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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산책

프리드리히 니체

금동원(琴東媛) 2014. 12. 8. 10:19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을 위한 아포리즘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다. 나는 성인이 아니라 사티로스가 되고 싶다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리고 이 책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의 19세기 철학자 니체가 던지는 질문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세상에!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깜찍한 소녀들도 “난 너무 예뻐요”를 노래할 때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의 19세기 철학자가 정색을 하고 “난 왜 이렇게 현명한가”라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니체는 도발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글을 물고기를 낚기 위한 낚싯바늘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글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말하면, 그는 ‘낚시질’의 원조인 셈이다. 그의 낚시질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그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도덕의 계보>에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우상의 황혼>에는 ‘망치를 들고 철학 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개인적으로 니체는 공손한 사람이었다는 게 니체 전기 작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글로 보는 니체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거만하고, 무례하며, 위악적이다. 그는 굳이 그 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한다. 그는 왜 존경받는 성인이 되기보다 지탄받는 사티로스가 되기를 희망했을까?

아포리즘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것, 높이 솟은 자만이 그것을 듣는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답을 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을 한 무신론자이며, 객관적 진리를 향한 형이상학적 전통에 반기를 든 반형이상학자이고, 보편적 도덕 가치를 정초하는 시도 자체가 무망하다고 본 비도덕주의자다. 그러한 도발적 주장 때문에 니체 철학은 한편으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비합리적인 철학의 전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용감한 철학으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아 왔다.

잠깐! 여기서 짚어보자. 니체는 신을 믿지 않은 최초의 무신론자인가? 아니다. 역사의 시계를 멀리 돌릴 필요도 없다. 니체가 철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도 신을 믿지 않았다. 니체는 형이상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반 형이상학자인가? 아니다. 형이상학을 반대한 근대 철학자는 너무 많아서 거론하기조차 힘들다. 대체로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데이비드 흄은 형이상학 책은 불태워버리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또 물어보자. 니체는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을 의심한 최초의 인물인가? 아니다. 도덕적 회의주의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이후 도덕적 보편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흐름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니체의 철학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니체가 주장한 내용에서 찾지 말고 니체가 주장한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니체 철학은 아포리즘(aphorism)의 철학이다. 그가 쓴 글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경구에서부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비교적 긴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간결하지만 다의적이다. 쉽게 전달되지만 모호하다. 누구나 쉽게 니체를 읽지만, 니체 철학의 이해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는 왜 이렇게 글을 썼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피와 아포리즘으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산과 산 사이를 가장 빨리 가는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아포리즘은 봉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된 자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여야 한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아포리즘은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아포리즘은 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포리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지각 경계를 흔든다.

광인이 전하는 '신은 죽었다'는 소식, 시장 사람들은 조소와 냉담으로 반응했다

니체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관찰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다. 신의 죽음은 ‘소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소식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즐겨 글을 쓰는 니체가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광인을 등장시켜 그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그게 묘하다. 광인은 이 소식을 기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광인은 시장 바닥에서 신을 찾다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외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절규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살해자 중에서 살해자인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가?”라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존재가 우리의 칼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며,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해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신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이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을 이렇게 맺는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 광인은 몇몇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불렀다고 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광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로 바뀌어 무덤덤하게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은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사건을 ‘근래의 최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사건을 극화해서 전한다. 영어권 세계에 니체 철학을 소개한 월터 카우프만은 이 극화된 장면이 성가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의 죽음은 과학적 관찰이 아니고, 형이상학적 고찰도 아니며, 19세기 유럽 문화에 대한 니체의 상황 진단이다. 이 극화를 통해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주장처럼 신은 원래 없었으며 단지 인간의 속성이 외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화적 표현은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을 조롱하고 비웃은 당대 유럽 문화에 대한 고발에 초점을 맞춘다. 신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신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죽이고 난 후, 그 신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죽은 신의 자리를 메웠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누구인가? 니체는 그것을 콕 짚어서 주장하지 않는다. 아포리즘을 통해서 기독교 신의 죽음과 새로운 신의 조짐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과학으로 읽는다. 종교적 미신이 사라진 자리를 과학적 미신이 차지했다고 바라본다.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근대(modernity)로 읽는다. 종교적 신화는 죽었지만, 이성과 계몽을 축으로 하는 근대 신화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본다.

