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김혜순/황인찬 인터뷰/ 마음산책
“시는 인간 존재를 다른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이끕니다”
경계를 무너뜨리며 흘러넘치는 목소리
‘시인들의 시인’ 김혜순의 삶과 글쓰기에 대하여
40년 넘는 시력으로 한국 현대시의 저변을 넓혀온 김혜순 시인의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이 출간되었다. 황인찬 시인이 인터뷰어로 참여하여 2022년 1월부터 7월까지 서면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묶은 책이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뿐 아니라 삶과 예술에 대한 폭넓은 사유를 두 시인의 밀도 높은 언어로 담고 있다. 육체성과 타자성, 죽음과 고통, 가족과 시대의 억압,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등 김혜순의 작품 세계에서 도드라지는 주제 의식들을 그의 생애와 겹쳐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김혜순의 말』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고통’이다. 이 인터뷰집에서 우리는 몸의 고통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지, 그로 인해 어떻게 타자와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시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끝없이 시인 자신을 타자화해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위치에 우뚝 선 김혜순 시인. 그의 강렬하고도 지성 어린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글 쓰는 삶의 충만함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시인의 것이면서 독자의 것입니다. 시인과 독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장소에서 은밀히 만납니다. 시인은 유령처럼 독자의 시선에서 다시 탄생합니다. 그 만남의 장소 없이 시인은 존재하지 않지요. _233쪽
◎목차
서문
몸과 죽음
타자와 동물
어머니의 죽음, 남겨진 달
하기, 은유를 넘어
문학이라는 학교
문학과 정치
예술과 삶, 미래의 책
◎책 속으로
시는 대상 앞에서 대상이 죽기 전에 시인이 죽는 기록일 겁니다. 사물과의 작별, 세계와의 작별을 통해 잔혹한 죽음들과 맞서는, 선험적이면서 아찔하고 아득한 죽음을 구축하는 것이 시이지요.
--- p.21
‘시하다’는 ‘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
--- p.57
극단적인 인접성으로 매 순간 다른 것으로 옮겨 가는 감각으로 쓰인 시를 저는 좋아합니다. 시를 쓰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도 시 쓰는 사람이라는 이 유기체로부터의 해방감일 겁니다.
--- p.80
비탄이 기도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시인의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직 비탄만이 고통받는 존재와의 연대이고, 그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p.93
모성은 사회적 구성물입니다. 이 구성물 때문에 여자들은 여자처럼 살아야 하고, 자라서는 어머니 노릇을 해야 하고, 주부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안녕과 쾌락을 구할 땐 죄의식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 사회의 모성이데올로기가 여자들에게 영원히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되기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니까요.
--- p.108
고백시는 고백이라는 진술을 실종시키려 하는 글쓰기 형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백을 하면서도 고백을 배반하는 자기 전복, 이것이 고백시가 당도하는 곳이지요.
--- pp.120~121
시에 관한 정의는 시마다 다릅니다. 이 시에서는 이렇게 말해줘야 하고, 다른 시에는 전에 말했던 것을 뒤집고 저렇게 말해줘야 합니다. 시는 살아 있는 생물이므로 다 다릅니다. 다 살아 있는 모습이 다릅니다.
--- p.210
너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도록, 지워지도록 하는 자리에서 시의 정치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순간이 저는 가장 정치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에 의해 나-자아의 벽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내’가 ‘내’ 언어와 ‘나’의 죽음을 거쳐서 ‘너’를 끝없이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시의 정치성이라고 말해보고 싶어요.
--- p.227
시라는 것은 내면의 도형과 무늬와 바깥의 세계를 겹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 일종의 커다란 슬픔의 무늬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슬픔도 오래 지나면 무늬가 되겠다고요.
--- p.266
몸의 고통으로 새로운 전망을 여는 시
『김혜순의 말』에는 시인이 어린 시절부터 외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성장한 일, 대학에 진학하여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 정황, 동인 활동을 통해 여성주의를 익혀간 나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하던 중 경찰서로 불려 가 폭행을 당한 사건,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었던 에피소드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가 서로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모해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시인이 오랫동안 몰두해온 집필 방식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곧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글쓰기이다.
