

작품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사자의 푸른 눈’은 소설 속에서 이스파한의 3대 미스터리 중 하나의 이야기로 등장한다. 남쪽 사자상 앞에서 강 건너 북쪽 사자의 두 눈을 보면 청록색 빛이 레이저광선처럼 뻗어 나오는데, 신기한 것은 그 사자상 주변에 반사될 만한 아무런 조명도 없고 자체 발광할 조건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른 눈으로 사자상은 무엇을 보려는 걸까. 우리가 바로 그 북쪽 사자상이라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볼까. 반사되는 것이라고는 없는 그 캄캄한 밤에 우리는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다가 미라로 박제되는 기억”을 품고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리워하는 존재’들의 눈이 어둠 속에서 청록색 빛을 띤다는 아름다운 전설로 우리 가슴속을 떠다닐 것이다.

■작가의 말

언제부터인가 지난 시절 이야기를 후일담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지배했다. 서구에서는 아직도 끊임없이 2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서사를 세대를 이어가며 생산해 각광받고 있지만, 우리는 가까운 과거조차 은연중 낡은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는 세태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 이야기는 과거 한시절 에피소드가 아니라 언제든지 맞닥뜨릴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모든 것을 말하는 ‘파레시아’의 힘이야말로,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를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말을 믿는다.

◎추천평

기억은 대개 왜곡되거나 훼손된 채 “희미한 빛줄기 속을 부유”하지만 그 온전하지 않은 기억마저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일 수 없다. 조용호의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관계와 서류에서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해 버린 한 여자를 찾아가는 두 사람의 여정을 통해 기억하려는 자들의 치유와 회복을 그리는 동시에, 그녀가 연루된 독재 시대의 폭력과 야만을 함께 복기한다. 기억이 있는 한 그 누구도 함부로 ‘의문사’로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항변이 그들의 여정을 동기화한다는 점에서 소설은 그 소명을 다한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로, 기억의 공동체 안으로 돌아왔는가. 그 해답은 독자의 몫이다. 소설은 구태의연한 핏줄의 비밀을 끝까지 함구하며 다만 찾아가는 이들의 우회로를 정직하게 조명하는데, 바로 이 점이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의 또 하나의 미덕일 것이다.

- 조해진 (소설가)

소설의 기원은 서사시이며, 서사시의 기원은 노래다. 노래가 소설의 기원인 것이다. 노래는 듣는 이의 몸을 진동시킨다. 맥박을 진동시키고, 심장을 진동시켜 듣는 이의 감각을 자연의 상태로 변화시킨다. 나의 눈에 소설가 조용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이든 ‘노래꾼 조용호’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읽는 이의 몸을 진동시키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흔적이 소설의 결을 짙게 채색하는 낭만적 정서가 아닌가 싶다.

- 정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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