니체는 신이 남긴 유산을 완전히 털어버리기를 원한다. 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죽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또 다시 아포리즘을 동원한다. 그 아포리즘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을 통해서, 때로는 디오니소스라는 그리스 주신을 통해서, 때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는 한때 그가 숭상했던 인물에 대한 혹독한 실명 비판을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인간의 역사는 디오니소스적 삼연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니힐리즘의 역사다

이 아포리즘이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던 니체를 철학의 장으로 이동한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것을 니힐리즘(nihilism)으로 읽는다. 니체는 그의 초기 작품 <비극의 탄생>에서 세계의 근저는 그가 스승으로 삼은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심연을 덮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플라톤이 세운 이데아의 왕국은 그런 영원한 세계를 지향한 것이며, 기독교가 만들어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감내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조건일 따름이다.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것을 니체는 ‘가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곧 ‘니힐’(nihil)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디오니소스적 심연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니힐리즘의 역사다.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을 아래에서 위로 세상을 바라본 ‘개구리의 관점’(Frosch-Perspektiven) 같은 철학자의 편견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틀에서 보면 기독교는 니힐리즘이고,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서양 형이상학도 니힐리즘이며, 도덕의 보편 가치를 주장하는 도덕주의자도 니힐리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를 최초로 부정한 철학자도 아닌 니체가 왜 그렇게 위험한 철학자로 취급되었는가 하는 단서를 하나 움켜잡는다. 니체는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모든 가치 체계가 니힐리즘이라는 점을 통찰한 철학자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고귀한 가치를 집어 던진다. 그래서 니체는 고귀한 성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저속한 사티로스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풍자(satire)는 그 어원이 바로 사티로스에서 온 말이다. 니체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독한 말을 내뱉기 위해 사티로스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지난 세기 후반기에 니체 읽기, 또는 니체 식으로 세상 읽기는 하나의 사조로 퍼져 나갔다. 그 불을 지핀 것은 프랑스어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원화된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 니체의 아포리즘을 이용했다. 미셸 푸코는 단 하나의 니체 철학이 있다는 점에 반대한다. 니체 철학은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 철학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니체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질 들뢰즈는 니체 철학이 본질적으로 복수주의(pluralisme)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니체를 니힐리즘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적극 해석한다. 생성과 다원성, 그리고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고 엉뚱해 보이는 우연성이 니체가 제시한 아포리즘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니체의 기획은 철학적 사유를 새롭게 했는가, 철학적 사유를 멈추게 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 니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니체만큼이나 오만했고, 니체처럼 음울했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린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히브리스(hybris)라는 위험한 단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히브리스는 무례하고 거만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술 마시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도 히브리스 범주에 들어간다. 타인을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는 행위, 자신을 과시하면서 잘난 체하는 행동도 모두 히브리스다.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를 잘 다스리는 데서 미덕이 나오고,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악덕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은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오는 불행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따르면, 히브리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다. ◀니체는 라이프치히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 뢰켄(Röcken)에서 루터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 묻혔다. 지금 그의 생가는 작은 니체 기념관으로 바뀌었고, 그의 조부와 부친이 사목했던 교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결국 니체가 꿈꾸는 미래의 철학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여부는 히브리스가 가진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 달려 있는 셈이다. 물론 니체와 니체주의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니체에 반대하는 이들은 니체 철학 자체가 히브리스이며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정지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니체 철학을 일종의 낭만주의적 흐름으로 보는 이유다. 어원적으로 보면, 니체 철학이 크게 의존하는 아포리즘이라는 말에는 이미 경계를 확정 짓는 지평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은 니체의 기획이 히브리스의 위험성을 뛰어넘는 생각의 새 지평으로 보는가, 아니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철학적 히브리스라고 보는가?