저는 제 고통이 극에 달한 밤, 제 몸에 돋는 거대한 날개를 목도합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여자의 어깨에 투명한 날개가 돋았다고 씁니다. 더 나아가 여자의 고통이 여자를 하늘에 올렸다고 씁니다. 그것뿐입니다. 오직 즉각적인 상상력에 의해서만 우리의 고통을 쓸 수 있을 뿐입니다. _85쪽
시인은 제 몸의 고통을 경유한 글쓰기로만 자신을 벗어나 잠시나마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 흐르듯 쏟아져 나오는 비탄의 언어를 통해서만 타자와 나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지워내는 시학이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김혜순 시인이 직접 겪어내야 했던 가부장제와 가족주의, 독재정권, 성차별, 팬데믹 사태 등을 관통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적 전망을 열어젖힐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시를 씀으로써, 글 쓰는 행위 자체가 저를 이 비탄의 바깥으로 향하게도 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시의 비탄으로 여는 일종의 시적 전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_93쪽
시인으로 사는 일의 모든 것
『김혜순의 말』에서 시인은 문학에 빠지게 된 계기로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집에서 세계문학 전집을 빌려 읽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학의 강렬한 첫 체험으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꼽는다. 한때 강은교, 이승훈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보들레르의 시와 니체의 아포리즘을 직접 번역해가며 공부했다고도 말한다. 데뷔하고 교수로 임용되어 오규원 시인과 함께 근무하던 시절을 술회하면서는 강의 준비가 자신의 글쓰기에 미친 영향을 되짚고 자신만의 시론을 정립해나가게 된 바탕을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강의하기 위해 준비한, 시어와는 다른 명증한 산문적 언어들이 시학이라는 산문을 쓰기 위한 연습이 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시에 대한 정의는 시마다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저의 글쓰기로 달성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지요. (…) 제 시론은 우리나라에서 비평가들이나 시론가들이 여성 시인들을 따로 떼내어서, 여성 시인들만의 시를 논하면서도 여성시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제가 나서서 여성시에 대한 시론을 전개하게 된 결과물입니다. _194~195쪽
시인은 진중한 문학론 외에도 개인적으로 즐기는 힙합 음악과 영화, 미술 작품 등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과거에 티베트와 네팔을 여행하며 목격한 불교의 만다라(曼陀羅) 형상에 대한 관심도 그중 하나이다. 시인은 우리 몸에 숨어 있는 이 도형과 무늬가 우리에게서 시의 목소리를 내어놓도록 이끈다고 말한다.
역동적인 리듬과 파동으로서의 글쓰기를 내어놓게 하는 게 시인 안에 들어찬 만다라인지도 모르지요. 리듬도 만다라도 모두 반복을 밑그림으로 갖고 있지요. 만다라는 대개 이차원으로 그려져 있지만 우리 안에는 제가 포탈라궁에서 본 삼차원의 만다라가 세워져 있겠지요. 그 삼차원 만다라가 다시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 포섭하면서 바깥으로 터져나가겠지요. _266쪽
이렇듯 『김혜순의 말』은 예술을 향한 시인의 지대한 관심과 열정, 그로 인한 시적 통찰의 순간들을 다채롭게 펼쳐놓는다.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며, 그의 담대한 생각과 경험을 진솔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김혜순은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만든 기괴한 이미지들과 속도감 있는 언어 감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김혜순이 시를 통해 끈질기게 말하는 것은 죽음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뜻없음, 지옥에 갇힌 느낌이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개체의 종말로서의 현상적,실재적 죽음이 아니라, 삶의 내면에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앉은 관념적,선험적 죽음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어느 별의 지옥』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어느 별의 죽음』은 세계의 무목적성에 대한 오랜 응시로 삶에 예정되어 있는 불행을 눈치채버린 이의, 삶의 텅 빔과 헛됨, 견딜 수 없는 지옥의 느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관주의적 상상력이 빚어낸 시집이다. 그의 시 세계는 일상적이고 자명한 것의 평화와 질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난폭하게 찌르고 괴롭힌다.
김혜순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초등 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원도 원주에 이사해 거기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원주여고를 거쳐 1973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처음 써 본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선하고, 이어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대학 졸업 뒤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3년 「김수영 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98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낯설고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그의 시세계는 비로소 문단의 공인을 받는다. 2019년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를 수상했다.
김혜순 시의 착지점은 '몸', 그것도 해탈이 불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해탈이 불가능한 몸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식육적 상상력으로까지 뻗친다. 이런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블랙유머에 바탕을 둔 경쾌한 악마주의"의 시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기 시의 발생론적 근거를 '여성'과 '여성의 몸'에서 찾는다. 이에 대해 그는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절대 해탈이 불가능하다. 여성은 식민지 상황에서 살고 있다. 사회학적 요인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식민지성이 있다. 이때의 여성은 인식론적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여성이다."라고 말한다. (출처: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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