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만년필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아아,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주. 글을 쓸 수가 없었어. 먼저 그 참사에 대해서 쓰지 않고서는 다른 글을 쓸 수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거라. 아아, 영미야, 창근아, 이 할아비는 육신은 살아 있지만 영혼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그 사건 이후론 모든 것이 헛것으로 만 보이는 거다. 모든 것이 헛것이고 그 사건만이 진실인데, 그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그건 당최 무서워서 엄두가 나질 않았던 거다…… 그래, 오냐오냐, 이제 그 얘길 해보자! 영미야, 창근아, 이 만년필을 줄 테니 받아라. 정두길 선생이 나한테 이 만년필을 줄 때는 내가 살아남아서 그 참사에 대해 써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 나를 대신해서 너네들이 해보거라, 내 자세히 말할 테니. 자, 그럼 그 얘기를 해보자! 모진 세월 내 가슴을 썩여온 그 얘기를 해보자. 그 얘기를 내가 얼매나 말하고 싶었던고!”
--- pp.24~25
포구 밖 바다에 잠시 정박한 군대환에 거룻배 네댓척이 오고 가며 분주히 승객과 화물을 실어날랐다. 낡은 트렁크와 고리짝, 륙색, 보따리와 이불짐 들이었다. 떠나는 청년들의 짐 속에는 무명천에 곱게 싼 고향 땅의 흙 한줌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항해 중에 그 흙냄새를 맡으면서 심한 뱃멀미를 견뎌냈고, 낯설고 서러운 타국 땅 노동판에 떨어져 애옥살이를 할 때도 그 한줌의 흙은 버리지 않고 부적처럼 방 한구석 짐짝 속에 보관했다. 떠난 자들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그 땅은 그들 자신이었고 그들은 그 땅의 일부, 한줌 흙이었다
--- p.119
◎출판사 리뷰
제주, 그리고 한반도에 어린 격동과 파란의 역사
『제주도우다』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의 압박이 극에 달하던 1943년부터 4·3사건이 발생하고 토벌이 이루어진 1948년 겨울까지를 주요 시간대로, 역사 이래 육지의 지배권력에 거세게 맞서 역향(逆鄕)이란 별명을 얻은 제주의 해변 마을 조천리를 주요 공간으로 삼는다. 열한살 소년 안창세가 열여섯살이 되는 이 5년은 한국현대사의 최대 격변기로, 조천리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착취에, 해방 후에는 단독정부 수립 책동과 미군정의 폭압에 맞서 싸운다. 체제와 권력을 상대로 한 개인들의 싸움에서 승패는 자명했다. 『제주도우다』는 그 결과만을 향하지 않고, 그렇게 나설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잔인한 학살, 참혹한 비극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꿈틀거리는 사람의 형상을 부여한다.
『제주도우다』에 등장하는 사건과 사실은 더러 알려진 것들이지만, 소설은 낯익은 사실 너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손을 내민다. 하루하루 성실히 노동하고 저녁이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 속에 술추렴을 하는 사람들, 고된 살림과 물질을 한 몸으로 해내면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해녀들, 바람에 물결치는 초원에서 흥얼거림 같은 노래로 말떼를 모는 테우리들…… 이들이 또한 차별과 억압을 공기처럼 숨 쉬며 노역에 시달리고 이유 없이 채찍질을 당한 사람들이고, 체포와 고문을 피해 마루 밑에 몸을 숨긴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항일은 제 몸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돌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선포되었을 때, 이들은 이후에 어떤 역사와 마주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해방’이 과연 무엇일까? (…) 우선 등교할 때마다 등을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이 사라진 것이다. 다섯장 뗏장의 무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랍고 기뻤다. 압박과 해방! 온몸을, 등을 짓누르던 그 무게가 압박이고, 그것이 사라져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홀가분해진 지금의 상태가 바로 해방인가보다고 창세는 생각했다.(1권 233면)
좋은 세상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좌절