정재영(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 대학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나 자신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나 자신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기관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니체가 쓴 <이 사람을 보라>의 한 대목인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에 나오는 말들이다. 좋은 책을 권유하고 집필을 멈추지 않은 니체를 만난다.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자아를 만나고, 사회학자 랑게의 책에 빠져 랑게주의자가 되다

젊은 날의 니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 중의 하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었다. 그는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한 학기를 보내면서 신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와 갈등을 겪게 된다. 그는 본 대학에서 만난 저명한 문헌학자인 리츨(F. W. Ritschl)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학교를 옮긴다. 1865년 8월 17일에 본을 떠난 니체는 라이프치히에 도착해서 여전히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리츨 교수를 따라 문헌학자의 꿈을 키우게도 되었지만, 20대의 니체가 진정한 스승을 발견한 것은 어느 헌책방에서였다. ▶열일곱 살 무렵의 니체, 1861

“나는 그때 근본적인 원칙도 희망도 단 하나의 즐거운 기억도 없이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실망스러운 일만을 겪으면서 절망하여 갈팡질팡하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이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상상해보라. 어느 날 나는 그의 책을 발견했다. 헌책방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 책을 집어 몇 쪽을 넘겨 보았다. 도대체 어떤 악령이 내게 ‘이 책을 집으로 가지고 가라’고 속삭였는지 모르겠다. 이런 행동은 평소 책을 살 때 망설이던 버릇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집에 있던 나는 새로 획득한 보물을 가지고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그 정력적이고 우울한 천재가 뿜어내는 마력에 나를 맡겨 보았다. … 여기에서 나는 세계와 인생, 그리고 나 자신의 본성이 소름 끼치도록 웅장하게 비치고 있는 하나의 거울을 보았다. … 여기에서 나는 병과 건강, 유배와 피난처,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 ―니체, <라이프치히에서 보낸 2년에 대한 회고>

그리고 얼마 뒤에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랑게의 저서를 읽고 영향을 받게 된다. 1866년의 여름 기간 동안 니체는 랑게의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를 탐독한 후 일 년 반 뒤인 1868년 2월 16일에 게르스도르프에게 편지를 보내 랑게의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니체의 권유에 의해 게르스도르프는 이미 쇼펜하우어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니체는 이번에는 랑게주의자가 되기를 권유한다. 니체 자신이 랑게주의자가 돼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 책은 제목이 약속하는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무한히 담고 있으며, 반복해서 읽고 연구할 수 있는 진정한 저장고라네.” 그리고 니체는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유물론 운동, 다윈 이론을 포함한 자연과학 … 윤리적 유물론, 맨체스터 학설”에 대해 언급한다. 니체는 랑게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887년에 개정판이 나왔을 때는 한 권을 다시 통독할 정도였다. 이처럼 매번 새로운 ‘주의자’가 되기를 권유하는 것은 니체 철학의 핵심인 ‘생성’(혹은 되기)의 실천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작곡가 바그너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다

젊은 날의 니체에게 또 다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바그너였다. 1868년의 10월 28일,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을 들은 후 니체는 바그너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된다. 여성편력이 화려했던 바그너는 당시 라이프치히에서 은신 중이었다. 긴밀하게 주선된 만남을 통해 두 사람은 식사와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게 된다. 이후 니체의 행보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1869년 4월. 스물네 살의 니체는 바젤 대학의 고전어와 고전문학의 촉탁교수로 위촉된다. 리츨의 강력한 천거 덕분이기도 했고, 미망인이었던 어머니의 생활을 돕기 위해서라도 니체가 이 자리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교수 시절에 동료들과 함께. 왼쪽부터 에르윈 로데, 카를 폰 게르스도르프, 니체, 1871.10

니체가 선생으로서 보인 재능에 대해 몇 가지 일화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방패 이야기다. 니체는 여름방학 동안 호머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방패에 대한 묘사를 읽어 오라는 숙제를 냈다. 방학이 끝난 첫 수업 시간에 니체는 한 학생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대한 묘사를 읽었는지 물었다. 그 학생은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었다고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우리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대해 한번 묘사해주게나.” 곧바로 침묵이 이어졌고, 니체는 10분 동안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으로 교실을 왔다 갔다 했다. 잠시 후 니체는 말했다. “아주 잘했네. OO군이 우리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설명해주었으니, 이제 계속 수업을 하도록 하지.”

바젤에서의 생활은 니체에게 다양한 교류의 장이었다. 바그너와 깊은 유대를 나누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 신학자인 프란츠 오버베크, 종교사학자이자 법사학자인 바흐호펜, 동물학 교수인 뤼티마이어 등의 학자와 교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니체는 문헌학 교수의 자리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쓴 <비극의 탄생>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자 이러한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훗날의 니체는 “스물네 살에 대학 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글을 남길 정도였다.

심리적인 것도 있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교직 생활을 하기 힘들어진 니체는 1879년에 적은 연금을 받기로 하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십 년간의 교직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긴 투병 생활과 함께 니체의 다양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도덕에 객관적인 기초가 있다는 생각을 비판한 <아침놀>(1880), 처음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한 <즐거운 학문>(1882), 위버멘쉬(국내에서는 흔히 ‘초인’이라고 번역되어 왔다.)라는 개념을 도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니체의 철학적 윤곽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선악을 넘어서>(1886)가 이 시기의 주요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책으로 출간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에 쓴 수많은 메모들 역시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니체가 죽은 후에 나온 <힘에의 의지>는 니체의 유고 관리를 맡은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자의적으로 유고를 편집하여 만든 책이다. 유고의 자의적인 추출과 고의적인 삭제를 통해 완성된 책은 한때 나치의 사상에 맞춰진 것처럼 해석되면서 니체를 둘러싼 정치적 스캔들을 제공했다. 엘리자베트가 전쟁을 찬양하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독일군에게 보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녀는 니체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는데, 훗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된 거짓으로 일관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유럽 문명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신은 죽었다'

니체의 할아버지는 가톨릭교의 주교에 해당하는 루터 교회의 감독관이었으며,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작은 마을의 목사였다.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는 루터 교회 목사의 딸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이 일종의 반항처럼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또 다른 전기적 해설은 니체가 가풍에 충실한 아이였으며, 아버지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졌다고 진술한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어린 니체에게 충격을 주었고, 니체의 여정이 유사 아버지를 찾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가령, 니체와 바그너의 기묘한 관계를 상징적인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은 죽었다.”라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공격이나 논박이 아니라 서구의 지성사를 꿰뚫는 선언인 동시에 유럽 문명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것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의 죽음을 설명하는 한 대목을 음미해보자. “사람들은 부처가 죽은 후에도 수세기 동안 그의 그림자를 동굴에서 보여주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이 지금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신의 그림자가 떠도는 동굴들은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자 역시 정복해야만 한다.” 니체의 이 말은 그가 특정한 종교를 공격하려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왼쪽부터 루 살로메, 파울 레, 니체, 1882

니체의 개인사적 스캔들로 가장 유명한 것은 바젤 대학의 동료였던 철학자 파울 레와 그가 소개한 루 살로메와의 삼각관계이다. 파울 레는 살로메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하고, 플라토닉한 삼각관계를 형성하자는 살로메의 요청에 따라 니체를 끌어들이게 된다. 그런데, 니체가 살로메에게 청혼을 하면서 이들의 삼각관계는 종결이 된다. 이들의 사연은 호사가들의 재밋거리로 자주 거론되면서 여러 작품과 상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스탠포드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인 어빈 얄롬이 쓴 소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는 살로메가 니체를 위해 프로이트의 스승인 브로이어 박사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지만, 이 소설은 허구를 통해 니체를 정신 분석해보는 흥미로운 상상의 소설이다).