노인이 된 창세의 회고담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제주도우다』에서 사건을 이끌어가는 것은 해방공간의 청년들이다.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우파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경향에 대한 이해는 소박하지만 독립된 새 나라, 더 좋은 세상에 대한 열망만은 가슴을 태울 듯이 뜨겁다. 이들에게 해방공간은 일제를 물리쳐준 ‘좋은 나라’로 환영했던 미국이 “해방군이 아니라 훼방꾼”(2권 162면)임을 깨닫고, 가공할 고문과 폭력, 죽임에 못 이겨 입산을 “지상명령처럼”(3권 76면) 받아들이게 되는 시간이다. 가진 것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뿐 총도 거의 없이 죽창을 든 이들은 막상 4·3의 봉화가 올라 지서를 습격하고도 전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들 산부대는 “미숙함을 극복하기 위해 맹렬히 유격훈련을”(3권 85면) 하지만, 단독정부 수립 이후 더욱 잔혹해진 마구잡이 체포와 고문으로 민심이 돌아서고 마을의 지원이 끊기면서 고립된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이들은 “각자 결정하고 각자 싸우고 각자 죽”(3권 120면)어간다. 동굴 속 친구 곁에 남아 함께 굶어 죽거나, 혹은 토벌대의 총에 죽은 친구의 눈을 감겨준 뒤 하산의 길을 택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말한다. “우린 그때 살아도 살아 있는 걸로 생각 못 했어. 하늘로도 도망 못 가고, 땅으로도 도망갈 데가 없었주.”(1권 17면)
『제주도우다』는 이들의 싸움을 서술하면서 나란히 토벌대의 폭력을 나열한다. 다양한 증언과 취재를 바탕으로 한 이 폭력의 기록은 언어로 표현되었으나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다. 작가 현기영이 1978년 「순이 삼촌」을 통해 최초로 발화한 이 참상은 『제주도우다』에서 건조한 문장에 담겨 몇페이지씩 이어지면서 인간의 무력과 잔인을 곱씹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견뎌 살아낸 힘을 생각하게 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살육의 현장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인정의 손길에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게 만든다.
자유자재의 파격, 자연이 써낸 문장
바닥없는 폭력의 한편에서 제주의 자연과 풍습은 더할 나위 없이 정겹고 아름답다. 달리기를 잘하는 창세가 배달 배낭을 메고 바닷가를 달릴 때 펼쳐지는 끝없는 하늘과 바다, 흰 파도 위 통통배들의 풍광은 손에 잡힐 듯하고, 외삼촌 양산도가 “어려려려허 허허러러” 말 모는 소리를 하며 말떼와 거니는 초원은 지금 코끝에 풀 냄새가 끼쳐오는 듯하다. 물질을 마치고 불턱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해녀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생생하다. 소설 도처에서 마주할 수 있는 제주의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새겨넣은 묘사는 최근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고전적인 문장의 품격을 보여주면서 이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한다.
자연과 사람, 격동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제주도우다』는 글로 된 모든 장르를 동원해 파격을 가한다. 군데군데 인용한 전설과 설화는 제주의 역사, 제주 땅과 바다가 키운 사람들의 기질을 옛이야기의 재미로 들려준다. 또한 시와 희곡, 판소리 사설, 무당의 넋두리, 신문 기사, 격문, 구호, 노동요와 유행가, 저항가 가사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대목마다 집약적으로 실감을 전달한다. 앞 문장의 끝이 뒤 문장의 머리가 되면서 물처럼 이어지는 문장이 생동하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그때 그곳에서 사람들은 일하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소리 높여 외치며 싸웠다. 그들이 오늘 우리 앞에 다가온다.
스스로 “제주 4·3의 영령을 진혼하는 무당”이라 말하는 작가 현기영. 그가 등단 50년을 바라보는 문학 여정에 세운 이 우뚝한 이정표는 그 자체로 장대한 위령제를 지낸 듯하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사를 넘어 한국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로써 이제 우리는 제주 4·3을 더 당당히 이야기해야 한다.
◎작가 소개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1941년 제주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20여 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 제5회 만해문학상, 제2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1999년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집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타는 섬』『누란』, 산문집 『젊은 대지를 위하여』, 『바다와 술잔』 등이 있다. 우리 현대사의 이면을 다룬 깊이 있는 작품을 써왔고, 중후하고 개성 있는 문체로 오늘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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