기존 가치와 관습을 뒤바꾸려고 했던 '망치로 철학하기'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인 들뢰즈는 니체에 관한 저작 <니체와 철학>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니체가 원했던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20세기 니체의 영향력은 철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이들에 의해 전유되었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다룬 흥미로운 책들로는, 영국의 소설가로 잘 알려진 아이리스 머독이 쓴 <니체>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바타유가 쓴 <니체에 관하여>, 피에르 클로소프스키가 쓴 <니체와 악순환> 등을 들 수 있다. 이 저자들은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소설을 비롯해서 다양하게 글을 썼던 인물들이다. ▶에드바르드 뭉크,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상화>, 1906

영감에 의한 글쓰기를 본보인 니체의 책은 수많은 저자들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것은 관습을 뒤흔들고, 새로운 가치를 도입하는 니체의 호소력에서 비롯된다. 니체의 저작 <우상의 황혼>의 부제가 ‘망치로 철학하기’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체는 기존 가치를 전도하여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기를 바랐다. 물론, 그가 사용한 ‘영원회귀’,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와 같은 사유의 언어는 손쉽게 잡히는 개념은 아니다. 그가 사용한 방법론인 고고학과 계보학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의해 이어지기는 했지만 니체는 체계적인 글을 쓰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아포리즘’과 같은 경구 스타일의 문장을 쓰거나 파편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작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스타일 때문에 니체는 종종 오해를 받아 왔지만, 그 덕분에 지금도 새로운 이해를 기다리는 인물이 되었다. 니체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책은 일종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였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한 후 두 달 만에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생이 좀 더 가벼워지기를 갈망하면서,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써 내려갔다. “나를 이해했는가?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니체전집 세트

프리드리히 니체 저

정동호 역

책세상

2005.10.31

한국에서 니체는 축복받은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집이 세 차례나 기획되어 간행되었는데, 현재 책세상에서 출간된 니체 전집이 여러 면에서 우리 시대의 정본이라고 할 수 있다. 책세상 출판사의 판본에는 니체의 다양한 유고들이 시기별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생전에 출간된 책을 읽어본 후 유고를 따라가는 것도 하나의 독서 방법이 될 것이다.

 

니체 그의 삶과 철학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저

김기복, 이원진 역

이제이북스

2004.11.17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니체, 그의 삶과 철학>은 니체의 여러 전기 중 충실도와 꼼꼼함에서 돋보이는 책이다. 책 속에 소개된 니체의 글은 책세상 전집을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전집과 비교하며 읽기에 유용하다.

 

 

니체

뤼디거 자프란스키 저

오윤희 역

문예출판사

2003.11.10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는 2000년도에 완성된 최근 전기라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1960년대에 집필된 홀링데일의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현대 철학자들과의 지성사적인 관계 등이 후반부에 등장하는 것이 장점이며, 상대적으로 쉽게 서술된 전기라는 점에서도 매력이 크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저

그린비

2003.03.25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다양한 연구자 중 한 명인 고병권의 글쓰기 스타일과 니체의 사유가 잘 결합된 좋은 개론서이다. 일부에서는 저자의 튀는 스타일을 문제 삼지만 니체보다 훨씬 더 얌전해 보이는 고병권의 글쓰기는 읽는 재미가 있다. 전반적으로 현대철학(특히 들뢰즈)의 니체 해석과 맞물려 있다.

 

글쓴이 이상용은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다. 여러 신문과 매체에 영화와 문화에 관한 글을 써 왔으며, 지은 책으로는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권의 공저가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물>철학자> 서양철학자 2009.02.16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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